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꽉뀨. IF 윤심덕이 마지막에 김우진을 믿지 않았다면

 

※ 시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각의 밤, 구름의 그림자로 음영에 가려진 선박은 해저에 잠긴 것 마냥 고요했다아무도 없던 갑판 끄트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그 곳에는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검은 사내가 서 있었다그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 입에 문 담배를 느리게 들이마셨다 조금의 간격을 두고 내쉬는 행동을 반복했다바다는 밤하늘을 투영한 나머지 어둠에 물들어 담배연기보다도 매캐한 색을 띠었다. 사내는 달빛에 손목시계를 비춰보았다새벽 3새벽 별이 떨어지기까지 이제 머지않았다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지금껏 그들 곁에 있었던 시간도그녀가 살아 숨 쉬던 시간도.

 

 

 

비운은 절망을 부르고,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재능은 고독함에 사묻혀 처절하게 울부짖지.

 

 

 사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자신의 손끝에 묻은 여인의 온기와 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았다. 불과 몇 분 전공포에 질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던 윤심덕의 모습이 선명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불신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녀에게 총을 건네주던 순간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호의가 단번에 무너졌다사내와 그녀가 친밀하게 지내왔던 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예상했던 일이었다.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독단적으로 바꿀 수 없었다결말을 쓰는 사내 역시 등장인물로 소모품에 불과했다그들을 만나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 방아쇠를 당겼던 순간처럼. 사내가 한숨처럼 내뱉은 숨이 배연기와 섞여 얽히더니 공중에서 흩어졌다한적한 바람이 갑판을 쓸고 지나가 연기가 널리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 속에서 바다의 지평선이 보였다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사내는 더 이상 시계를 보지 않았다사건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눈을 감았다. 그녀가 발악하며 김우진에게 소리를 질렀다감정이 격양된 탓인지 숨이 가빴고 어조가 빨랐다화가 난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녀가 하, 헛웃음을 지었다.

 

 

ㅡ 나를 사랑했던 적은… 있어?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질문과 달리 목소리는 습기에 젖어 있었다사랑그 감정은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집어삼켰다사랑 앞에서는 이성이 허락되지 않았다관념으로 존재하는 사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단어였다.

 

 지난 5년 간 홀로 남겨진 윤심덕은 김우진을 잊지 못했다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어리석은 남자를세상이 그녀를 창녀라 욕하면서 비난의 여론이 쏟아지자 소프라노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가수 생활을 그만뒀다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그녀는 나약한 티를 내지 않았다.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한 적 없었다. 벼린 칼날 위에 서있는 사람 같았다. 사내는 김우진과 달리 위태로운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김우진이 부재한 5년 동안 곁을 지키며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고 술을 같이 마실 상대가 되어주며 친구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고독했던 그녀에게 사내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과정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중요한 요소는 정해진 결말이었으니까바꿔 말하자면 결말에 이르기까지 사내가 개입할 여지는 얼마든지 열려있었다그래서 사내는 윤심덕의 곁에 남았다당시 이유를 물었다면 변덕이라고 답했겠지만 지금 묻는다면 사내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분이 무엇인지 관념으로 존재하던 사내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내에게 윤심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했다. 그녀는 사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였다'순간'을 탐닉하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는 원석이기도 했다사내는 곁에서 아롱거리는 빛을 지켜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사랑을 품고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했다어느 순간부터인가 텁텁함이 몸 안의 깊은 곳에서 끓었다사내는 윤심덕이 죽지 않으면 그 불순물이 제 몸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우진이 윤심덕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1926년 8월 3일 여름, 자그만치 5년 만이었다이야기의 끝이 보이는 순간 사내는 잠시 망설였다그녀에게 이 소식을 알려줘 둘을 만나게 해야 할 아니면 이태리로 피신을 시켜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사내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제 자신에게 놀랐다관념으로서 죽음을 유도하는 존재에게 자유의지가 깃들어졌다그것도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저항하려는 방향으로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사내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다시 재회하는 순간에 개입하지 않았다정해진 결말을 멋대로 바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렇다고 결말에 이르는 시간을 늦추는 건 사내와 윤심덕이 추구하는 '찰나' 라는 미학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방관한 채 이야기의 끝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인이건만, 어리석을 정도로 윤심덕의 마음은 늘 한결같았다지금 이 순간까지도.

 

 

ㅡ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리고 미련한 건 김우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사내는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곁에서 다독이는 역할은 이미 끝났다꺼림칙한 감정은 사그라지게 만들거나 침전시켜야 할 불순물이었다윤심덕이 누구를 믿든 그녀가 죽는다는 건 변함없는 결말이었다. 김우진을 믿어 두 사람의 결말이 달라진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 지 생각해야 했지만 사내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기다렸다.

 

 

ㅡ 잘 가… 김우진!!

 

 

 타앙!

 총소리가 들렸다단말마의 비명 하나 없이 묵직한 물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그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총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생과 사의 기로(岐路)에서 김우진은 윤심덕을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그녀는 사내가 준 총으로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당겼다그녀는 최후의 순간에 사랑이 아닌 친구를 믿었다.

 

 

ㅡ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와 함께 견고했던 그녀는 산산조각 깨어지며 무너졌다곁에서 받쳐줘야 하는데이상한 상념이 끼어들었지만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ㅡ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그녀의 입에서 애절한 가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생명을 불사르며 부르는 유서는 그녀의 마지막을 찬란히 장식할 노래였다사내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고는 제 머리에 가져댔다그녀의 삶이 담긴 음색은 한()이 묻어나 서글펐으며 가여웠다사내는 눈을 감았다.

 

 

ㅡ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타앙!

 붉은 꽃이 흩날렸다종막(終幕)이었다.

 

 

 

 

 사내가 그들이 머물렀던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남녀의 시신이 제각기 다른 곳에 엎어져 있었다사내는 어질러진 방 안에서 둥글게 말려 구겨져있던 종이를 폈다원고지였다고국 순회공연으로 올리지 못했던 '사의 찬미'. 그 희곡의 결말은 제가 쓴 내용과 달랐다원고 속의 남녀는 이태리로 떠나 자유로워지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었다. 지은이는 김우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결말은 어떠한가결국 두 사람 다 죽음에 이르렀다치정싸움으로 번진 사건은 남자가 여자에게 총을 맞아 죽고여자는 죄책감에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사내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한 때 제 친우였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우진아내가 말했지넌 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사내는 원고에 담뱃불을 가져댔다불이 옮겨 붙은 원고지가 타오르며 바스러졌다종잇조각이 재가 되어 싸늘해진 주검 위로 흩날리는 걸 바라보다 몇 발짝 발을 옮겼다. 계단 위, 방문 옆에는 사내가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였던 윤심덕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사내는 그녀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허리에 팔을 넣어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그녀의 뒷목을 받쳐 저에게 몸을 기대게 했지만 힘이 없는 그녀는 자칫하면 부러질 것 같았다사내는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내의 옷에 그녀의 피가 묻었다.

 

 

심덕아나를 믿어줘서 고마워넌 나의 이폴리타였어.”

 

 

 사내는 더 이상 듣지 못할 말을 속삭였다반응이 없었다.

 

 

안녕내 히로인.”

 

 

 사내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거절 하나 없는 입맞춤은 서늘했다.

 

 

김우진과 너와 다른 점이 뭔 줄 알아네 입술은 너무 차가워. ]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당돌한 눈빛과 단호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떠돌았다사내는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온기를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너는 매 순간 뜨거웠는데 지금은 너무 차갑네이게 네가 느끼는 내 온도였을까. 사내는 제가 입은 양복 자켓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 어쩐지 추워보여서였다. 사내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일어섰다갑판으로 걸어 나가는 내내 시신의 머리로부터 피가 흘러 복도에 핏방울이 떨어졌지만 사내는 신경쓰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댓바람이 불었다갑판의 끄트머리에서 사내는 멈춰 섰다. 사내는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를 쳐다보았다몇 시간 후면 이 배는 부산에 도착할 것이다새벽이 밝아오고 사람들이 깨어나면 제 친구들의 시신이 발견될 것이었다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생각하는 대로 진행되었으니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뗐다.

 

 

심덕아나는 너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 네가 죽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같이 이태리에 가려고 했어김우진이 없는 시간 동안네 곁에는 내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녀가 죽은 이 순간까지도 사내는 목 안이 텁텁하다는 걸 알았다불순물은 사라지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채로 머물러있었다

 

 

그렇지만 너를 너무 잘 알았어. 네가 김우진을 총으로 쏘고 나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할 지도.

 

 

 가슴 언저리가 여전히 갑갑했다아마도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갈증이었다.

 

 사내는 제 품 안에 안겨있는 시신을 바라보다 희고 작은 손을 잡았다. 부드럽던 손은 빳빳하게 굳어져있었다붉었던 입술은 생기를 잃고 버석거렸다그녀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내는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는 아니었다. 고개를 든 사내의 턱으로부터 물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사내는 뒤늦게 그 물방울이 제 눈에서 흐른 액체라는 걸 깨달았다. 관념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을 생각했지만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날이 밝아오면서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사내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육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친구의 시신이 발견될 것이김우진의 시신은 풀리지 않을 난제로 남게 될 것이다범인의 정체는 알 수 없는자살 아닌 타살의 형태로어차피 이야기는 그들이 죽으면서 끝이 났으니 그 이후는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을 것이다

 

 선체 바닥에 긴 그림자가 생겨났다사내는 이미 떨어져버려 존재 가치를 다한 유성을 소중히 품에 안고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아침 부산도쿠주마루 선박에서 한 구의 남성 시체가 발견되었다신원은 김수산, 본명은 김우진으로 사인(死因)은 등 뒤에서 심장을 향해 쏜 총탄으로 인한 즉사였다이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가 머물렀던 객실 안에 피웅덩이로 남은 자국이 크게 두 군데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책상 옆으로 김수산이 쓰러져있던 곳이었고 하나는 방문 앞이었다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 혈흔이 없던 것으로 볼 때 동일인의 피는 아니었다

 

 

 방문 앞에 있던 피는 복도로 이어져 갑판의 끄트머리인 바닥까지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바다로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바다로 뛰어내리려면 난간에 발을 딛어야 했는데 허리까지 오는 갑판의 난간에 피가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사라진 사람은 명부에 윤수선이라고 적힌 승객으로 본명은 윤심덕이었다. 바다에 빠진 가능성을 염두하고 바다를 수색했지만 파도에 쓸려갔는지 떠오르는 시체는 없었다. 바닥에 흘려진 출혈량으로 추측해 볼 때 이 시각 김수산과 있었던 또 한 사람-추정으로는 윤수선역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단 의견이 제기되었다. 살해당한 한 남자와 있었다는 흔적만을 남기고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버린 한 여자. 살인 도구로 쓰인 무기는 방문 옆에 떨어진 총이었지만 1926년 이 시대에서는 이 상황만으로는 사건의 진상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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