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이 조국으로 돌아간 이후 시점.
윤심덕이 노래가 아닌 연극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에는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그녀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소프라노로서 가능한 분야였지 여배우로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연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군거리던 대화는 윤심덕이 처자식이 있는 김우진과 사귀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냐는 억측으로 이어져 소문이 퍼졌다. 풍문으로 퍼진 이야기는 지나치게 비약적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교제하고 있었단 기정사실이 문제였다. 사실이 발각되면서 문제는 커졌다. 매스컴은 과장해서 떠들어댔고 여론은 곧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가 비난받아 김우진이 같이 있어줘야 했던 때에 그는 말없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윤심덕은 그가 자신을 등져버린 현실에 그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김우진이 그녀를 떠나고 나자 윤심덕에게 남은 건 세상의 도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날카로운 비난뿐이었다.
도쿄에 남은 윤심덕은 여배우로도 소프라노로서도 무대에 서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세간의 냉소적인 시선을 무시하고 가수로서 무대에 올랐지만 그녀에게 누군가 악의를 갖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사태가 있었다. 장애물을 피하려다 왼쪽 하이힐의 굽이 꺾여 나가떨어졌다. 중심을 여차여차 잡은 탓에 넘어지지 않고 발목을 삐끗한 정도로 끝났기에 다행이었지 잘못 까닥했다간 발을 헛딛고 요란하게 넘어지면서 무대에서 추락해 크게 다칠 뻔 했다. 그 순간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있었던 그녀에게 다들 ‘독한 년’이라고 욕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곯아있는 상태였다.
소프라노로 명성을 빛낸 그녀에게 노래를 빼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딱 하나 그녀가 갖고 있던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의 곁에는 단 한 명의 사내가 남아있었다. 그녀의 애인은 아닌, 그녀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던 유일한 친구로 남들은 좀처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알았더라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윤심덕에게는 또 다른 새 소문이 뒤따랐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무대에 오르는 일은 없을 거야.”
왼 발을 끌고 무대 뒤로 돌아와 계단에 주저앉은 심덕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근처에 서있던 명운은 비탄에 잠긴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굽혀 앉았다. 허공에 떠있던 다리로부터 굽이 덜렁거리는 하이힐을 발에서 벗겨 서슴없이 그녀의 맨발을 잡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살펴보는데 크게 접질리는 바람에 가녀린 발목이 심하게 부어있었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신체 접촉이었지만 명운은 거리낌 없이 그녀의 발뒤꿈치를 제 한 손바닥에 편히 올려놓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발목을 쥐어 부어오른 부분을 눌렀다. 고운 얼굴이 명운의 손길 따라 찌푸려지는 것을 볼 때 아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신음성조차 새지 않았다.
“… 많이 아프겠는데.”
진찰하듯 발목 부근을 누르던 명운의 미간이 좁혀진 채로 굳어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잡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기다려.”
명운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녀 앞에 나타났을 때는 한 손에 얼음이 가득 담긴 비닐을 들고 있었다. 오는 사이에 일부 녹은 건지 땅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그가 다녀온 행선지를 표시하며 그려내고 있었다. 아직 날은 겨울도 아니었으니 구하기 힘들고 비쌌을 것이 분명했던지라 심덕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어디서 구해왔어?”
명운은 일상적인 질문에는 좀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양해를 구할 새 없이 명운은 그녀의 다리와 발을 붙잡고 얼음찜질을 했다. 그녀는 제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그에게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얼음주머니로부터 올라오는 한기와 고통에 신음을 삼키며 심덕은 명운이 하는 행동을 무력한 얼굴로 지켜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입을 연다 한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당분간은 쉬는 것도 좋겠어. 돈은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너의 가족들의 생계도 당분간은.”
심덕이 명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음주머니를 그녀의 부운 발목 부근에 가져댔다. 흑, 차가움과 통증에 순간 심덕은 방심한 것처럼 헛숨을 들이켰다. 한 번 입술이 떨어지고 나니 비명 섞인 신음이 입술 사이로 흘렀다.
“역시, 아픈 게 맞잖아. 내 앞에서까지 참아야겠어?”
그녀의 자존심이자 일종의 오기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명운의 눈에서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심덕이 다물린 입술을 떼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 괜찮겠어?”
“네가 괜찮지 않은 것보다는.”
“…….”
“심덕아. 좀 쉬면서 건강을 챙기는 게 좋겠다.”
테이핑은 명운이 직접 했다. 그를 보면 다친 적도 없을 것 같은데 붕대를 감는 손놀림은 능숙했다. 명운은 재기불능에 빠진 심덕에게 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건강부터 챙기라고 조언했다. 윤심덕은 한명운이 가끔 저에게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도. 애인은 아니지만 가장 친한 친구. 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주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윤심덕은 명운이 하는 말을 믿기로 했다. 사실 여부를 생각할 만큼 그녀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그 날 밤, 명운은 털이 달린 세련된 디자인의 모직코트를 윤심덕에게 선물했다. 서양에서 건너온 제품 같았는데 한 눈에 봐도 금액이 꽤나 나갈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받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무대에 서지도 않고 밖에 나갈 생각도 없어. 나에게는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환불해서 술이나 한 병 사다줄래? 같이 마셔주면 더 좋고.”
그녀는 지쳐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나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속은 문드러져있었지만 제 처지를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어떻게 버텨야할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고국이 아닌 타지에서 현명하게 살아남을 수 있던 것도 강단 있는 성격 때문이었다. 명운은 그녀의 말을 드물게 고분고분 듣는 것처럼 사라졌고 다시 돌아왔을 땐 술이 손에 들려있었다. 정작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 편도 아니었지만 심덕은 표면장력이 일어나도록 제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초반부터 그렇게 달렸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말려볼까 생각도 했지만 어차피 들을 것 같지도 않아 명운은 묵묵히 제 잔에 술을 따르고 그녀와 잔을 부딪쳤다. 알싸한 액체를 목으로 넘기자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크흐으!”
그녀는 그제서 강압감에서 벗어나 살 것 같다는 듯이 다시 제 잔에 술을 따랐다. 말없이 술을 들이키는 걸 반복하다 몸이 더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심덕은 휘청거렸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명운이 뒤늦게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챘다. 이성이라는 사고가 함락된 심덕이 명운을 째려보며 빼앗긴 술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지하듯 명운이 제 뒤로 술잔을 쥔 팔을 내뺐다.
“이제 그만 마셔. 너무 취했어.”
“하안며엉우은… 너까지, 끄윽! 나르을, 방해하는 거야아? 수리, 나르을 워하고… 이짜나아!”
심덕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팔을 뻗어 술잔을 잡으려 했지만 키 차이는 역력해 그가 긴 팔을 뻗어 뒤로한 술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제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자 심덕이 악에 받쳐 명운의 셔츠 옷자락을 쥐었다.
“수리이, 나르을, 마시게 내버려둬어어…”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팔을 휘두른 탓에 휘적거리는 손길에 채여 얼마 없던 세간이 흐트러졌다. 난동을 부리는 동안 앙칼진 목소리가 한참이고 방 안을 메웠다. 힘이 빠진 건지 심덕이 숨을 추슬렀다. 명운을 보던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싶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몸이 쓰러졌다. 명운이 다급히 허물어지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받쳐 안전하게 제 품으로 가뒀을 때에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잠든 상태였다. 진을 뺀 명운이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다 그제서 휘몰아친 폭풍이 지나간 것마냥 한숨을 내뱉었다. 이불을 깔고 그 위에 그녀를 눕히고서 이불을 덮어주는 동안에도 미동이 없는 걸 보니 다시 깨어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주위의 어질러진 물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뒤처리를 해야 할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 명운은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에 달만이 환했다. 완전히 정신줄을 놓을 때까지 취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그녀의 주사는 처음 알았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만큼은 삼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언제까지 이런 날이 계속 될지 어렴풋하게 머릿속으로 그리며 명운이 담배를 피울 때였다.
“…기무지인… 나쁘은… 새키…”
잠꼬대인지 흐느끼듯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명운이 고개를 돌려 심덕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감긴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강한 척을 하더니. 애처롭게 구는 생명체야말로 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명운은 그 모습은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에 담배를 물자 필터가 타들어가며 목 안으로 담배연기가 침전했다. 입 안이 씁쓸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심덕이 술이 마시고 싶다고 하면 집 근방의 사람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이자카야에 갔다. 당분간은 그녀의 변덕에 어울려 술상대가 되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제안은 명운이 했다.
“집에만 있으면 갑갑하니까. 가볍게 산책한다는 생각으로. 어때?”
그녀는 사람의 시선을 피해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를 따랐다. 접지른 발이 아직 다 낫지 않아 명운이 그녀를 업었다. 평소 시선보다 높아진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그녀는 이자카야에 들어가자마자 술을 여러 병 주문했다. 어제와 같은 패턴이었지만 엄연하게 공공장소였으므로 나름의 절제는 있었다. 무턱대고 술을 마시기보다는 천천히 술을 마시면서 그녀는 불평을 쏟아냈다. 서서히 취기가 오르자 윤심덕은 자연스레 김우진 욕을 했다. 명운은 맞장구를 치며 수긍을 표했고 그녀는 드물게 풀린 눈으로 웃었다. 평소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헤헤, 우리 명우니~ 역시 명우니가 제일 쪼아아~”
“심덕아. 많이 취했어.”
“으응~? 하나도, 안 취해느데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하는 대표적인 거짓말이 있다. 볼에는 홍조를 띠며 붉어진 얼굴을 하면서 말은 꼭 어눌하게 늘어지는데 자기는 안 취했다고 우기는 부류. 더 마셔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 시점부터 이미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는 경우. 지금이 딱 그 짝이었지만 술에 취했다고 하면 또 다시 심덕이 화를 낼 것 같아 명운은 체념한 얼굴로 “그래, 안 취한 거 알아.” 말을 정정하듯 고쳐 말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괴고 눈앞에 앉아있는 명운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봤다.
“음흉하게 생겨따는 거. 거짓말이야아. 너, 자알생겨써.”
“김우진보다 더?”
“… 여기서 왜 김우진 이야기가 나와?”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술에서 깬 것처럼 발음이 정확했다. 찡그린 얼굴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곁들어져 있었다. 찬 물을 끼얹은 것처럼 과민할 정도로 예민한 반응이었다. 분위기를 못 읽는 것도 아닐 텐데 왜 한명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잡친 기분을 날려보려 빈 잔에 술을 채우던 그녀에게 돌아온 반응은 의외의 말이었다.
“나는 탐미하고 싶지 않다며.”
심드렁한 말투와 같이 부루퉁한 얼굴이 보였다. 어딘지 삐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그 모습은 드물게도 한명운에게서 어린애 같은 모습을 엿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저런 표정도 지었던가. 천하의 한명운도 술에 취하나? 아니면 내가 취해서 그렇게 보이나? 감정 표현이 적은 그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심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응… 지금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심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자를 짚고 제 몸을 가누면서 심덕은 건너편에 명운이 있는 자리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명운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심덕이 명운의 넥타이를 붙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몸이 기울면서 얼굴이 가까워졌다. 몽롱하게 번진 눈빛에 명운의 형상만이 가득했다. 더운 숨과 술의 냄새가 코끝을 마비시킬 것처럼 진동했다. 심덕이 뭐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명운이 다시 말을 붙였을 때에는 이미 심덕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여있었다. 얼핏 보니 눈이 감긴 걸 봐서 정신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명운이 제 넥타이를 붙들고 잠든 심덕의 손을 살포시 풀어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더니.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을 거였다.
“기무지인, 정말 시러어… 짜증나아… 개새키… 끅… 주거버려쓰며언! 끅, 조케써어…”
술버릇인 건지 혀가 꼬인 발음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심덕의 머리가 명운의 어깨에 닿았다. 이내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온 것을 보니 그대로 잠에 든 모양이었다. 사내는 제 어깨에 편히 기대 잠든 윤심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체온은 너무나도 뜨거워 닿으면 금방이고 그 불꽃에 삼켜질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다가 닿기 직전에 손을 거뒀다. 제 어깨로부터 느껴지는 그녀의 숨소리가 선명했다.
나도 녹는 거 아닐까. 너의 그 온도에. 나처럼 아무런 온도도 없는, 사람이 아닌 존재도. 너와 같이 있으면… 인간이 되는 것 같아.
명운은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제 양복 자켓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조심스레 흔들어 그녀를 깨워보려 했지만 이미 의식은 수면 상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채로 푹 잠에 든 상태였다. 부축하는 것보다는 그대로 옮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머리를 제 가슴에 기대게 만들고는 그녀의 다리 아래에 팔을 받쳐 감쌌다. 조심스레 안아 든 채로 일어섰다. 집으로 가기 위해 밖을 나서니 바람이 불었다. 추운지 무의식중에 잠든 심덕이 덮은 자켓 속에서 움츠리듯 작은 몸을 웅크렸다. 가슴팍에 닿는 그녀의 숨결이 뜨거웠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 밑에서 명운은 제 품 안에 있는 체온을 느끼는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속도를 늦춰 걸으니 길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결말과 끝은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건만.”
어디까지나 절대치가 아닌 착각에서 기인한 감각이라는 것을 사내는 모르지 않았다. 사랑. 질투. 탐닉. 살아있는 생명체가 느끼는 감각. 아름답고 깨끗하지만은 않은 감정. 자신 같은 존재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의 것. 그럼에도 제 존재를 금방이고 허물어버리는 것 같은 온도와 무게는.
“체온이 낮은 건 도움이 안 되네.”
인간의 형상을 구축하면서 생겨난 한계였고 그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거절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명운은 저에게로 열이 옮겨와 미적지근해진 온기를 반추하는 것처럼 어둑한 밤거리를 한참이고 걸었다. 저에게 얹어진 무게와 체온은 신기하게도 귀찮거나 불편한 기분만 드는 건 아니었다.
명운은 심덕과 다르게 집 안에만 있지 않고 종종 외출했다. 김우진과 같이 세 사람이 있던 시절부터 명운은 종종 사라지곤 해 그의 행적을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처럼 자리 잡혀 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명운이 거리를 걷다가 잠시 멈춰 섰다. 신발이 놓아져있는 진열대 앞에서였다. 코트는 받지 않았다 치더라도 신발은 저번에 굽이 나갔으니 필요한 물품이었다. 지금은 좀처럼 밖에 나올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 굽을 본드로 붙여서 계속 신기에는 그녀의 발목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조금 굽이 낮으면서 예쁜 신발이 좋지 않을까. 그거라면 자주 신을 것 같은데. 명운은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놀랐다. 윤심덕에게 선물을 고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소품을 매치하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물론 저번처럼 받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선물을 거절했을 때에 명운은 내심 기분이 꿍했던 것을 안다. 그녀에게 갖는 서운함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루어지지 못한 탓인지.
그래야 인형 놀이를 하는 것 밖에 더 되지 않나.
원고지 위에서 춤추는 등장인물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아름답게 타올랐다 져버릴 유성이니까.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거라면 꺾이기 직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욱 비극적일 거니까.
허나 지금도 비탄에 차있는데, 여기서 그녀가 더 힘들어 하는 걸 보고 싶은 건지?
명운은 상념을 떨쳐내고 나열된 신발을 한참동안 살펴보았다. 여러 켤레의 신발이 있는 것 중에서 시선이 한 자리에 머물렀다. 5cm 정도로 굽이 적절하게 들어가 있는 신발이었다. 보는 순간 명운은 윤심덕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망설임 없이 포장해달라며 지갑을 열어 계산했다. 여자 신발을 남자가 혼자서 사는 건 드물었는지 주인장이 포장된 신발을 건네며 명운에게 물었다.
“그보다 누구에게 선물하는 거요?”
“친구에요.”
“흠. 마음에 드는 여자인가 보오? 신발이라고 해서 가족에게 선물하는 것인 줄 알았더니.”
신발을 선물하는 행위에 큰 의미가 담겨있는 것도 아닐 텐데 기묘한 말이었다. 명운은 제가 아는 지식으로는 이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어 되물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선물하면 무슨 문제라도?”
“신발을 사주면 그 신발을 신고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연인에게는 신발을 사주는 게 아니라는 말. 들어본 적 없소?”
아, 명운은 그제서 시답지 않은 대화를 이해했다. 그런다 한들 미신 아닌가. 어차피 연인 사이도 아닌데. 명운은 구태여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 집 안에서 보내던 심덕은 이 상황에 대해서 대책을 그리고 있었다. 무대에 서지 않으면 뭘 하고 살아야하지. 당분간은 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저에게 노래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우진이 고국으로 돌아간 지 며칠이 지나고 술을 마시면서 날을 보내고 나니 어느 정도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심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해야만 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색에 잠긴 채 날을 보내는 것도 더 길어져서는 곤란하다. 지금이야 한명운이 저를 도와준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그를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히 명운이는… 기묘하긴 하네.”
심덕이 턱을 괴었다. 머리는 예전처럼 단정히 틀어 올려 고정한 것이 아닌 푸르고 있던 상태라 긴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애인도 아닌 그저 친구.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관계. 어떻게 보면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존재로 눈을 뜬 어느 순간 한명운이 윤심덕의 생활에서 사라져도 어떤 말도 할 수 없겠지만 그 때는 자기에게 질렸겠지 생각하며 넘길 생각이었다. 서운하더라도 그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윤심덕도 한명운도 찰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해가 맞았다. 어쩌면 그래서 윤심덕이 힘든 시기에 같이 어울려 주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자신을 찾을 사람은 이제 한 사람밖에 없었기에 심덕이 “들어와.” 말했다. 문이 열리고 어김없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손에 무언가 들려있었다.
“받아.”
명운이 들어오자마자 심덕에게 건넨 건 상자였다. 저번에는 코트더니 뭔가를 사온 모양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신세를 지는 상황에서 이런 것까지 받기는 부담스러워 저번처럼 거절하려다 우선은 뭔지 확인을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심덕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선물에 어머, 감탄사가 터졌다.
“신발 예쁘네.”
그녀는 안에 담겨있는 신발을 꺼냈다. 그녀는 구두를 만지작거리며 살펴봤다. 취향은 어떻게 안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저번과는 명백히 다른 반응을 보면서 명운이 웃었다.
“이번에는 합격인가 보네. 또 다시 퇴짜 맞으면 선물 고르는 안목이 없는지 고민해야 할 참이었어.”
그의 표정이 드물게도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덕이 그제서 피식, 가볍게 웃으며 명운을 쳐다봤다.
“저번에 내심 삐졌지?”
“…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것처럼 보여?”
“흐응. 의외로 너도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걸 모르는 구나?”
“내가?”
“응.”
“설마.”
“뭐. 명운이 네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알겠던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심덕은 그를 보며 가는 눈웃음을 흘렸다.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코트는 이미 갖고 있는 것도 있었고 사치품이라 받지 않았던 거야. 그렇지만 현재 신발은 없으니까. 고마워. 잘 신을게.”
기뻐하는 모습과 사양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헛수고는 아니었다. 명운은 심덕이 들고 있던 신발을 뺏어 제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내밀며 손바닥을 보였다. 심덕이 눈을 크게 떴다.
“신겨주려고?”
“아직은 발이 다 낫지 않았잖아. 무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렇게 있으니 규수 집안의 자제가 된 것 같네.”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의자에 앉더니 순순히 다리를 뻗었다. 명운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치지 않은 오른 발부터 그는 구두를 신겼다. 치수를 물어본 것도 잰 것도 아니었지만 신발은 그녀에게 딱 맞았다. 이런 센스는 정말이지 제 애인이었던 김우진보다도 한명운이 훨씬 탁월했다. 테이핑이 감긴 왼쪽 발목을 조심스런 손길로 매만지더니 왼 발에 마저 구두를 신기고 명운은 조심스레 다리를 놓았다.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구두는 그녀에게 어울렸다.
“음. 잘 어울려.”
만족스럽다는 듯이 보는 명운을 보고 있자니 심덕이 소리내면서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신중하게 여자 신발을 구경하면서 고르고 있을 모습을 떠올려보니 어울리지 않아 우스웠던 탓이었다. 김우진이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을 놓고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명운이 심덕을 한참 쳐다봤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명운이 물으려 하는데 심덕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명운아. 예쁘게 신을게.”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눈동자가 저만을 비추며 아름답게 웃어보이던 그 미소를, 그 찰나의 순간에 사로잡혔던 것을 사내는 기억한다. 눈이 부신다는 표현이 어떤 건지 그는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
“결국은 도망가 버렸어.”
사내는 품속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입에 담배를 물곤 익숙한 몸짓으로 가져다댔다. 연기를 삼키자 불빛이 반짝였다. 총을 맞았다한들 아플 이유도 없었건만 이런 일이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몸이 비척거렸다. 중심을 다잡고 걸어가 레버를 돌려 축음기를 키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그 노래를 감상하면서 김우진이 쓴 원고에 제가 물고 있던 담뱃불을 가져댔다. 불이 붙어 바스러지며 조각으로 흩날리는 원고지를 바라보다 제가 썼던 원고 또한 같이 태워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불이 활활 타오르며 모든 걸 삼켜버리는 광경을 지켜봤다.
“미신도 무시할 건 못 되네.”
갑판으로 걸어가는 동안 사내는 제가 그녀에게 줬던 그 구두를 떠올렸다. 윤심덕이 투신하기 전까지 신고 있던 그 신발을. 난관에 팔을 걸치고 앞을 보니 물결치며 하얗게 부스러지는 파도가 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행복 찾는 인생아. 너를 찾는 건 설움일 뿐ㅡ
녹음된 음반은 절제된 듯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느끼던 감정은 금방이고 눈앞에서 그려질 것처럼 선명했다. 사내는 형체도 떠오르지 않는 거대한 묘를 향해 향을 피우는 것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드넓은 바다를 망연하게 바라보던 사내의 눈빛은 드물게도 애상에 잠겨있었다. 물결이 흔들림에 따라 사내의 눈동자에 비치는 수면도 너울너울 흔들렸다.
“심덕아. 지금은 행복하니.”
씁쓸함이 입 안에 가득했다. 결국에는 김우진이 쓴 내용도 제가 썼던 내용도 가치가 없었다. 사내에게 중요했던 것은 제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구두와 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으니. 사내는 애도를 담아 향 대신 제가 피우던 담배를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푸른 무덤으로 떨어뜨렸다. 흐리게 퍼지는 담배 연기가 손에 잡히지 않을 바람 따라 흩날리며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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