웅사내만 인간이고, 나머지 4명의 사내들은 관념이라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설정 기반.

우진이가 쏜 총으로 인해 부상 당한 인간 한명웅을 사내(ㅁ, ㅅ)가 치료하는 내용 + 사내들이 인간 형태를 취하면서 생겨나는 현상.

장면 전환 페어 ( 밍+웅 → 섭+웅 → 섭+윱 → 윱+웅 → 윱+뀨 → 윱+밍 )

 

※ 상처를 꿰매는 표현과 약간의 폭력성 주의. 

 

 

 

 

 1920도쿄에서 남녀 한 명씩 두 구의 사체가 발견되는 일이 잦아졌다신쥬(心中)라 불리던 정사(情死)는 에도시대 당시 만연했던 인형극과 문학의 영향으로 전염병처럼 유행했었지만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사라졌던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런데 어떠한 연유인지 사회적 위치에 자리 잡은 유명인들이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또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불씨가 붙은 것이었다이룰 수 없는 현실로부터 생겨난 괴리에 절망을 느끼고 회의에 젖은 이들이 선택하는 결말은 이상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죽음이었다무지몽매한 일반인부터 박학다식한 지식인까지 살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 앞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체념하고 이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무고하게 죽어나간 정사의 배후에는 어떤 사내가 있었다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것의 존재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내의 눈에 든 자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불문율이 도시괴담처럼 퍼졌다소문이 퍼지게 된 시점은 1926년 8월 4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그의 애인 김우진이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가던 도중 시신 하나 없이 사라지면서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사람들의 가십거리로 입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레코드 음반으로 계약하지도 않았던 윤심덕의 유고작 사의 찬미(賛美)’가 히트를 치면서 여러 가설이 추측처럼 따라다녔고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두 사람이 생전에 있었던 일을 캐고 다니는 사람들도 생겼는데, 놀랍게도 취재 도중 그 두 사람 곁에 있던 또 다른 사내를 목격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내가 누구인지 찾으려 했지만 검은 양복을 입은 것 외에는 기억하지 못해 흐지부지되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죽음은 비밀의 베일에 싸여 소문만이 무성했고 그 여러가지 루머 중에 실은 그들 곁에 있던 의문의 사내는 실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추종자로 이 의문의 정사를 주도하고 사라졌다는 설도 떠돌았다. 

 

 의문의 사내ㅡ그 존재는 이번 윤심덕과 김우진이 바다로 투신하게 되면서 향후 어떤 파장이 일어나게 될 지, 그들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존재가 이 세상 어느 이야기 속에 등장해 남겨질 것이라는 미래를 읽고 있었다. 결말이 뒤틀렸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우리의 존재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내가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허스키하게 쉰 저음이 느릿느릿 이어지더니 희부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검은 양복을 빼어 입은 그는 눈을 감은 채 큰 키와 몸에 딱 떨어지는 핏을 자랑하는 양 긴 다리를 책상에 쭉 펴 올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받친 채 늘어져있었다. 추궁을 당하는 상대는 책상 앞에 놓인 카펫 위로 거의 기다시피 주저앉아 엎어져있는 인물로ㅡ 다름 아닌 김우진에게 총을 맞고서 너덜너덜해진 채로 돌아온 한명운이었다흰 셔츠는 왼쪽 배 부근이 동심원을 그리듯 피로 붉게 물들어있었고 왼손 또한 붉게 물들어 있었다지혈하기 위해 대책 없이 상처가 난 셔츠 위로 누르고 있던 것 같았지만 별 다른 효능은 없었는지 카펫 위로 피가 떨어져 혈흔이 만들어지고 있는 참이었다사내가 고개를 들어 힐끗 한명운을 쳐다봤다.

 

 

도달해야 하는 방향은 틀리지 않았지만.”

하아다친사람한테… 그게 할 말… 아윽!

 

 

 뭐라고 지껄이나 싶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기다리던 한명운은 오른팔로 바닥을 짚고 버티다 이내 힘이 풀려 결국은 고꾸라지듯 얼굴을 푹 숙였다흐으앓는 신음을 내지르더니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반 바퀴 구르다 옆으로 몸을 웅크렸다가까스로 왔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복도에는 핏자국이 뚝뚝 떨어진 채로 길게 이어져있었다. 헨젤과 그레텔로 잔혹 동화 찍는 것도 아니고. 쯧, 사내가 작게 혀를 찼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서야 완벽 범죄는 못하겠네증거 인멸 몰라그럴 거면 너도 그들과 같이 바다로 몸을 던지지 그랬어?”

아깐… 드러나면 크흐 안 된다며

 

 

 헐떡이는 숨소리와 말대답을 하는 소리가 뒤섞였다더 이상은 한계였는지 몸을 뒤집어 천장을 보고 누운 상태가 된 이후부터는 밭은 숨만 내쉬었다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한명운의 성격상 입을 놀리지 않고 있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사내는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감흥 없는 얼굴로 재떨이에 담뱃불을 꺼트렸다다리를 풀어 의자에 바로 앉더니 그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발을 떼는 속도가 느린 건 그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거였다의식이 흐릿해지는 한명운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만한 체력이 지금은 남아있지 않았다사내가 한명운을 비추는 전등을 가리고 서더니 제 밑에 널브러진 인간을 내려다봤다.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척을 느끼고서 한명운은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밀어 올렸시야가 흐리게 보인다고는 하나 검은 사내는 너무 선명했다. 사내가 허리를 숙이자 거리가 가까워졌다. 동요가 전혀 없는 눈은 고요했다. 무정한 검은 눈동자에 형편 없는 자신의 형상이 비쳤다. 

 

 

아름답지 못한 결말인 건알고 있는 거지?”

하아알아

존댓말.”

… .”

우선 치료부터 해야겠지저쪽으로 옮기는 건 아무래도 어려우려나.”

 

 

 사내가 잠시 긴 소파를 쳐다봤다 시선을 거두고는 몸을 일으켰다방의 구석에 놓여있던 구급상자를 가지고 한명운이 누워있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순간 사내로부터 한숨이 샜다.

 

 

이런 건 취향이 아니지만이 방에서 시체가 나오는 건 사양이니까.”

 

 

 한명운의 긴 자켓을 제껴 벗겨내고 상처를 살펴보려했지만 이곳으로 오는 동안 피가 어느 정도는 셔츠와 함께 응고되어 붙었는지 피와 엉겨붙어 셔츠가 손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김우진이 한명운을 총으로 쏘아 치명타를 입힌다는 건 원래 생각했던 각본엔 없던 내용이었다당연한 사실이었다갑판에 두 남녀가 올라서 있던 시점에서 이미 결말은 뒤틀린 것이었으니그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정체 모를 자신들의 존재가 세상에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된다는 미래도바다 속으로 휩쓸려간 그들의 죽음은 아름답지 않은 죽음이었으며, 이번만큼은 인간을 너무 얕본 이쪽의 패배였다.

 

 

이번 패인의 요소는 뭐라고 생각해?”

우진… 커헉!”

아니.”

 

 

 사내가 명운의 셔츠 위로 핏자국이 적셔진 상처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느닷없이 데인 듯한 통증이 불이 되어 온 몸을 태우자 하흑, 크하아아악한명운이 사내의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하며 온몸을 비틀었지만 사내가 몸을 짓누르고 있어 역효과였다비명 소리가 방음 된 방 안을 채우듯 울렸고 혼신을 다한 버둥거림이 느껴졌지만 사내는 늘 그렇듯 동요하지 않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죽고 나서 결말 종이를 태울 때도 이렇게 표효했지너 말이야.”

“놔카흑아파! 아아악!”

너는 우리처럼 실체를 빌린 관념이 아니니 어쩔 수 없나 싶긴 하지만.”

 

 

 사내가 상처로부터 손을 떼고 옆으로 비키자 그제서 숨을 터트리듯 한명운은 숨을 몰아쉬었다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가빴고 흉부가 오르락내리락 바삐 움직였다한명운은 사내를 눈물 맺힌 눈으로 쏘아보다 눈을 찡그리며 감고 입술을 악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간헐적인 숨소리만이 음절 단위로 마디마디 끊어졌다헐떡거리며 내뱉는 얇은 숨만이 허공에서 겹쳐졌다. 한명운이 이곳으로 오기까지도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성하지 않은 몸뚱아리를 이끌고 비척거리면서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도록 골목으로 몸을 숨겨 걸어오기까지 그 나름대로도 필사적이었다. 그 사이 몸 안에 있는 피가 많이 빠져나간 건지지금 잠들었다가는 그대로 세상을 운명하게 될 것 같은 감각이었다. 웃기지 마, 나는 이렇게 안 죽어. 한명운이 어떻게든 의식을 붙잡으려 하는 것과 별개로 사내는 무심한 얼굴을 한 채 가위로 피로 범벅된 오른쪽 배 부근의 셔츠 자락을 서슴없이 잘라냈다피가 굳어 말라붙은 셔츠를 벗겼다간 상처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조각나는 셔츠 사이로 마른 복부가 드러나면서 흉측하게 패인 자국이 보였다총탄을 피하지 못해 배에 박혀있었으니 중상이라면 중상이었다사내가 상처에 손을 가져가자 한명운의 몸이 흠칫 떨었다.

 

 

아아! 아파!”

참아아니면 죽던지.”

 

 

 냉정한 대답은 머리를 차갑게 때렸다생각해보니 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영원불멸의 검은 존재들은 사회에 놓인 바깥이 아니라면 자신이 죽든 말든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 살살 해줘.

 

 

 한명운은 최대한 비굴한 것처럼 나약하게 부탁했다. 동정심을 살 수는 없겠지만 조금의 자비는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조용히 한다면.” 사내의 말에 한명운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내는 특히나 시끄러운 걸 싫어했다. 소음이 멎고 평화가 찾아오자 그제서 한결 마음에 드는지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노력해볼게.

 

 

 긍정적인 대답이었지만 생각에도 없는 소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명운은 생과 사의 경계가 이 순간일 거라 생각했다. 자칫하면 그의 친구였던 김우진과 윤심덕 두 사람을 본의 아니게 뒤따라갈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

 

 사내의 행동은 홍차와 술을 마실 때처럼 여유로웠다. 그는 느긋하게 손을 움직였다. 핀셋으로 집은 솜에 소독약을 적시고 그 솜으로 상처 부근의 피가 묻은 살을 닦아내자 한명운의 몸이 움찔 움찔 흔들렸다. 컥흐윽하아, 한명운은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간혹 앓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튀었다. 소독 이전에 총탄부터 빼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기에는 온 신경의 고통이 앞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치료를 위해 닿는 손길마저도 쓰라리고 홧홧해 정신이 혼미했다.

 

 

엄살 피우지 말고 잘 생각해봐.”

 

 

 사내가 말을 걸었다. 인간이 아니라서 이 고통을 모르지. 한명운은 그 순간에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흐으” 희미한 소리로 반응했다.

 

 

패인 말이야김우진과 윤심덕이 네가 그린 결말과 다른 결말로 끝을 낸 거.”

우진… 그 새끼…….”

 

 

 평탄한 어조를 유지하는 사내와 달리 한명운의 목소리가 분노로 끓었다순간적으로 치켜떠진 두 눈에서 언뜻 살기가 느껴졌다무심코 힘이 들어간 탓에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로부터 통증이 올라와 아흑, 흐으윽애처로운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감은 얼굴로 고개가 젖혀졌다사내는 성가시다 생각하면서도 빈 주사기를 들었다. 이럴 때를 위해서 구비해둔 건 아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는 약물이 담긴 통에 바늘을 넣고 잡아당기자 실린더 안으로 액체가 차올라 찰랑였다.

 

 

힘 풀지 않으면 계속 아픈 채로 있던가.”

 

 

 감흥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말과 제 배에 닿는 날카로운 주삿바늘에 한명운은 태연한 척 긴장을 풀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하려고 노력했다. 잠깐, 그게 뭔데? 날 지금 협박하는 거야? 물어보려 싶었지만 입 안에서 말이 맴돌았다. 지금은 그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다. 더 이상 이 사내의 신경을 거슬렀다가는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안락사를 당한 후 고통에서 해방되는 평온이 순간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그건 명운이 원하는 미래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지금 이 고비를 넘겨야했다. 그래서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사내가 할 행동을 기다렸다.

 

 

왜 처음에 우리가 설계했던 동작이며 대사대로 하지 않았지?”

 

 

 사내의 입에서 느닷없이 다른 화제가 나왔다아? 한명운이 힘겹게 사내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우리에게도 규칙이 있어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지. 성격을 다르게 구축했으니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목표인 등장인물과 친해지는 건 좋아. 하지만 너는 어땠지김우진에게 총을 빼앗긴 이후에도 다른 총을 소지하고 있었지그리고 그걸로 김우진을 쏠 생각이었고. 

 

 

 총을 쏘지도 못하고 한 방 맞고 온 거 안 보입니까

…. 한명운이 눈빛으로 항변했지만 사내는 제 할 말만 했다.

 

 

설사 결말이 틀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안 되는 거잊었다고는 안 하겠지?”

살기 위한 하윽 자기 보호가… 나쁘냐?”

 

 

 명운의 눈이 사내를 노려보았다통증이 멎질 않는지 눈엔 여전히 눈물이 어려 있었다아씨아파 죽겠네……좁혀진 미간에 힘이 들어가 피지를 못하는 얼굴에서 억울함이 묻어났다사내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시선이 맞닿았다계속해서 찾아오는 통증에 명운이 기어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생에 대한 집착이 남긴 다짐 어린 말이 한기처럼 잇니 사이로 새었다산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이었다사내는 공감하지 못했지만 이해하는 척 그 말을 맞받았다.

 

 

그래서 우리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거잖아.”

하지만 아픈 건… 아욱크헉… 하아싫어.”

 

 

 고통으로 미간이 잔뜩 찡그려진 그는 끔찍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헐떡거리는 숨이 금방이고 넘어갈 것 같았다다른 사람이었으면 지금쯤 기절하고도 남았다.

 

 

“통증 이완제야. 힘 풀어.”

 

 

 얇고 긴 주사바늘이 배에 꽂혔다진통 성분이 있는 마취제였다. 성분을 들은 한명운은 그제서 긴장을 풀었다. 주사위 안에 차있던 약물이 전부 투입되고서 몇 분 지나자 한명운의 숨소리가 비교적 고르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는 게 낫겠는데.”

 

 

 사내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한 한명운의 눈빛이 쏠렸다.

 

 

가서 뭐라고말하라고?”

 

 

 누가 여기로 오고 싶어서 왔는 줄 아느냐는 눈이었다. 빤히 사정을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지 생각하려는데 사내가 그에 대한 답을 했다.

 

 

꿰매는 건 전문이 아니라서.”

… ?”

메스를 잡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괜찮다면 이대로 내가 계속 하고

“미친, 날 고문하며 죽일 생각이냐!”

 

 

 순간적으로 울컥한 마음이 치솟아 한명운이 감정에 받친 목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들어 사내의 멱살을 쥐어챘다. 그래야 몇 초였다. 힘이 들어간 탓에 상처로부터 통증이 밀려와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곧 아악, 소리를 지르며 한명운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뒤로 몸을 굴리듯 여러 차례 뒤틀었다

 

 

“아직은 약효가 다 들지 않았나 보네. 안정을 취해야지.

 

 

 큭큭, 사내가 웃으면서 비틀어진 넥타이와 구겨진 셔츠를 매만졌다. 생각보다 재밌는 반응을 보여줬단 뜻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이며 비웃는 소리는 명백한 조롱이었다. 인간이 아닌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내들은 인간인 저를 늘 우습게 봤다. 정말이지 재수 없어! 차라리 순경의 조사를 받더라도 병원으로 갈 걸, 미련하게 다친 몸뚱이를 끌고 왜 여기까지 왔는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애시당초 관념인 사내들이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제 착각이 부른 실수였다. 치료를 못한다면 여기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한명운의 몸은 이미 기력을 다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만한 힘은 없었다. 말도 안 돼. 진짜 이렇게 허무하게 죽나? 사내가 친절하게 병원으로 자신을 데려다 줄 리도 없었다. 김우진을 죽이려다 내 인생도 쫑나나. 우진아 내가 잘못했어. 한명운이 그동안 제가 살아왔던 삶을 반추하는데 사내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런 수술은 그 녀석이 잘할 걸성격이며 외모며 제일 신사답고 목소리도 스윗하지만까보면 그 누구보다 속이 검은 녀석 말이야. 우리 중에서는 제일 섬세하니까. 그 녀석 불러줄게.”

잠깐… 그래서 날 이대로 두고 간다고?”

설마 외로우니까 곁에 있어달라고 말할 건 아니겠지?”

 

 

 사내가 제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곧 임무를 다하러 갈 시간이었다. 죽음으로 인도해야 할 가녀린 영혼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바로 올 거야. 기다려. 사내가 애완견을 타이르듯 한명운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고는 일어섰다.

 

 

어리광이라면 나중에 받지. 금방 올 거야.”

셔츠… 김우진이 사준 거야.”

뭐야김우진을 미워하는 것 같더니미련이라도 남았어?”

그거 독일제라 비싼 거니까. 물어내.”

…….”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생각했던 사내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한명운은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고 자신이 궁핍하게 살았단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참신한 적반하장이군. 어색한 침묵이 잠시간 떠돌았다사내가 중절모를 비스듬히 쓰곤 푹 눌렀다얼굴이 사선으로 가려졌다.

 

 

몸이 완치되고 너를 다시 대체품으로 쓸 수 있다면 복귀 선물로 사줄게.”

위문 선물은 위스키가 좋아.”

욕심이 많네. 건강을 망치려고 자초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마가렛트 10박스.”

… 인간이니까 식욕은 당연한 건가.”

 

 

 사내는 중얼거리다 그 이후의 대답 없이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어둠이 되어 사라졌다그림자조차 사라졌을 때는 카펫 위에 널브러진 한명운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그는 사내가 사라진 걸 확인하더니 다치지 않은 오른 손을 움직여 사내가 옆에 개어둔 자켓으로 손을 뻗었다더듬더듬자켓 안주머니를 구석구석 훑었지만 지포라이터랑 같이 잡혀야 할 담뱃갑이 없었다.

 

 

아씨담배 두고 왔어

 

 

 비싼 거였는데 챙기는 거 깜박했어한명운이 오른 팔로 제 눈을 가리며 짜증을 터트렸다.

  

 

*

 

 

 사내가 사라지는 현상이 순식간이었듯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나는 것도 찰나였바톤 터치를 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아지랑이처럼 모여든 연기 속에서 왜소하고 가는 체형을 한 사내의 형상이 스르르 구현되어 나타났다한명운이 봤던 사내들 중 가장 수려했으며 고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내가 필요하다면서?”

 

 

 눈웃음을 짓자 가늘게 눈이 접힌 채 휘었다가을이 생각나는 목소리는 외양만큼 청량했고 감미로웠다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다른 이중인격인 모습이 환멸이 나게 싫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그러기에 조심했어야지너 같은 인간은 특히나 더.”

비꼬는 거라면 치료하고 사라져.”

그냥 가라고는 안 하네.”

총탄을 빼내는 게 아니면 병원도 못 가.”

그러겠지무슨 일이 있었는지 순경의 조사가 들어갈 테니.”

 

 

 사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굽히며 한명운의 옆에 앉았다상처가 전시되듯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보다 옆에 놓인 핀셋을 집고는 다른 한 손으로 메스를 쥐었다상처를 이리 저리 훑어보며 배 안에 드러난 부분을 보면서 사내가 중얼거렸다.

 

 

깊게 박히진 않았네생각보다 빨리 빼낼 것 같은데.”

무서우니까 그런 건 상황 중계하지 마.”

이제는 좀 덜 아픈가 보지네가 엄청 시끄럽다고 귀마개라도 하고 가라 하던데.”

이제서 약효가 먹혔나보지.”

 

 

 맞받아치는 한명운의 말은 부루퉁한 어조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통이 날뛰어 신경이 타버릴 것 같았지만-사내가 상처를 무식하게 짓눌렀던 것도 한 몫 했다- 마취가 전부 먹혀들은 건지 지금은 아예 몸에 감각이 없었다. 둔해진 감각만큼 몸은 무거웠고 의식만이 물 위를 떠돌며 부유하는 느낌이었다이것처럼 형체도 없고 불멸의 존재가 되어 산다는 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지한명운은 멍하니 생각하면서 제 배의 상처를 메스로 가르는 감각이 불쾌한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통증은 마비되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무서웠다자신은 인간이었으니 몸을 해치는 것에 대한 생존 본능과 두려움은 있었다. 사내가 허밍으로 도나우강의 잔물결’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태연히 부스럭거렸다. 한명운에게 지금 이 순간, 소리로만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색다른 공포였다.

 

 

그래도 눈은 감네. 무서운가 보지?”

 

 

 한명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자존심이 상해서라기보다 탄환이 빠졌는지 아닌지 알 수 없어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조금의 시간이 지체되고서 뺐어볼래?” 소리가 들렸다한명운이 실눈을 떠 곁눈질을 했을 땐 핀셋에 집혀있는 피 묻은 탄환이 보였다지금 제 뱃속의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거지장기는 그대로인 걸까그로테스크한 모습이 떠올라 한명운은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괜히 봤어아픈 것 같아차라리 병원 갈 걸 그랬나비위가 상한 것처럼 한명운이 으… 신음성을 흘리자 사내가 키득 웃었다

 

 

많이 째지도 않았어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었는데 넌 유독 엄살 심하더라.”

“몸이 뚫렸어! 아팠단 말이야.”

 

 

 한명운이 구겨진 얼굴로 진심을 담아 투덜거렸다. 억울해 보이는 모습과 떨리는 목소리가 꼭 울먹이는 것처럼 보였다.

 

 

“김우진 앞에서는 안 그러더니. 허세였어? 가만 보면 겁도 많고.”

난 아직 죽기 싫어.”

아직, 이라.”

 

 

 사내는 한명운이 말한 단어를 따라 읊조리며 바늘을 꺼냈다인간의 몸은 정말로 손이 많이 가실을 끼워 넣으며 그는 태연하게 아까 부르던 허밍을 이어 흥얼거렸다살을 봉합하기 위해 바늘로 옷감을 꿰매듯 끼워 넣으면서 사내가 물었다.

 

 

부루주아가 싫다고 그랬던가?

환멸 나.”

복수 하고 싶어?”

 

 

 한명운의 과거를 되짚는 질문이었다한명운은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그럴 생각이었는데?” 사내가 되물었다. 대답이 없자 사내가 물었다. 

 

 

지금은 아니야?” 

“몰라.

 

 

 싱거운 대답이었지만 제정신이 아닐 때 묻는 질문이었으니 지금 진위를 헤아리려 해봐야 별 효과는 없을 거였다. 흐음, 바느질하며 살을 꿰매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김우진이랑은 그동안 잘 지낸 것 같던데.”

“김우진 때문에지금내 꼴 안 보여?”

지금 치료는 누가 하고 있는 걸까.”

… 죄송합니다.”

 

 

 꿰매는 내내 눈은 뜨지 않은 채 질겁하는 표정으로 드물게 얌전한 한명운을 보고 사내는 한결 즐거운 듯이 손을 다시 움직였다결말이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사람을 움직여 큰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희열은 아니었지만, 평소 난동을 부리면서 눈치 없이 저희를 귀찮게 하는 것보다는 귀여워서였다. 생물은 강자에게 굴복한다니까. 가련한 것들. 사내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좋아.”

내 나이가 몇인데

 

 

 한명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말을 받자 우리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서인간은 전부 아이 같거든.” 대답이 돌아왔다뭐라고 더 말하려다 지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뭘 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연약한 존재일 거였다. 그러니 우습게 보는 거겠지. 살만 봉합된다면 상처가 아물 동안 입원실을 잡고 당분간 편히 안정을 취할 예정이었그 동안은 이 녀석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울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름대로 재밌지 않았어?”

“뭐가? 아 우진이? 독특하기는 했지.”

어떤 점이?”

그 녀석소심한 주제에 욕심은 많아가지고꼭 있는 부르주아들이 더 한다니까.

 

 

 물욕은 내가 더 셌지만. 한명운은 회상하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진이는 물질보다는 사랑과 이상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단 생각도 들지만평소에는 재미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나랑 있으면 자주 웃었었어매사 경직되어 움츠러들어간 채로 있기에 긴장 좀 풀라고 옷걸이에 내 몸을 걸거나 축음기를 뽑아 총을 쏘는 등 좀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내가 하는 게 뭐 그리 웃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우진은 좋아했어. 판에 박힌 걸 싫어하는 도련님에게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내용의 글을 읊어주니 반가웠던 것일지도 모르지고리타분한 자기에게 나 같은 후렌도가 있다는 건 과분하다 했었나하여간 말은 거창해가지고그 녀석이랑 같이 양과자도 많이 먹었었어. 우진이는 단 것을 썩 좋아하진 않아 나와 윤심덕이 거의 다 먹긴 했지만싸웠던 건 사의찬미 공연 대본의 결말 이외에는

 

 

 어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싸운 경험은 그 때 뿐이었다목소리를 크게 내 자기에게 저항했던 것도김우진은 지금껏 한명운이 만났던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몇 년 간김우진과 윤심덕과 지냈던 때는 결코 지루하지만은 않았다김우진이 도망치듯 떠나 상심에 빠진 윤심덕과 같이 지내던 5년 간도 허송세월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같이 술을 마시면 김우진 욕을 실컷 하다 노래를 흥얼이곤 했다. 높은 가락으로 곱게 뽑아낸 멜로디가 들린다. 그녀의 목소리다. 비탄에 젖어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애절했던 목소리기억 속에만 남아있는찰나를 살던 이폴리타바다로 추락해버린 히로인. 이제는ㅡ 더는 없는

 

 

“사이가 좋았네.

… 그런가?

 

 

 한명운은 멀뚱멀뚱 눈을 깜박였다. 갑판 위에 서있을 두 사람을 찾아 뛰쳐 나갔다 총에 맞았을 때는 소심한 김우진이 어떻게 이렇게 대범한 행동을 했지? 라는 의문과 맞은 부위가 아프다는 감각 때문에 혼란스러워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결말을 빼면 그들은 한명운에게 있어 좋은 추억이었다. 뒤늦게 자각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 한명운을 보며 사내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진 않아 아름답지 않기는 하지만그래도 비극적인 결말은 아닌 것 같네.”

무슨 소리야죽으면 다 끝인 걸죽은 다음 의미를 부여해봤자.”

 

 

 사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손을 멈추고 한참 한명운을 쳐다봤다. 크게 뜬 눈에는 놀람이 깃들어있었다.

 

 

의외네지금까지 네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그 사람들이 이르는 결말에 집착하기에 전혀 몰랐는데.”

그거야 내가 시간을 공들여온 수고가 무너지는 게 싫은 거지기본적으로 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찰나를 살아가던 윤심덕과 달라. 한명운은 노래를 부를 때 유독 아름답게 빛나던 그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기억 너머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맑고 풍부한 목소리가 그를 휘감았다불타는 유성처럼 바다로 떨어진 너는 죽어서 별이 되었지내가 그리던 결말과 달랐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했어네가 사랑했던 김우진과 함께나라면 이태리로 진작 떠났을 거야더 지체하지도 않고더 이상 고뇌도 후회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버리고 행복을 추구했을 거야. 우유부단하고 바보 같은 김우진그런 멍청한 남자를 사랑한 바보 같은 윤심덕내 손에서 놀아나지 않을 거였다면 그대로 사랑의 도피라도 할 것이지왜 그렇게 죽어내 결말대로 죽을 게 아니면 차라리 살지 그랬어한명운은 그들이 죽기 전 자신에게 남겼던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새로운 세상자유사랑.

 

 죽어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니 행복한가죽기 직전바다로 뛰어들어 숨통이 조여들 때 너희는 서로의 눈동자 속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영원을 느꼈나? 부질없는 짓을. 모든 것이 다 끝이야죽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야. 한명운은 그들의 생각을 부인하듯 고개를 저었다. 일말의 가치도 없는 상념이었다.

 

 

그래서 너는 다 낫고서 앞으로 뭘 할 생각이야?”

 

 

 어느덧 봉합 수술은 끝났는지 사내는 저를 내리깐 눈으로 보고 있었다. 뱀처럼 섬뜩이는 눈은 인간을 관찰하고자 하는 궁금증만이 가득했다. 바닥으로부터 등으로 올라오는 한기도 차가웠지만 실험대 위에 놓인 실험체를 분석하는 듯한 눈은 더 서늘했다. 한명운은 왼 팔로 바닥을 짚고는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켰다. 마취가 풀리지 않아 몸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다.

 

 

“지금까지와 똑같지. 어리석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 거야.”

“저런. 신중해질 수 있겠어?”

상황을 보고

 

 

 일어서려고 손으로 바닥을 짚고 발에 힘을 주려는데 현기증이 눈앞을 덮쳤다메슥거림이 울렁증처럼 느껴졌다. 욱한명운은 반사적으로 짚고 있던 손을 떼 입을 가렸고 지지대를 잃은 몸이 비척이다 힘이 빠져 도로 쓰러지듯 누웠다. 안개가 끼듯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무력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몸이 제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눈 앞이 흐믈흐믈 녹아내리듯 물러졌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수술은 무사히 끝났을 텐데, 어째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줘봤지만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 깜박 잊었다는 듯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서 약이 듣나 보네.”

아까 주사 맞혔다고 들었는데. 그거. 마취뿐만이 아니라 수면제도 섞여 있거든.

“뭣

마취 효과는 기껏 해봐야 1시간을 넘지 못하거든. 넌 아프면 소리지르니까 시끄러울 거라고 섞었다고 했어. 좀 자고 일어나면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어 있을 거야. 실밥도 뽑힌 상태일 거고.”

 너희들

“편히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안심하고 푹 자 둬.”

 

 

 아직 네가 해줘야 할 일이 남아있거든사내의 말에 뭔가를 따지려는지 한명운의 입이 뻐끔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명운의 손가락이 까닥거리다 멈추었다. 설피 떴던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고 몸에 완전히 힘이 풀려 의식을 잃는 걸 확인하고서 사내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구겨진 옷자락을 가볍게 털어냈.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로 자신들의 존재가 세상의 표면 위로 남게 된다 하더라도 어차피 인간들은 죽음으로부터 피해갈 수 없었다. 자신들은 촉진제 역할로 결말을 앞당길 뿐이지, 최종적인 선택은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걷게 되는 건 관성과 비슷한 작용의 원리다. 사내는 며칠간 잠들어 있을 한명운을 내려다봤다. 이 인간 역시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허나 자신들이 달라붙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염세주의로 빠진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만 밀어도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이었지만 한명운은 살기 위해 갖는 집착이 비이상적이었다. 집념을 표현하자면 가히 광기에 가까웠다그것만큼은 인정해줄 만 했다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나 혼자서는 못 옮기는. SOS를 요청해야겠어.”

 

 

 이대로 거실 한 가운데에 계속 방치해둘 수는 없으니까. 사내가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

 

 

 

 

이래서 인간을 선택하는 데 반대했던 거야. 걸리적거리게.”

그래도 인간 속으로 들어가려면 인간과 손을 잡긴 해야 하잖아.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말이지. 이 녀석은 너무 제멋대로 날뛰잖아.”

“우리가 인간도 아닌데. 사람 보는 안목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 없지.

 

 

 갈색 머리를 말끔히 올린 사내가 발끝으로 기절하듯 잠든 한명운을 건들였고 몸의 선이 가는 사내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그래도 나름 귀엽긴 해. 그 말에 상대편의 사내 얼굴이 굳어졌다. 대체 어느 점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게 꼭 언제 죽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말은 끝까지 듣고 봐야 한다더니. 고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말이었다. “너도 어지간히 악취미야.” 갈색 머리의 사내가 혀를 찼다. “칭찬으로 들을게.” 인상이 좋은 사내는 흐트러짐 없이 웃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사내가 큰 키를 굽히며 정신을 잃은 한명운을 내려다봤다. 공포감 조성으로 눈 흰자를 뒤집어까며 사람을 신경 쇠약에 걸리게 만드는 거라면 모를까왜 인간 뒤치다꺼리를 위해 성인 남자를 안아다 소파 위로 옮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껏 내가 시간을 들여서 수술해놓았으니까헝클어트리면 알지?”

 

 

 짐짝처럼 들쳐 매 옮기려 했지만 뒤따라붙는 상냥한 협박에 조심스레 목 아래 한 손을 끼워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릎 밑으로 끼워 넣고 안아서 소파에 살포시 놓아 운반하듯 옮겨줘야 했다상처 때문에 셔츠 옷가지가 잘려 나간 것이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동료라는 의식이 있는지 맨 처음에 한명운의 상처를 소독해줬던 사내가 얇은 담요를 덮어주고 갔다

 

 관념으로 존재하던 그것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감정이 없었지만 인간의 형체를 띠고 흉내를 내면서 어느 정도는 인간의 삶이 몸에 습관처럼 배어들어 있었다. 형체가 없는 그것들 사이에서 필요 없는 격식이었지만 한명운이라는 인간이 한 명 유입되면서는 적어도 형체는 인간형으로 맞춰두고 있었다. 그 편이 목표 대상이 될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쉽다는 용이성도 있었고 인간들 속에서 눈에 띠지 않고 적응할 수 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인간처럼 거처를 만들어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서 착안한 거였다. 관념으로 떠돌며 흘러다닐 때에는 이런 물리적인 요소는 전부 신경쓰지 않았다.

 

 갈색 머리의 사내는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소파에서 쥐 죽은 듯이 정신을 잃고 잠들어있는 한명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당분간은 이 소파의 주인은 다친 부상자의 보금자리였다. 그 말은 자주 애용하던 소파를 쓸 수 없단 사실이었다. 한동안이라고 해봐야 인간의 속도로 친다면 적어도 몇 주. 길면 한 달. 그 시간의 흐름도 그것들에겐 찰나였지만 몇 년 간 찾아오지도 않던 인간이 저희의 영역 안에 있는 게 내심 못마땅한 눈치였다. 사내는 내색 않고 잔에 위스키를 따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맛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간들은 술을 마실 때 음미했으며 취할 때는 기분이 좋단 표정을 지었다. 몸에 학습된 까닭인지 사내는 지금까지 저를 거슬리게 했던 한명운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사내가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들고 거실을 빠져나와 발걸음을 옮기자 서재가 나왔다. 발코니처럼 벽 한 면이 큰 창문으로 열려있는 장소는 풍경을 즐기기 적합했다. 들어갔을 때에는 누군가 먼저 와 있었는지 구석에 있던 레코드판이 돌아가고 있었다푸르스름하게 젖은 방안 속에서 담뱃불이 반짝였다입에 물린 담배가 손가락에 물리면서 입술이 떨어지자 잿빛의 연기가 입김을 따라 허공으로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 녀석. 계속 써먹기에 적절할 것 같나?”

 

 

 갈색 머리의 사내가 푸른 어둠속에 잠겨있는 존재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정확하게는 음악이 덧입혀진 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나팔 모양의 축음기로부터 흐르는 음악은 ‘도나우강의 잔물결’ 곡에 소프라노가 조선말로 가사를 붙인 노래였다. 가사는 비관적인만큼 우울하고 서글펐다찰나에 사는 사람이라고 성악가가 자신을 명명했던 것처럼 비운을 부르짖은 하나의 노래만이 끊임없는 반복 재생으로 되감아지고 있었다.

 

 

…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 말이야아름답지 않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동의를 구하는 질문은 어둠 속에 서있던 키가 작은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드물게 감상에 젖은 얼굴이었다담배의 불빛에 비쳐진 모습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지도 몰랐다. 위스키가 들은 잔을 홀짝이던 갈색 머리의 사내가 천천히 입을 뗐다.

 

 

오래 볼 생각은 아니었잖아.”

.”

 

 

 망설임 하나 없는 즉답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를 바라보며 잔을 잘게 흔들자 액체가 찰랑거렸다. 사내의 시선이 축음기 앞에 서있는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그렇지만 그녀가 그리운 거지?”

 

 

 침묵하자 고요한 정적이 들이찼다. 담뱃불만이 어둠 속에서 타들어가며 반짝였다. 그 모습에서 사내 또한 연소되듯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답하지 않아도 그의 눈동자로부터 윤심덕에 대한 감정을 읽어내는 건 쉬웠다.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운명을 알았지만 막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자라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녀의 미의식에 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존재들은 인간의 형태를 띠면서 조금씩 자유의지를 갖기 시작했다.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변하는 건 인간만이 아니라 베일에 감춰진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영원히 살아갔기에 찰나에 사라져가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때로는 그 여파가 그것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관념으로서 존재하는 그것들은 자신이 겪을 수 없는 그 순간에 매료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의 형태를 한 사내로 지내면서 그것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는 윤심덕을 사랑했어. 어쩌면 김우진만큼이나.

 

 갈색 머리의 사내는 말없이 돌아서 서재를 떠났다방 안에 남겨진 사내가 마음의 정리를 하려면 혼자서 사색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복도를 걷다 잠시 멈춰섰다. 사색. 그를 위한 배려. 실로 인간다운 사고방식이었다. 그것들이 처음 의도했던 흐름은 결단코 아니었다.

 

 

 

 사내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제가 눕혀 놓은 소파에서 자고 있는 한명운과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는 또 다른 사내가 있었다. 익숙한 자세가 흡사 사물과 물아일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인간과 닮아가는 건 우리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안 그래?”

 

 

 흑발의 사내가 긴 다리를 뽐내듯 의자에 등을 붙이곤 다시 늘어졌다느긋하고 태평한 소리에 갈색 머리의 사내가 그를 한참 바라보다 소파에 있는 한명운을 흘낏 내려다보았다사내는 중절모를 깊이 썼다옅은 금발이 중절모 속에 묻히며 얼굴의 반이 그림자로 가려졌다.

 

 

끔찍한 소리를.”

 

 

 사내의 형체는 머지 않아 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고 이내 어둠이었던 그림자마저 사라졌다. 그가 마시던 위스키 잔만이 책상 위에 남겨졌다. 불빛이 흔들거리는 위스키 표면 위에서 떠나니며 춤추었다. 

 

 

“글쎄. 어느 쪽에게 더 실례인 말일지.

 

 

 

 검은 사내는 다리를 쭉 피며 힘을 뺐다. 그는 나긋한 얼굴로 하품을 하더니 눈을 감곤 중절모로 제 얼굴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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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전환 페어 +웅   +웅  +윱  +웅  윱+뀨  윱+밍 )

(이걸 읽지 않으시더라도 글 읽으면서는 부디 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 치료법의 순서가 이상한 건 4명의 사내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다치면 당장 전문 병원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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