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가버스AU, 팁차, ㅅ팁 ㅁ차

리차드와 스티비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본공 기반 감정)+알오물 세계관을 끼얹은...

소재에 비해서는 비교적 무난하게 흘러갑니다.(챕터5까지는 무난하고 그 이후?부터는 섞입니다.)

※ 직접적인 수위 부분은 유료 발행으로 걸어둡니다.(링크)

 

 

 

 

 

1.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둘 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화제였기 때문이다.

 

일을 망치지 않으려면 눈앞의 목표에 집중해야한다. 과녁만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달려가되 나머지 방해물을 처리하는 것. 마피아의 솔져로서 임무를 이행할 때는 무릇 그러해야했다. 착오가 생긴다는 건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스티비가 할 일은 오늘 밤 10, 아폴로니아 바에서 써니보이의 상원의원 당선 기념으로 열리는 축하파티를 성공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각색한 그의 가더파더 일대기를 연기해 줄 배우들에게 무대를 맡겨 여기에 오는 많은 사람들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도. 이 일이 틀어진다면 제 보스가 사회적 입지를 다지는데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임무가 막중했기에 스티비는 리차드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느껴지는 향은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 그런 사소한 요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2.

오스카의 결혼과 아폴로니아에서 내쫓길 위기가 겹쳐 친구도 서식처도 잃을 예정인 리차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복을 빼입은 키 큰 남자 한 명이 성큼성큼 들어왔을 때 방어기제인지 상성이 저와 다른 페로몬을 느끼고서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젠장, 지금같이 심란할 때 저 녀석은 또 뭐야? 저처럼 형질을 지닌 사람인 건 알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있었기에 중요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다면 상황이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업무적인 이야기만을 교환했다. 공연을 같이 만들어가다 생각지 못한 장면에서 부딪치다보니 생겨나는 마찰이나 감정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정당하게 의뢰를 주고받은 것 뿐이었다.

 

 

 

 

3.

스티비를 오래 만난 건 아니었지만 리차드는 알고 있다. 스테파노 로시니라는 사람은 자신의 특권을 내세워 리차드 벨퓌오레를 협박할 생각 같은 건 선택지에 넣지도 않았다는 것을.

 

대답해, 리차드!!!

 

총을 제 머리에 겨누고 머리채를 쥐어 잡히긴 했지만 저에게 대답을 강요하던 행동은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라기보다 매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피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맑은 그 눈 어디에 흑심이 서려있단 말인가? 얼굴을 직접 마주한 건 아니었으나 배신을 당한 것 같은 목소리가 축축하다 못해 처절했다. 저 때문에 다친 오스카에게 온 신경이 쏠려있어 스티비의 외침이 온전히 닿진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에게 외쳤을지 전해지는 감각은 선명해서 희미하게나마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리차드는 셋이 같이 지내게 된 지금도 이따금씩 그 날을 회상하며 곱씹었다. 스티비는 당시 나에게 왜 기대를 했을까.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전에 만난 적도 없는데. 마피아면 냉정해야 하는 거 아닌지. 마피아라면 전부 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일 줄 알았는데.

 

 

울타리 바깥의 전혀 관련 없는 타인으로 지냈을 때야 관심이 없었지만 스티비의 천성은 마피아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인 면이 있었다. 어쩌면 그 영향 중 하나는 그의 가드파더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폴로니아를 포함한 주변 건물 일대를 전부 다 사버린 악덕한 마피아라고만 생각했는데 써니보이가 브루클린 브릿지의 전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의외였고, 건물을 사기엔 턱없이 적은 돈으로 스티비가 써니보이에게 아폴로니아를 사온 것만 봐도 그랬다. 스티비는 써니보이가 자길 버렸다고 했지만 이따금씩 스티비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오는 걸 보면 생각처럼 매정한 사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걸 보고서 이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서 놓아준 게 맞겠지.

 

언젠가 스티비에게 써니보이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묻기보다는 스티비가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 묻는다거나, 네가 썼던 마피아 일대기처럼 써니보이 보체티 일가의 내용은 어디까지가 사실 기반인지 그런저런 의문을 물어볼 때 스티비의 입에서 써니보이의 이름이 등장했다. 조직세계에 몸을 담았던 사람치고 험악하게만 자란 것 같진 않아 과거사를 들어보니 써니보이는 스티비를 아꼈던 모양이었다. 스티비가 말하는 써니보이는 독재자라기보다는 무리를 지키기 위한 통치자로 평소에는 아버지 같은 느낌을 안고 있었다. 일을 처리할 때나 사무적이고 강압적이지 제 조직원들에게는 관대한 면모가 많았다. 아니면 스티비를 편애한 것일 수도 있고. 스티비 본인은 자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피아를 하기에는 감성적인 면이 있었다. 지내온 삶이 있어 마피아같은 면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별 거 아닌 일에 감동한다거나 풀이 죽는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가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는 하고

 

 

리차드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서늘한 총구와 눈앞의 죽음을 맞이하며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당시엔 오스카밖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기는 죄악감이라고 하면 좋을까. 아폴로니아도 사라지고 오스카도 없으면 갈 곳을 알 수 없어서 마지막 기회랍시고 스티비에게 총을 겨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쏘는 것 또한 망설이게 되어서. 그 총구를 자신에게 겨눌 용기는 없었고 타인이 무대 위에서 저를 죽여준다면 괴로운 끝을 보지 않고 순식간에 세상과 작별을 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지만 스티비는 리차드가 비극으로 가정하던 닫힌 결말을 차고 행복한 미래를 가지고 온 방문객이었다. 무일푼이 되었지만 아폴로니아를 사왔다면서 해맑게 웃는 모습. 그때서 가지고 있던 적대감 같은 건 사라지고 스티비라는 사람을 포용할 수 있게 된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제 삶의 터전인 무대와 가족 같은 친구를 전부 다 지키며 친구 한 명을 얻게 된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리차드는 이따금 생각했다. 사과해야만 했다. 그 날 저질렀던 제 과오에 대해.

그리고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했다. 저와 상성이 다른 형질에 대해.

 

 

 

 

4.

스티비.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영업이 끝난 시각으로 바깥은 어두웠다. 청소는 당번제였고 오늘은 스티비의 차례였던지라 리차드가 말을 걸었을 때 스티비는 자루걸레를 쥐고 바닥을 닦는 중이었다. 시간? 스티비는 반문했지만 곧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뒷정리가 끝나지 않아서20분 정도면 끝날 거 같아.”

그래? 그러면 도와줄게. 바닥 청소랑 저기 보이는 바테이블 위만 정리하면 끝이야?”

? 아니, 그러지 않아도

내가 네 시간을 뺏을 예정인데 뭘. 그런다고 대충 닦진 마라? 내가 다 끝나고 검사할 거니까. 알았어? 농땡이 부리지 말고.”

 

 

, 너는 마저 닦아. 나는 저기 정리할게. 도와주겠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었는지 리차드는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잔을 안으로 들였다. 손걸레로 바테이블을 닦으며 정리를 계속하기에 리차드를 한참 쳐다보던 스티비는 다시 제 할 일을 마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자루걸레로 바닥을 닦으면서 스티비는 한참을 생각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생각을 더듬어봤지만 특별히 따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연기 지도? 하지만 연기 관련된 내용의 경우 리차드는 오스카와 같이 있을 때 짚어주곤 했다. 서로 견해가 다를 수도 있으니 그 편이 공평하다는 입장 때문이었다.-그럼에도 리차드는 오스카보다 요구하는 기준이 조금 더 까다롭긴 했다- 나에게 따로 할 말? 식사 관련해서도 특별히 스티비가 가리는 음식은 없었고서로 불편했던 점이 있었는지 생각해봤지만 이거다 싶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몸의 움직임이 느려져 스티비는 잠깐의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비운 후 물기가 없는 마른 바닥에 대걸레질을 계속 이어갔다. 어차피 이따가 되면 알게 될 일인데. 효율이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느니 주어진 시간에 할 일을 끝내고 리차드를 맞는 편이 좋을 거였다. 안에서 잔을 씻는 소리가 들려 스티비는 가게 안을 마저 정리하고 화장실로 갔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 자루걸레를 적시니 천이 물을 흠뻑 머금었다. 시멘트 바닥 위로 천의 면을 겹쳐가면서 팔에 힘을 줘 물기를 짜냈다. 구정물이 흘러나와 싱크홀로 빨려 들어가는데 멈춰뒀던 생각은 그때 다시 몰려왔다.

 

리차드는 나에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천이 마르도록 못에 대를 걸어두고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전등은 리차드가 껐는지 실내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영업 종료 시간이니 평상시였다면 문 밖의 클로즈 팻말까지 확인하고 문을 걸어 잠근 후 방으로 돌아가 하루 일과를 마쳤을 것이다. 건물 내부 안에서도 술병이 전시된 진열장만 환해 그쪽으로 다가가니 리차드가 촛불을 켜놓은 채 바테이블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흔들림에 바람이 이는지 초가 일렁였다. 어이쿠, 리차드는 초가 꺼지지 않게 불빛 주위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조심히 와줄래? 안 그러면 불 다시 붙여야 하거든.” 눈이 가늘게 휘어지도록 웃으면서 말을 건네니 뭐라고 하기도 뭐해 스티비는 조신한 태도로 걸어왔다. 이게 다 뭐냐는 식으로 스티비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리차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전등 구역이 나눠지지 않아서 이쪽만 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니까. 예전에 단속이 심할 땐 단골들과 종종 이렇게 보내곤 했지. 바깥 유리창을 통해 보면 영업이 끝난 것처럼 보이거든. 어때? 비밀스러운 느낌이지?”

지금부터 할 말도 그와 걸맞는 이야기야?”

 

 

스티비는 의자를 빼서 앉았고 리차드는 개운하지 않은 얼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그렇게 되나? 뒷머리를 긁적이는데 정작 본인이 불러놓고서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고민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술이라도 같이 마실래?”

나는 괜찮지만 리차드는 술 못 마시잖아.”

... 마시고 싶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도수가 낮은 건 괜찮잖아. 그치?”

 

 

술 냄새만 맡아도 미간을 찌푸리면서 기침을 하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대화의 시작에 앞서 망설이고 있는 게 느껴져 스티비는 리차드를 빤히 쳐다봤다.

 

 

도수가 낮은 술이 어떤 술인지는 알아?”

 

 

질문을 던지니 리차드는 응? 당황하는 낌새를 보이더니 술병이 전시된 진열장을 눈으로 훑었다. 오스카가 예전에 말했던 술이 이쯤 있었는데...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을 어물쩍거리며 흐리는데 거짓말을 못하니 티가 났다. 이런 부분에서 정말 정직하네. 저러니까 카드 게임에서 돈을 잃지. 도박의 기본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상대의 수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리차드는 제 자신을 방어하진 못할 망정 자기가 쥐고 있는 패를 다 보이니 글렀다. 지금은 도박을 안 하니 다행인가. 스티비는 가볍게 숨을 돌리면서 안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 리차드가 정직한 소리를 냈을 때는 다시 나온 스티비의 한 손에는 온더락 잔 두 개가 들려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뭘 쥐고 있나 했더니 물병이었다.

 

 

오스카가 당부했어. 리차드는 주사가 심하니까 감시하라고.”

 

 

사실 그런 부탁은 받은 적이 없었다. 오스카가 지나가는 말로 리차드는 술을 못해. 취해서 한 말은 나중에 기억을 못 하거든. 한 잔이면 취하니까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중에 같이 술이라도 먹자고 권해봐. 리차드는 솔직하지 못하니까.’ 스티비의 어깨를 툭툭 격려하듯 치면서 친목의 방법을 흘리긴 했지만 스티비가 말한 말은 많은 부분이 왜곡된 상태였다. 리차드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주사가 심하다고? 아니, 주사는 내가 아니라 오스카가... 나는 술 취하면 잠드는 편인데? 내가 모르는 버릇이 있던가?” 무언가를 곱씹듯 중얼거리는 리차드를 보면서 스티비는 물병을 잔에 기울였다.

 

 

마시는 기분을 내고 싶은 거라면, 기분만 내는 건 괜찮지?”

 

 

잔 두 개를 물로 채우고서 리차드가 있는 쪽으로 건네자 리차드는 눈을 깜박거렸다. 건배라도 하고 시작할래? 스티비가 잔을 쥐는 걸 보고서 리차드는 고개를 저었다. 스티비의 말대로 술이 필요해서 이렇게 망설이는 건 아니었다.

 

 

스티비.”

 

 

이름을 불러 운을 띄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말을 하려니 목 안이 간질거리는 감각이었다. 왜 이렇게 솔직해지는 건 어려운 걸까. 리차드는 스티비가 제 머리채를 잡고 총을 겨누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차가운 총구의 재질과 머리채가 잡히던 그 손길을, 대답하라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저에게 종용하던 그 목소리를. 연극이 아닌 실제 목숨줄이 붙잡힌 그 상황을. 스티비는 그 때의 기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있잖아네가 처음 여기 오고서 내가 너에게 총을 겨눴던 그 때 말이야.”

 

 

화제를 입에 올리자 스티비의 미동이 멎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색을 잃어버리는 광경을 리차드는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될 줄은 몰랐다. 상대는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들이닥쳐도 떠는 기색 하나 없었으면서, 흰 손이 떨기 시작하기에 리차드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정말로 미안했다! 지금 사과하기엔 너무 늦었지만꼭 이 말은 하고 싶었어.”

 

 

말이 끝맺어지고서 머지않아 손의 떨림이 멎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스티비가 굳어있기에 리차드는 어색하지만 저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견뎠다. 머리채가 잡혔던 당시 스티비를 쳐다봤더라면 마주했을 지도 모르는 눈이었다. 같은 감정은 아니겠지만 당시 그를 외면했을 때와 다르게 리차드는 저를 헤아리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언급한 과거의 기억을 환영처럼 보는 건지, 아니면 눈앞의 사람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스티비는 리차드를 응시한 채 가만히 있었다. 저를 보는 스티비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움직이려는 기색이 보인다 싶었는데 두 눈에 투명한 막이 어렸다. 검은 눈이 눈물로 젖어들어 리차드는 내심 덜컥했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이게 아닌데? 금방이고 울 것 같은 스티비의 모습에 당황스러운 건 리차드였다.

 

 

내가 말을 잘못했어?”

왜 나에게 사과를

내가 먼저 너에게 위협을 가한 거였잖아.”

죽이려고 한 건

내가 도발했던 거지. 스티비. 너는 아무런 잘못 없어.”

 

 

그 순간 다시 정적이 흘렀다. 스티비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차드는 그 순간 스티비가 이방인 같다고 생각했다. 이 아폴로니아에 속해있지 않았던, 의뢰를 맡기로 왔을 때 등장했던 그 때만큼이나 멀었다.

 

 

리차드. , 그런 말을 해.”

 

 

고개가 앞으로 살짝 기울더니 큰 눈으로부터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리차드는 제 자켓 속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뭐라고 말을 하면서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어 말없이 정사각형 형태로 잡힌 손수건을 내밀자 스티비가 한참동안 손수건을 쳐다봤다.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리차드는 황급하게 부인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세탁한 거야! 오늘 한 번도 안 썼어. 그래도 신경 쓰이면 반대쪽으

 

 

리차드가 하는 걱정은 아니었는지 스티비는 순순히 손수건을 받아 제 눈에 가져댔다. 평소에는 자기가 땀이 많은 리차드에게 티슈며 손수건을 건네고는 했었는데 이렇게 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묘했다. 더 신기한 거라면 지금 이 장면은 연극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티비는 새삼스럽게도 자신이 이제 아폴로니아의 보드빌리안이, 이들과 함께하는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어쩐지 목이 메는 것을 가라앉히고 감정을 조금은 추스르고서 스티비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리차드. 나는너랑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줄 몰랐어.”

 

 

영원히 덮어둬야 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음에도 이 화제를 꺼내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리차드가 왜 그렇게 망설였는지도 스티비는 이해했다. 아마도 리차드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스티비는 이 때의 일을 다시 언급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평화가 유지되고 있을 때 굳이 분란거리를 만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의 기억을 굳이 꺼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당시 둘은 서로 상반된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과거로 묻어둔 일이었다.

 

 

언제가 되었든 한 번은 말하고 싶었어.”

 

 

리차드는 쓴 얼굴이었다. 제 과오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서 책임은 정작 다른 사람에게 미뤘고 그 동안 모른 척 했으니 지금은 사과를 해야 할 때였다. 이미 일어난 일은 기억에서 지울 수 없겠지만. 결말이 좋다고 과정이 모두 좋은 건 아니었으니 확실하게 해둘 수 있는 부분은 정리를 해두는 편이 같이 지내는 서로에게 좋을 거였다. 무엇보다 정말로 이젠 과거의 일로 남았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이거 말고도 이야기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으니까.”

 

 

스티비는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제 가까이에서 갑자기 향이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위기를 감지하고서 스티비는 아까와 다르게 눈을 부릅뜨더니 손을 짚고 의자에서 도약하며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거리를 두는 것처럼 스티비는 뒤로 몸을 물렸다. 순간 초가 크게 흔들리면서 주위를 밝히던 영역도 덩달아 흔들렸다. 페로몬을 방사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쥔 채였는데 반사적으로 끌어올려지던 페로몬을 강제로 억누른 탓에 큰 키가 휘청였다. , 차드아랫입술을 물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상대를 부르자 미안, 리차드는 짧게 사과하며 제 페로몬을 거두더니 바닥에 떨어진 제 손수건을 주웠다.

 

 

 

 

5.

이번에야말로 우리 한 잔 할래?”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겠다고?”

 

 

그 동안 형질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으면서 스티비는 정색부터 했다. 인상을 구기며 반문하는 모양새가 이제는 제법 일반인 같아 조금은 웃겼다.

 

 

마피아들은 보통 술과 함께 거래를 진행하지 않아?”

 

 

리차드는 피식 웃더니 제 앞에 있던 잔을 잡았다. 아까 스티비가 따라준 물이었다. 처음부터 술을 마실 생각은 없던 모양이었다.

 

 

스티비, 네 말대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알코올로 정신을 흐리면 안 되지.”

 

 

여기에 오스카가 있었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말이었다.

둘은 바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으로 앉았다. 사이에 둔 초가 밝히는 반경 거리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은 적당히 어두웠고 벽 앞으로는 사람 형태의 그림자가 드리워 분위기 조성만큼은 앞으로 이야기 할 내용과 딱 들어맞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리차드였다.

 

 

너도 알다시피 오스카는 베타야. 우리 같은 사람은 아니지.”

오스카는 네 형질을 알고 있어?”

그럼. 알고 있지.”

 

 

리차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랑 오스카는 같이 자랐으니까. 평소처럼 지내다가 성인이 되는 무렵, 도중에 내가 발병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뭐. 내 경우에는 운이 좋았지. 늦은 밤에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주저앉았는데 같이 있던 손님 중 한 명이 증상을 보더니 자기가 먹는 약이 있다고 바로 넘겨줬거든.”

 

 

회상을 하는 얼굴이었지만 담담한 어조였다.

 

 

처음 발현했을 때라 억제제가 잘 안 먹긴 했어서 며칠 고생하긴 했지. 지독한 독감에 걸린 거 같았어. 다른 점이라면 몸이 이상할 정도로 달아올랐다는 점이겠지. 발열이 나고 이상한 충동이 도무질 사라지지 않으니 제정상은 아니었지.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방 안으로 들여보낼 수도 없었고. 오스카가 내가 잠든 사이에만 간병하느라 고생 많이 했지. 추후에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어. 알파니 오메가니 그런 설명과 함께 앞으로 어딜 가야 한다거나, 뭐 그런저런 설명들도. 약을 먹어도 자취가 지워지는 건 아닌지 그 날 이후로 나에게 술을 건네는 머저리 같은 놈들도 많았지만너도 알다시피 난 술이라면 질색하니까.”

 

 

리차드는 흥, 비웃더니 잔에 입을 가져댔다. 목을 가볍게 축이고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단골들이 권해도 마시지 않는 술을 내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마시겠어? 어떻게든 오메가랑 엮여보겠다고 흥분제를 술에 타서 많이들 주는 거 같았지만 나처럼 술을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고. 그래서 억제제만 잘 먹으면 얽힐 일이 없었지. 약은 알다시피 무상으로 지원해주고 있고. 하긴, 그게 아니면 여러가지로 골치 아프겠지. 이런 쪽의 치부까지 보면서 문란함을 즐기고 싶지도 않을 거 아냐. 술병을 던지지나 않음 다행일 거 같은데.”

그렇구나.”

솔직히 돈이 없어서 가난했던 생활고가 더 컸지. 내가 오메가여서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해본 거 같아.”

 

 

형질 이야기를 하는 거면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평탄한 과거였다. 스티비는 리차드가 술을 못해서 다행이었네. 오스카가 베타인 것도 다행이고.’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다.

 

 

스티비. 너는 어땠어? 너도 지금까지 이쪽 이야기는 한 적 없었잖아.”

 

 

리차드는 스티비를 쳐다보면서 한 팔로 비스듬하게 머리를 괴었다. 제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는 자기가 들을 차례였다. 스티비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리차드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눈치였지만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써니보이 밑에서 지내다가 18살 무렵이었나. 그 즈음에 개화했었어.”

흐음. 뭐 특별한 일은 있었어?”

처음에는 나도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 수 없어서 발열 현상에 끙끙거리면서 앓았어. 가끔 부티 아가씨께서 보고 가셨고상황을 보고 간 사람들의 진단을 통해 형질이 발현했다는 것을 알고나서 조치가 취해졌지.”

조치? 어떤?”

오메가를 내 방에 밀어 넣었어.”

 

 

그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크게 떠진 두 눈으로부터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까까지 머리를 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의자에 똑바로 앉은 리차드는 어딘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했어? 리차드가 묻는 말에 스티비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쫓아냈어.

 

 

다짜고짜 밀쳐서 문 밖으로 쫓아냈어.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궜어. 안 그랬다가는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았거든.”

어떻게 될 거 같았는데?”

짓눌러서 발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감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어. 신체의 자율권이 내 통제를 벗어난 영역으로 넘겨진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내 의지와 상관 없이 사람을 다른 의미로 해칠 수 있을 거 같았어. 인정하기 싫지만 내 안에 내제된 폭력성을 마주하고 있던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스티비는 말을 마치더니 입을 다물었다. 신중한 시선이 바테이블의 생채기가 난 홈에 머물렀다. 마피아라도 그가 속한 위치가 솔져였던 만큼 스티비는 기본적으로 통제에 익숙했고 질서를 잘 따르는 사람이었다. 규율에 복종하고 따르는 사람이었으니 하물며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상에 두려움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알파는 공격성을 내제하고 있다 들었는데 스티비가 느낀 정체 모를 감정의 근원은 그거였겠구나. 리차드는 스티비의 고통에 막연한 이해를 표했다. 같은 형질이라고 해도 두 사람은 상성이 다르니 다른 과정을 겪었을 거고 온전한 공감대 형성은 힘들 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며칠 그대로 더 앓았지.”

 

 

스티비의 말에 리차드가 보인 표정은 오묘했다. 리차드는 스티비에서 이야기를 전해듣는 동안 저와 처지가 비슷했을 이름 모를 오메가에 대해서 생각했고, 형질로부터 분리한 스티비의 천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알파로 발현한 순간에 본능을 억누르고 저항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건 리차드 본인도 발현하는 순간을 겪어봤기에 알았다.

 

 

써니보이는 뭐라고 했어?”

미안하다고 하셨어. 그게 최선일 거라 생각했대.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셨어.”

그랬구나...”

사실 써니보이에게는 감사함을 표했어야 하는 게 맞지. 사과를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는데. 다 나를 생각해서 했던 일이니까.”

 

 

써니보이를 언급하는 스티비의 얼굴은 부드러웠다. 이렇게 들으면 정말로 써니보이의 존재가 스티비에게 있어 단순히 가드파더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써니보이는 그들의 가드파더이기 전에 정말로 인간적인 사람일지도. 리차드는 입 밖으로 생각을 내진 않았다.

 

 

너도 생각보다 별 거 없었네.”

.”

스티비. 맨 처음에 날 봤을 때 너도 내가 오메가인 건 알았지?”

.”

우리에게 의뢰를 맡기기 전에 여기를 조사하고 왔을 거 아니야. 그 때도 알고 있었어?”

. 그게 중요해?”

 

 

언제나 그렇듯 스티비의 눈은 아이처럼 맑은 눈이었다. 행동은 가끔 무뢰배처럼 거칠었지만 시선에서 드러나는 성정이 깨끗하고 올곧았다.

 

 

아니.”

 

 

리차드는 스티비를 보고 입가를 올려 웃었다.

 

 

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한다면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말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 대체로 형질 관련된 경우는 본능에 따르는 경우도 많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

왜 우리가 그 동안에도 잘 지낼 수 있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된 거 같아.”

 

 

하고 싶은 말은 다 끝났는지 리차드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이 잔은 내가 치울게. 먼저 들어가.” 리차드가 잔을 갖고 주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스티비가 잠깐만.” 말로 붙잡았다.

 

 

리차드.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만약이성이 통제가 안 될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할 거 같아?”

 

 

스티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상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같이 지내기로 했으니 예방이 최우선이고 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각자 알아서 조심은 하겠지만 상황이 자칫하다 틀어질 수도 있으니 서로 어느 정도 마음의 대비를 해두는 편이 좋았다.

 

 

최악을 가정해보자는 거지? 다가오기 전에는 실감이 안 나. 별로 유쾌한 생각도 아니고. 나는 평소에도 불확실한 상황을 잘 그리는 편은 아니야.”

 

 

형질 이야기를 했으면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과거만 이야기하느라 정작 중요한 부분을 깜박했다. 스티비에게 먼저 이 화제를 꺼내게 해서 미안하네. 내가 끝까지 마무리 지었어야 했는데. 리차드는 스티비를 향해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무언가를 생각하는 건지 리차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때는 서로의 판단에 맡기자.”

 

 

고민을 한 것 치고 나오는 대답은 가벼웠다. 어조가 마치 오늘의 식단을 정하는 것처럼 일상적인 말에 가까웠다.

 

 

스티비. 나는 너를 믿어. 네가 그 순간에 무엇을 하든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리차드는 스티비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맑은 얼굴은 스티비가 생각하고 있던 무게에 비해서는 한없이 가벼웠다. 그건 단순히 걱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대를 신뢰하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니 스티비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

아니야.”

 

 

스티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단을 향하는 스티비에게 리차드는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빼 인사를 남겼다.

 

 

잘 자, 스티비. 좋은 꿈 꾸고.”

 

 

 

 

6.

꿈은 최악의 형태였다.

 

상성이 다른 페로몬이 어째서인지 개방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뿌려진 페로몬은 뇌를 마비시키고 호흡 기관으로 스며들어 스티비가 거부하기에는 어려운 향이었다. 처음 발현했을 때처럼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속에 들어와있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뿌리치려면 온 힘을 다해서 벗어나야 했지만 이성이 집어삼켜진 다음인지 머리의 명령은 들어먹히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근원지를 향해 걸어갔다. 향의 자취를 따라가니 파장의 가운데에 먹잇감이, 아니. 익숙한 갈색 머리의 청년이 주저앉은 채로 있었다. 손을 뻗어 허리를 받치고 그대로 안아올리자 붉어진 얼굴과 갈색 눈이 자신을 쳐다봤다. 총으로 겨눌 때도 자신을 보지 않던 눈은 평소의 맑은 기색과 달리 흐리게 번져있었다.

 

이제는 나를 봐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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