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차드 시선 오스카 시선. CP성향보다는 서로에게 갖는 독백.

 적폐 끼얹음.

※ ㅁㅁ페어 기반

 

 

 

더보기

 

 

 

날은 무덥지 않았는데도 여름의 초입새라고 밤공기가 따듯했다. 피부를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도 미적지근하게 덥혀져있다. 나는 이래서 여름이 싫어. 안 그래도 땀이 많은 체질인데. 막이 내린 후 모자를 벗으면 푹 눌려있던 머리는 샤워라도 한 것처럼 젖어있어 거울을 보지 않으면 새둥지처럼 뻗쳐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다한들 후자는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본 적이 없다. 무대 위에 올라서는 순간은 리차드라는 인물이 아닌 부잣집 아가씨로 치렁치렁한 금빛 가발 속에 제 본 모습을 숨기니.

 

리차드는 우뚝 멈춰 서서 가로지르는 철선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늦은 시각의 이 곳은 가로등 불빛을 제외하고는 사위가 어두워 강 위로 불빛이 번진 것 말고는 볼 것이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맺힌 땀을 이마부터 턱 선과 목, 눈두덩과 코 순서로 손을 움직이며 차례로 훔쳐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주목을 사야하는 직업 탓에 눈길을 끄는 건 익숙하니 관심을 부담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뭐야. 내가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가벼이 웃으며 농담이라도 띄워보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고 묵묵한 시선만이 끈질겼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심어진 밤거리에서는 맑은 녹색의 눈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음울했다. 웃음기가 지워진 탓에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 지도. 불편한 기색이 깃든 두 개의 눈이 아래로 기운 채 한 자리에만 머물기에 무심코 시선의 끝을 따라 내려다보던 리차드의 얼굴이 당혹감과 함께 구겨졌다.

 

그 망할 새끼가.’

 

실내에 있을 때는 감춘다고 단추를 끝까지 채웠었는데 더워서 습관처럼 단추를 두어 개 풀었던 게 복병이었다. 리차드는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모른 척 셔츠 깃을 세워 목의 붉은 자국을 가렸다. 스카프는 했어야 했던 건데. 옷을 여미는 손끝이 떨렸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리차드는 눈을 한 번 깜박거리며 미소 짓는 걸로 불안을 감췄다.

 

 

 

오스카. 너도 손수건 쓸래? 한쪽 면만 썼으니까 반대쪽으로 써. 그러면 찝찝하지는 않을

리차드.”

 

 

 

정사각형으로 접힌 손수건을 뒤집어 건네며 운을 띄어보았지만 실패였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상 그렇듯 끝 음절이 말려들어 다정하게 들렸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처럼 습기가 섞여있었다. 먹먹한 눈을 마주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몰려왔다. 모르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안일했던가. 여기라고 자세한 내막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곳은 아닌데. 리차드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은 브루클린 브릿지에 서있었다. 아폴로니아 바에 있는 무대 위가 아닌 철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다리 위.

 

 

 

 

 

 

 

아폴로니아 바 안에서 질 나쁜 손님에게 잡혔던 게 화근이었다. 마감 시간이라며 서서히 뒷정리를 하는데 나가지 않고 의자에 진득하니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아까 무대를 지켜봤던 관객 중 하나였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이니 그만 나가달라고 하는데 갑자기 손이 잡혔다. 술에 취한 중년 남자의 얼굴은 취기로 붉었고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아 흐렸다.

 

 

- 공연은 정말 훌륭했네! 가성과 진성이 특히 대단하더군. 보드빌은 솔직히 이제 저물어간다고 얕봤는데 말이야, 하하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나. 칭찬이니까. 다른 건 아니고 며칠 전 다른 녀석에게 얘기 듣고 찾아왔는데.

 

 

말을 하는 내내 만지작거리는 손은 피부를 느리게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손목뼈에 손가락이 닿았다. 그쪽으로 사고 싶다는 뜻인데.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달라붙더니 지폐 몇 장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어졌다. 말 없이 가만히 있자 수긍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친밀한 사이인 양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손은 아래로 내려오더니 엉덩이와 허벅지를 더듬었다. 쓰레기만 다를 뿐이지 지겹게도 같은 패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긴 마감해야하니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끌고 나가려는데 리차드의 어깨가 느닷없이 잡혔다. 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자루걸레를 들고있던 오스카가 난처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저희 이제 마감해야 해서요.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가지 말라고 말리는 행동에 리차드가 오스카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어,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러자 희미하게 인상이 구겨졌다. 어떻게 하려고? 눈이 재차 저를 쳐다보기에 리차드는 문을 눈짓했다. 나가서 대충 정리하고 오겠다는 뜻이었는데 오스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뭘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저를 붙들듯 잡고 있는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줄었다지만 이렇게 의사소통이 어긋날 줄은 몰랐다. 리차드는 팔을 반 접어올려 어깨에 얹어진 손등 위로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으니 자기에게 맡기라는 표시였다. 이거면 제 의도는 전달되었겠지 싶어 오스카의 손을 거둬내려했는데 도리어 손목이 큰 손에 붙들렸다. 방심한 사이였다. 지지대를 잃은 자루걸레의 대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둔탁한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남자가 손을 놓았다. 리차드가 끌어당겨진 것도 동시였다. 갑작스런 반동에 비척거리던 리차드는 쏠리는 힘의 방향따라 오스카의 품에 안겨졌다. 남자가 허전해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탁한 눈으로 오스카를 빤히 쳐다봤다. 모욕이라 느낀 건지 아까보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상태였다. 주정뱅이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먹을 쓰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대로면 오스카가 말려들 게 자명했다. 리차드가 다급히 남자를 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다음에.

입 모양을 읽었는지 남자가 멈칫했다. 리차드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동어를 반복했다. 다음에.

난동이라도 부릴 것 같은 남자는 금방 잠잠해졌다. 무슨 조치를 취했나 싶어 오스카가 리차드를 내려다봤지만 그 각도에서는 풍성히 덮인 머리와 가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손님은 오스카를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며 흥,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더니 생각을 바꾼 것처럼 리차드를 쳐다봤다.

 

 

- 방해물이 없을 때 다시 찾아오지.

 

 

정확하지 않은 기약을 남기고서 마지막 손님은 퇴장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다 사라졌다. 나중에 올 지 여부는 차치하고 당장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었다. 하아, 그제서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겹쳐지는 소리가 둘인 걸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질까 걱정했던 건 오스카도 같았던 모양이었다. 오스카는 긴장을 놓자마자 축 늘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양 스르르 내려앉아 졸지에 오스카의 품에 폭 안겨있던 리차드는 흐물거리는 몸을 받쳐주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같이 주저앉았다. 리차드의 손목을 잡고 있던 오스카의 손바닥 안쪽이 축축했다. 저와 달리 땀도 없는 편인데.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상대의 비위를 맞춰 해결하려 들었으면서,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전면에 나서서 대응하려 한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위험을 감수하려 했던 것인지. 리차드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한참동안 생각하며 말을 골랐다.

 

 

- 고맙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빠져 나오려는데 허리를 감은 손이 풀리지 않았다. 청소 해야지. 말을 붙이며 손으로 제 허리를 두른 오스카의 팔을 내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스카는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리차드의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힘없이 엉기는 모습을 보니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 리차드내가 무슨 말을 할 거 같아?

 

 

세상사가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런 식으로 들키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해명이라도 하기 전에는 놓을 거 같지 않아 리차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 산책 할래?

 

 

어색한 기류를 견디기 어려워 뭐라도 말을 꺼낸다는 게 역효과를 가져왔다. 아니다, 술을 마시는 게리차드는 말을 정정하려 돌아봤지만 고개를 들어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오스카의 눈을 마주하곤 입을 다물었다.

 

 

- 좋아.

 

 

가라앉은 눈처럼 차분한 어조였다.

오스카는 리차드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내동댕이쳐진 자루걸레를 주워 다시 청소도구함으로 옮기는 걸 보니 청소는 나중으로 미루려는 것 같아 리차드도 몸을 움직였다. 일단은 아무 일도 없었단 것처럼 대충 의자만 정리해놓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나서니 밤은 캄캄했고 거리가 한산했다.

 

 

- 어디로 갈래?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리차드가 분위기를 환기할 겸 물었지만 오스카는 대답이 없었다. 문득 올려다보니 입가가 굳게 다물린 얼굴은 드물게 화가 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까지 자기가 정해줘야 하냐는 시선처럼 느껴져 리차드는 잠자코 발걸음이 닿는 대로 발을 옮겼다. 그 뒤를 오스카가 묵묵히 따라갔다. 리차드가 간혹 한 마디씩 건넸지만 평소처럼 받아주지 않아 말은 의미 없이 허공에 떠다녔고 말수는 차츰 줄어들다 끊겼다. 크고 작은 그림자는 둘을 따라다녔고 거리는 손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지만 침묵이 벽이었다. 정적은 두 부류였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익숙함에서 오는 편한 공기가 아니라 회피하고 싶을 때 겹겹이 쌓이는 시간과도 같았다. 아폴로니아를 포함한 이 일대 건물들이 마피아에게 팔렸다는 통보와 함께 기한 내에 비워줘야 한다는 일방적인 폭언 후에 찾아들던 폐허처럼, 머지않아 오스카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리차드에게 전했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던 공백처럼.

 

 

 

 

 

그렇게 정처 없이 밤거리를 거닐며 도착한 장소가 브루클린 브릿지였다.

 

왜 이 다리로 왔는지 묻는다면 습관이었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나 오후 시간대에 햇볕을 받으며 반짝거리는 강가를 한참 구경하다 들어오는 게 리차드의 일상 중 하나였다. 별 생각 없이 가던 도중 문득 이 길이 아니라고, 장소 선정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때는 목적지를 틀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그대로 걸어온 것뿐이었다. 제 사정을 토로할 생각은 없었지만 뭐가 되었든 실로 부적합한 장소였다. 신을 기리기 위한 신전도 아니었지만 리차드는 신성모독 같다고 생각했다.

 

공연의 연장선이라고 느끼는 건 나 혼자만 그렇게 느낄 것 같은데.’

 

자조가 찾아들었다. 어차피 오스카는 이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도 않을 텐데. 리차드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역할을 오래 하다보면 배역에 깊게 빠져들기 마련인데 배우로서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상황이 비슷해지면 자신을 투영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나. 배역이든 현실이든 그 시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무릇

 

 

 

왜 그랬어.”

 

 

 

라이터를 키자 충분히 기다렸다는 것처럼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들렸다. 긴 침묵이 깨어지고 필터가 타들어가는 끝에선 연기가 제멋대로 피어올랐다. 리차드는 천천히 제 안으로 매캐한 연기를 침전시켰다. 맨 정신으로 말하기는 역시 껄끄러운 화제였다. 깊이 들이마시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 끊었다고 했잖아.”

끊었었어. 최근에 다시 하기 시작한 것뿐이야.” 

말을 해도 담배나 술처럼 말한다?”

별로. 그것들과 다를 바 없으니까.”

리차드. 돈 받고 남자랑 어울리는 걸도박이랑 같은 선에 놓고 있는 건 아니지?”

 

 

 

순화해서 말을 한 것도 오스카다웠지만 여전히 걱정 어린 어조였다. 경멸이 아닌 걸 감사해야 하는지. 리차드는 오스카를 쳐다보지 않고 입술을 문 채 정면만 바라봤다. 단순히 흥미로 내가 즐기고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습관성과 같은 취미? 리차드는 담배를 한 모금 삼켰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온전히 설명하기엔 많은 감정을 배제해야했으므로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려웠다. 모든 원인이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돈이었다. 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가난했던 건 늘 그랬기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삶의 터전인 무대를 잃고 지금껏 같이 지내왔던 사람마저 떠나간다면

 

 

 

무슨 대답을 원해.”

리차드.”

내가 이것까지 너에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리차드는 웃으며 오스카를 쳐다봤다. 웃는 얼굴과 달리 말이 날카로웠다. 신경질적인 어투를 담아 말한 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보여주는 반증이었지만 상대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물고 늘어졌다.

 

 

도박 빚 때문이야?”

그건 아니야.”

 

 

돌아오는 말은 여전히 방향조차 잡지 못해 순간 감정이 새어나왔다. 부인하는 말에 외려 상처받은 얼굴이 돌아왔다.

 

 

그러면?”

 

 

 

속이 갑갑했다. 손가락 사이에 물린 담배 끝에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머리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술이 절실했다. 아니, 차라리 술이 아니라 다행인가. 이대로 술 한 잔에 취해버렸다면 오스카에게 제 계획을 사실대로 실토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리차드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당첨 확률이 적은 쪽에 위험부담을 거는 건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닌데.”

리차드!!”

 

 

 

언성이 높아진 부름은 감정적이라 포효에 가까웠다. 다리 위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순간 둘을 쳐다봤다. 싸움이라도 붙은 줄 알고 구경하려는 눈초리기에 리차드가 아니라고 손을 휘저으며 시선을 분산시키는데 또 다시 한 쪽 팔이 붙들렸다. 그때서 외면하고 있던 상대를 쳐다봤다. 잔뜩 일그러진 채 필사적으로 저를 붙드는 얼굴은 평소 리차드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몸을 소중히 하지 않는 거야?”

난 술주정뱅이한테 그런 말 안 들어.”

나 오늘 한 잔도 안 마셨어.”

그게 자랑이다. 이 참에 끊으면 스텔라도 좋아하겠는데? 여자들은 술 취한 남자 안 좋아하니까. 이거 놔.”

 

 

 

손을 거둬내려 흔들었지만 자신을 붙든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아파, 오스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인상을 구기며 말을 덧붙였지만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이제 와서. 너는 어차피 무대가 사라지면 이 곳을 떠날 거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진심 속에 그가 알아주지 않는 제 마음이 괴로웠다.

 

 

오스카. 놓으라고 했어.”

지금 이 시각에 어디를 가려고?”

 

 

어디로 가냐 말냐 하기 전에 돌아갈 곳이라곤 아폴로니아밖에 없다.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알았지만 딱히 정정해줘야 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아 리차드는 대충 맞받아쳤다.

 

 

네가 신경 쓸 문제 아니야. 오스카. 너라도 이 이상 간섭하는 건 용납 못해. 내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못하는 상황이라면 비난 받아야 마땅하지만아니잖아.”

 

 

마주하던 시선이 어느덧 비껴나가 바닥을 기었다. 무대 이야기를 꺼낸 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사생활 침해라고 선을 그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상대가 어떻게 오해하든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누가 너를 연기로 비난해? 평소 같았다면 오스카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겠지만 이 순간은 하고 싶은 말이 포화 상태였다.

 

 

리차드. 몸에 난 상처들, 다 뭐야?”

연습하다 부딪친 거 말하는 거야? 물류 상자에 찧었어. 자주 있는 일 가지고 새삼스럽게.”

나랑 연습할 때는 넘어진 적도 없었잖아.”

잠깐 멍 때리다가 방심했어.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날도 있지.”

그래. 그렇다고 하자. 발목에 밧줄 자국은?”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던 리차드가 잠시 멈칫했다. 양말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대 위에 설 때를 제외한 시간을 거진 밖에서 보냈으면서, 결혼 준비를 한다는 이유로 외박을 밥 먹듯이 했으면서 언제 옷 갈아입는 걸 보기라도 했냐고 묻고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매듭 묶는 연습을 했어. 실전처럼 철저하게 하다가 한참동안 안 풀려서 그렇게 된 거 뿐이야. 그 때 너도 나가 있어서 풀어달라고 할 상대도 없었고.”

그랬었어? 미안. 진작 말했으면 약이라도 사왔을 텐데. 그러면 등에 생긴 흉터는? 못에 찔린 건 아닌 것 같던데.”

 

 

리차드는 얼버무리던 걸 그만뒀다. 일치하지 않았다면 어림짐작 짚는 거라고 넘겼겠지만 지목한 신체 부위가 같았을 뿐더러 등에 생긴 상처는 불과 3일 전에 생긴 상처였다. 이미 모든 걸 간파하고 있는 사람에게 변명을 해봐야 시간 낭비였다. 취향이 괴팍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만났던 건 아니었는데. 잠자리에 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떤지 성벽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닌지라 운이 없었다고만 생각했다. 그 때가 어찌했든 지난 일이었고-돈은 받았으니 끝난 문제였다- 상의를 벗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을 일이었다. 무대 위의 의상으로 갈아입는다 할지언정 원래 입고 있던 옷 위에 한 겹 더 걸치는 정도였으니 노출 시킬 일도 없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부분이었다. 티셔츠로 갈아입고 잠에 들 때가 아닌 이상 좀처럼은 알 수 없는 일을, 지금은 거의 거처를 비우다시피 하는 동거인이 전부 안다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가 이상했다. 다문 입술을 떼자 하, 숨이 아래로 꺾였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내 몸을 보기라도 했어?”

 

 

이쯤 되면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오스카는 말이 없었다. 침묵의 정당성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야속했다. 대체 왜? 리차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폴로니아에 들린 적이 거의 없었는데 밤에 잠깐씩 들렸다고? 무슨 이유로?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웠지만 어떻게 알았는지는 오스카도 별로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리차드. 왜 그런 거짓말을 나에게 하는 거야?”

 

 

말이 습기를 머문 채 흔들렸다. 금방이고 울 것처럼 먹먹한 눈이 리차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시점마저도 저를 향한 비난이 아닌 게 서글펐다. 리차드는 오랜 시간 함께한 파트너의 두 눈을 한참 바라봤다. 이 순간만큼은 두 눈에 리차드의 형상을 비추고 있었지만 금방 부질없어지는 시점이 온다는 걸 알았다. 당장은 저를 걱정해도 제 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2주를 넘기지 못할 거였다. 아폴로니아는 그 전에 문을 닫을 것이고 오스카는 결혼해서 이 곳을 떠나있을 테니. 시간은 하릴없이 짧았고 고운 모래 입자가 손바닥 사이로 흘러내리는 걸 붙들 용기는 없었다.

 

 

 

공연에 지장은 주지 않게 할 거니까 걱정 마.”

그 문제가 아니잖아.”

오스카. 나 말고 네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우리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니 신경써야 할 것도 많아 보이던데.”

지금 여기서 스텔라 이야기를 왜

사람 좋은 것도 적당히 해. 안 그러면 그 아가씨가 싫어할 거니까.”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오스카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오스카는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한 얼굴로 리차드를 쳐다봤다. 뭉뚱그린 말에는 설명이 필요했다. 리차드는 자기가 말하는 대상을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다정함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때 소중한 거야. 그게 특별하다는 뜻이고 우선순위일 테니까.”

 

 

이제는 서로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할 시간이었다. 정확하게는 리차드 본인이 포기해야 할 시간.

말을 마쳤을 때 제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은 어느덧 풀려있었다. 오스카는 멍덩한 얼굴이었다. 어떤 의미인지 이쯤 말하면 모를 리가 없다. 리차드는 먼저 돌아섰다. 망연하게 서있는 오스카를 내버려두고 거대한 다리를 빠져나왔다. 거리가 멀어져갈수록 복잡한 감정은 급격하게 차올랐다. 행여 자신을 붙잡으면 형편없이 울상인 모습을 보일까 걱정했는데 오스카는 쫓아오지 않았다. 다행인 건지 아닌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혼란스러웠다. 무대에서도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하다 현실을 깨닫고 마지막엔 도망가 버리고 마는 무력한 사람이었다. 장면만 놓고 보면 제가 오스카를 놓고 떠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앞으로 흘러갈 긴 시간을 놓고 보면 반대였다. 오스카의 곁에는 그가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할 것이고 뭐가 되었든 리차드가 홀로 남겨진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브루클린 브릿지라는 장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정해진 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제 아무리 사랑을 했어도 결국엔 신분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헤어진 것처럼. 도박은 지리멸렬하게도 젬병인 리차드가 하고 있는 카드 게임이 언제 대운을 터트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고, 제 성미를 죽이고 상대한 남자들로부터 모은 돈이 건물을 살 수 있을 만큼 빠른 시일 내에 크게 쌓이긴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불안이 자신을 좀먹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수중에 생기는 돈을 보면 뭐라도 하고 있단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사실 명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폴로니아의 무대가 사라질 거란 사실도, 오스카가 결혼을 해서 제 곁을 떠날 거란 사실도.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묻고 또 물었지만 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리에서 자란 청년에게, 가족도 없는 고아에게. 소중한 사람도 장소도 잃을 것이 예정되어 있는 그에게.

 

있을 수 있는 동안은 살아 있다가 모든 것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는 게 어쩌면 답일 수도 있었다.

 

무대 위에서 죽고 싶었으니 가급적이면 마지막 무대에서 희곡처럼 극적인 삶을 맞도록 누군가 난입해서 나에게 총이라도 쏴준다면 좋겠는데.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이란 걸 안다. 그게 아니면 다시 저 다리를 찾게 되려나. 아가씨가 한 선택처럼. 지나치게 감상적인 태도였지만 거리로 내쫓기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 지 여전히 알 지 못했다. 쇠락해가는 보드빌 극장을 찾기도 쉽지 않을 거고 찾는다 한들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카운트다운처럼 종막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멀지 않은 미래였건만 지금으로서는 단 하나도 그려지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불확실한 긍정도 구체적인 공포 앞에서는 손쉽게 삼켜졌다.

 

 

손가락 사이에 물린 담배의 불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가는 연기가 주위를 흐리게 배회했다. 뭐가 되었든 그 날이 다가오면 유보했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불행이란 중력이 저를 단번에 덮칠 날도 머지않았으니.

 

리차드는 어둠에 잠긴 맨하튼 거리를 바라봤다. 동이 트려면 적어도 다여섯 시간은 기다려야 밝아질 것이다. 담배나 피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릴까. 잠에 들기도 글렀으니. 목을 죄는 감촉이 갑갑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헤치자 숨통이 텄다. 건물에 몸을 기대 손에 들린 담배를 입에 물자 단물이 빠졌는지 입에 겉돌았다. 피던 걸 버려 구둣발로 짓밟곤 새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자 필터가 타들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리 없는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

 

 

 

방금 일어났던 장면은 어디에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오스카는 리차드가 있던 자리에서 불빛이 떠다니는 검은 강가를 바라봤다. 기시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곱씹다가 아, 짧게 탄식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브루클린 브릿지의 이야기. 리차드가 신문에서 본 기사를 각색해서 올리고 있는 공연과 유사했다. 그렇게 말한다 한들 같은 부분이라고는 우연히 겹치는 장소와 두 사람 중 한 명이 떠나가는 구성뿐이었다. 닮았다고 생각했다면 자기가 그 공연에 출연하는 배우이기 때문일 거였다.

 

 

 

오스카는 회피하듯 멀어져가는 리차드를 잡을 수 없었다. 왜 도박을 하는지, 남자와 자는지. 상세한 계기라던가 이유를 묻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단지 그저. 리차드의 몸에 상처가 늘어가는 걸 보기 괴로웠던 것뿐이다.

 

리차드. 왜 네 자신을 아끼지 않는 거야.

 

그런 말을 평소에 입에 올렸다면 별 거 아니라고, 네 몸 간수나 잘하라고 핀잔을 들었겠지만 걱정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경각심이라도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 다정함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때 소중한 거야. 그게 특별하다는 뜻이고 우선순위일 테니까.

 

 

 

리차드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리차드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오스카는 쉽게 눈치챘다. 오해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밝힐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걸 속여야할 때가 있었고 오스카에겐 그 시점이 지금이었다. 상처받더라도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제 주위 사람들도, 소중한 사람도, 그리고 본인 자신도.

 

오스카는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냈다. 술이라도 갖고 왔음 좋았을 걸. 아폴로니아에 들려 전용 힙 플라스크를 가져오고 싶었지만 돌아갔을 때 리차드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간다고 그 곳에 그가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오스카는 곱실거리는 머리칼을 헝클이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차피 공연은 내일도 해야 하니 얼굴은 당분간 봐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드는 꺼림칙한 감정만이라도 삭이는 편이 좋았다.

 

 

 

리차드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자신에게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오스카는 정작 리차드의 과보호 속에서 지냈지만 정작 리차드 본인은 자신에 대해서는 건성이었다. 넘어지거나 크게 다쳐도 이게 뭐 별 거냐고, 죽지 않았음 된 거 아니냐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제 몸을 쉽게 여기는 건 그만 뒀으면 좋겠는데.

 

오스카는 묵묵히 담배를 태웠다. 리차드의 몸에 상처가 난 것을 알게 된 경로라면 깊은 밤마다 아폴로니아에 들려 담요를 덮어주다 우연히 봤기 때문이었다. 리차드가 잠들어 무의식을 해매는 그 시각에.

 

리차드는 오스카가 밤마다 아폴로니아에 들렸단 사실을 모를 것이다. 항상 곁에 있었으니 말하는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을 알았다면 리차드가 화색을 띤 얼굴을 하고서 구시렁거렸겠지만 그래봐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좀처럼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아폴로니아가 사라지는 건 예정된 결말이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 두기가 없다면 이별의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서로가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려면 조금씩 감내해야할 일이었다.

 

 

 

 

오스카가 늦은 밤 리차드의 침소에 들렸던 날도 어느 정도 작별을 미리 각오하기 위해 온 날이었다.

 

문을 열자 불 꺼진 방이 보였다. 정적 사이로 드문드문 일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있는 동안 시야가 어둠에 서서히 익숙해졌다. 오스카는 발소리를 죽이고 자고 있는 인영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도중 발에 무언가 걸려 아래를 쳐다보니 덮고 있던 얇은 담요가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침상을 보니 티셔츠는 반 정도가 말리듯 접혀 등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리차드는 더위를 많이 탔다 보니 여름이면 빈번하게 보는 광경이었다.

 

아침에는 찬 물 아니면 마시지도 않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배를 드러내고 자면 체온이 떨어져 배탈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 이외의 것들에 무신경한 건 여전하다며 오스카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담요를 주웠다. 모서리를 하나씩 잡고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펼쳐 어깨부터 덮자 덮이지 않은 발이 꼼지락거렸다. 우으음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기에 깨어날까 조마조마했는데 편히 자세를 다시 다잡고는 고요해졌다. 최근 저를 바라보는 눈엔 착잡한 심경이 곁들어 있었으면서 눈이 감긴 얼굴만큼은 세상 모를 아이처럼 평온했다. 다가오는 현실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 이해는 갔다.

 

결혼을 하고 난다고 리차드를 만나지 않을 건 아니지만그 때면 리차드는 어디에……

 

생각은 좀처럼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가정조차 쉽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다 생각을 떨쳐내듯 결국 고개를 흔들었다. 오스카는 담요를 마저 잘 정돈해주고 나오려다 천이 덮이지 않은 발목을 봤다. 그리고.

 

발목을 가로지르는 선이 새겨져있는 걸 발견했다.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상이 제대로 잡혔는데도 선은 그대로였다. 이게 뭐지? 오스카가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상반신을 낮췄다. 복사뼈를 비롯한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은 어두웠지만 흔적도 명확했다. 밧줄 자국이었다. 그것도 꽤나 오랜 시간 묶여있던 걸로 추정되는. 살갗을 파고들은 자리는 선명하게 패여 있었다. 저항하다 쓸린 흔적마냥 자잘한 상처가 주위에 남아있었는 건 덤이었다.

 

 

.

 

순간 소리를 낼 뻔해 오스카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리차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머리를 굴린 끝에 닿은 생각은 도박 빚이었다. 돈을 내지 못해서 감금이라도 당해있었다던가? 그럴 때까지 도박을 했어?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데? 말을 해도 내가 해결할 수 없을 걸 알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평하게 남의 속도 모르고 잠들어있는 리차드를 깨워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물으려다 일단은 숨을 깊게 쉬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사하잖아. 리차드는 여기에 있는 걸.’

 

 

리차드가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사고가 돌아왔다. 여전히 눈동자와 손이 떨렸다. 오스카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있었지만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소리에 멀쩡히 자고 있는 사람이 깨어날 것만 같았다. 멀어질 각오를 하러 온 거였으면서. 첫 장부터 실패라는 걸 깨달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오스카는 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분명 가벼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리차드에게 물어봐야 하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식으로? 어떻게 화제를 꺼내야 하지? 머리가 복잡해 결국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오스카는 거의 비어있는 거리를 멍하니 걷다 주변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 앉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눈꺼풀이 감겨 눈을 붙였다. 잠깐 졸다 눈을 떴을 땐 맑은 하늘에 해가 떠있었다. 리차드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 들어가려 했는데. 오스카가 헐레벌떡 돌아왔지만 리차드는 옷은 전부 갈아입은 상황이었다. 머리 손질은 하기 전인지 뻗친 뒷머리가 부스스했다.

 

 

누구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뛰어왔어? 차림새가 그게 뭐야. 왜 아침은 거기서 안 먹고? 아직 안 먹은 거 맞지?”

 

 

걱정하는 건지 타박하는 건지 애매하게 섞인 말을 하던 리차드는 벽시계를 바라봤다. 1040분이였다. 그들이 활동하는 시간치고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자고 있을 시간도 아니었다. 오스카는 리차드의 발밑을 쳐다봤다. 양말이 발목을 덮고 있었다. 타이밍이 어긋나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으응, 고개를 끄덕였다.

 

 

숨부터 좀 돌려. 식사나 하자.”

 

 

리차드는 익숙하단 듯이 흐트러진 오스카의 옷의 매무새를 만져주다 어깨를 툭툭 쳤다. 오스카는 리차드의 발치를 힐끗 내려다보았지만 느리게 걷는 동작이라 발이 불편한 건지 아닌지도 긴가민가했다. 리허설을 하고 공연을 할 때도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아프다고 티를 낸다거나 공연을 허투루 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남는 시간에는 스텔라에게 다녀와야 했으므로 오스카는 꺼림칙한 기분만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하루가 지나갔다.

 

 

 

 

 

오스카의 외박이 늘었다. 정확하게는 오스카가 늦은 밤에 조용히 들어오는 날이 늘었다. 리차드가 오스카만 발견하면 들어오지 않았다니 뭐니 한참이고 잔소리를 했으니 오스카가 늦게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본의 아니게 숨기는 꼴이 되었지만 오스카는 준비할 게 생각보다 너무 많다며 헤헤 웃어넘겼다. 리차드에게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있어 말할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리차드의 몸에 난 상처는 줄어들 날이 없었다.

 

상처가 아물면 사라지겠지만 또 다른 상처가 자잘했다. 평소에도 몸을 함부로 다루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연습이나 실수로 다친 상처가 어떤 건지는 오스카도 알았다. 부딪쳐서 생기는 멍이 아니라 고의적인상처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흔적이라고 말하는 게 좋은가. 쇄골이나 어깨, 등 같은 곳에 간혹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만큼 순진한 나이도 아니었다.

 

 

사귀는 사람은 없는 걸로 아는데.’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저에게도 알려줬을 텐데 리차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터치할 부분은 아니었지만 불길했다. 단순한 걱정에서 끝나면 좋을 텐데. 수소문이라도 해봐야 하나 싶었는데 아폴로니아를 들어서는 손님 중에 이상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중년 남성이었는데 공연 전부터 리차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공연을 할 때는 눈에 띄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술을 주문하고 마시는 내내 시선이 고정된 상태였다. 공연은 끝났고 무대의상을 벗고 나오자 지켜보던 남자가 리차드를 불렀다. 웨이터이기도 한 리차드는 다가갔고 귓속말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시간은 체감 1분도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리차드는 남자가 내민 수첩에 무언가를 적더니 돌려줬다. 그리고 끝이었다. 본의 아니게 장면을 목격하고 나니 몸을 순환하고 있는 피가 차게 식는 감각이었다. 만날 장소와 시간 약속. 어떤 상황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가서 말리는 게 맞지 않나. 이건 정말 아니라고.

 

말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상대가 시치미를 떼며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증거도 없으면서. 거기까지! 그 이상은 사생활 침해야.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단호하게 벽을 치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밤이 되면 리차드는 아폴로니아에서 잠을 청했다. 제멋대로이긴 해도 잠드는 장소만큼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이 같았다. 발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었고 습관성일 수도 있었다. 그건 오스카도 같았다. 스텔라와 많은 시간을 같이 있더라도 그는 새벽마다 아폴로니아에 들렸고 잠든 제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를 지켜보다 제 침소로 가서 눈을 잠깐 붙였다. 자는 시간이 적다거나 불편한 자세로 잠들더라도 바깥세상보다는 평온했다. 그에게는 집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리차드나 오스카나 아폴로니아에게 갖는 감정은 별 다르지 않을 거였다. 공통분모는 누구보다 절실히 공감할 수 있었지만 리차드가 하는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차드의 등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결코 작지 않은 상처가 생겼다. 견갑골과 척추 사이, 피부 면적 위로. 날붙이가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흔적이었다. 스쳤다고 하기에는 피가 고여 굳어져있었으니 피부를 긋고 지나갔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보기만 해도 통증이 전해지듯 느껴져 오스카는 인상을 심히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칼부림이라도 있었어? 왜 몸을 너덜내서 오는 거야? 차라리 이쯤 되면 얌전히 관계만 갖고 오는 게 평범했다. 이래놓고 잠이 와? 걱정은 늘 하는 사람의 몫이었고 당사자는 무방비하게 자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리차드는 공연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상처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무언가를 숨기는 데 있어 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태연해서 그가 직접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리차드.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아? 무슨 일을 하고 지냈어?

 

 

그러고 보니 서로의 일상을 묻지 않게 된 지가 좀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떠올렸다가 그 동안에는 같이 지냈으니 불필요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스텔라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 서먹해진 거구나. 오스카는 세상모를 정도로 잠든 리차드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가, 닿기 직전에 거뒀다.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리차드가 잠에서 깨어날 게 분명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비겁하기 짝이 없네. 손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분명 전에도 있었는데무력감이 몰려들자 불현듯 덮어뒀던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덮쳤다.

 

 

 

기억이 나는 건 18살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하던 공연은 다른 공연이었다. 배우는 당시 여러 명이었고 아직 어린 자신들은 그렇게 커다란 비중이 있는 배역은 아니었다. 경력도 적었고 나이도 어렸으니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리차드는 그 중에서 가장 체구가 작아서 여자 배역을 맡았다. 변성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음의 가성을 안정적으로 소화해 음역대도 넓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배역 매치였다.

 

 

 

- 두고 봐. 나중에는 내가 비중이 많은 역할을 맡을 거야.

 

 

 

리차드만 해도 성별이 다른 역할이라고 불만을 갖거나 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그 때는 배역만 따내도 다행이었다. 생계랑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발판부터 힘겹게 올라왔기에 둘 다 그렇게 생각했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꽃을 보내는 관객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여성 팬이 남자 배우들에게, 남성 팬이 여자 배우들에게 보내곤 했다. 보통은 배우의 이름이 적힌 카드와 함께 전달되고는 했는데 그 당시 리차드가 맡았던 여성 배역의 이름 앞으로 온 꽃이 있었다. 배우 이름을 잘 모르는 경우 간혹 배역 이름으로 온다고 듣긴 했는데 특이하게도 보낸 이의 이름마저 익명이었다. 필체만으로는 성별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리차드는 한참 배역 이름이 적힌 카드를 쳐다봤다. 배달된 꽃다발을 보니 안개꽃이 곁든 붉은 장미였다. 처음으로 받은 선물에 리차드는 낯선 것처럼 머뭇하다 꽃의 향기를 들이켰다.

 

 

- 와아. 꽃 예쁘다. 축하해. 리차드.

- . 돈이 되는 거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이며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스카는 꽃에 얼굴을 파묻은 리차드를 보고 역시 넌 대단하다며 같이 기뻐했다.

 

공연은 몇 달 간 같은 곳에서 진행했다. 꽃이 배달되고서 며칠이 흘렀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에서 의상을 벗으려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공연을 같이 했던 동료가 누가 리차드를 찾는다고 리차드를 불렀다. 저요? 리차드는 가발과 의상을 벗기 전이었던 지라 무대에 올랐던 차림 그대로 나갔다. 오스카는 원래 입던 옷을 입고 기다렸지만 리차드는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뭘 하느라 이렇게 늦어지지? 누구를 만난 거지? 주위를 찾아봐야하나 하고 나가려는데 리차드가 돌아왔다. 옆에는 어떤 남자를 동행하고 있었다. 리차드에게 목적이 있던 사람인 건 알았지만 기억에 없는 사람이라 오스카가 갸웃했다. 리차드는 짧게 목례를 하더니 황급히 오스카에게 뛰어왔다. 평소와 달리 얼굴은 미묘하게 굳어져있었다.

 

 

- 왜 이렇게 늦었어?

- 미안. 빨리 갈아입고 나올게.

 

 

리차드는 어딘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분장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에는 눈가가 붉었다. 울고 나온 흔적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었어? 오스카가 묻자 리차드가 고개를 저었다. 리차드, 아까 그 사람 누구였어? 그러자 리차드는 꽃을 줬던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팬이랑 뭘 하고 왔냐고 묻자 리차드는 심란해보였다.

 

 

- 공연에 대한 이야기.

 

 

뭔가 말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침묵이 이어졌다. 어딘지 시무룩한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좋았던 만남은 아니었던 것 같아 오스카는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리차드는 그 날 이후로 공연이 끝나고 나면 한 번씩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뭐하러 가냐고 물으면 잠깐 구경하러 나간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다 언제였는지, 리차드가 목에 붉은 자국을 여럿 달고 왔을 때가 있었다. 평소 드는 멍과 다르게 푸르거나 검지 않았을 뿐더러 위치가 독특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오스카가 뭐냐고 물었을 때 리차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런 것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 , 벌레에 물렸나봐! 이렇게 많이 물린 줄은 몰랐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억양이 제멋대로였다. 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반응하는지는 몰랐다.

 

 

- 리차드, 씻지 않고 잔 거 아니야? 나는 하나도 안 물렸는데.

- 그건 아닌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하면서 확인 좀 해봐야겠네. 잘 환기 시켜야겠다. 그 때만 해도 별 생각 없이 수긍했다.


나중에 알았다. 여장을 한 어린 소년들이 다른 의미로 수요가 있다는 것을. 리차드의 얼굴은 선이 고운 느낌도 여자로 착각할 만한 얼굴도 아니었던지라 오스카는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차드에게 접근한 사람들은 공연을 본 관객들 중 하나였다. 무대 위에서는 연기와 대사, 노래로 설득을 당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게 아닐까 싶지만. 뭐가 되었든 오스카는 영영 이해못할 세계였다.

 

 

 

 

리차드가 제 손을 끌고 구두를 보러 가자며 브랜드가 나가는 구두점에 저를 데려갔던 적이 있었다. 공연하고 받아야하는 돈은 정산 받기 전이었고 돈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생활비를 제외하면 쓰기 벅찼다. 고정수입이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보니 더 그랬다. 아직 돈은 받지 않았고 사지도 못하는데 왜 가냐고 하자 우선은 신어보는 게 경험이 될 거라며 막무가내로 오스카를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급스러운 신발들이 진열되어 있는 공간은 멋스러웠다. 오스카는 우와, 감탄하며 구경하다 숫자를 보고 굳었다. 아무래도 자기같은 사람들이 들어올만한 곳은 아니었다. 천천히 둘러보는 리차드만이 태평했다. 오스카가 그만 나가자고 손을 끌었지만 리차드의 시선은 다른 데에 있었다.

 


- 오스카. 저거 신어볼래?

 

 

리차드는 제가 점찍은 구두를 손으로 가리키더니 점원을 불렀다. 사이즈를 말하자 새 구두를 꺼내줬다.

 

 

- 걱정 말고. 신어봐.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스카는 리차드의 말을 따랐다. 신발은 평소 신던 것과 착화감이 달라 편하고 부드러웠다. 어때? 발은 편해? 마음에 들어? 리차드는 오스카의 주위를 빙빙 돌며 다각도에서 한참을 심각한 얼굴로 쳐다봤다. 앉았다 일어서고 가볍게 제자리를 뛰거나 걸음을 걸어보는 등 몇 가지 검증이 끝나고 호평이 돌아오자 리차드는 이내 만족한 것처럼 얼굴을 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멋있네. 입가에 힘이 들어간 얼굴을 보니 자기가 더 뿌듯해보였다.

 

 

- 이걸로 주세요.

 

 

오스카가 얼떨떨한 얼굴로 봤지만 그 때는 이미 리차드가 계산을 치루고 있었다. 구두점을 나오자마자 리차드가 신발이 담긴 상자를 저에게 건네줬다. 돈이 어디서 난 건지, 정말로 받아도 되냐고 물으려 했는데 선수를 뺏겼다.

 

 

- 조금 있으면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 미리 주는 거야. 옷은 키가 또 클까봐 못 사주겠고. 발은 더 크지 않을 거 아냐.

 

 

리차드는 고심한 끝에 결정한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오스카는 선물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리차드가 자신을 위해 사준 선물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렸다.

 

 

- 고마워. 리차드.

 

 

감격했던 나머지 눈물을 훔치고 있자 리차드가 오스카의 등을 가벼이 두드렸다. 뭐가 그렇게 울 일이야. 소중하게 신어. 알았지?

 

 

 

그로부터 2주 정도 후였는지, 리차드가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평소보다 들어오는 시간이 늦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으니 걱정이 되어 찾으러 갈까 싶었는데 어디를 갔는지 모르니 그럴 수도 없어 문 앞에 앉아있었다. 무턱대고 주위를 찾아보는 게 나은가 생각하는데 멀리서 모르는 여성이 제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의아함을 표하며 여자를 향해 다가가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리차드는 공연도 아닌데 여성용 가발을 쓴 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안색이 눈에 띄게 좋지 않았고 걸음은 다리를 저는 것처럼 비척거렸다. 오스카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달려가자 리차드가 오스카를 쳐다봤다. 아주 잠깐 시선이 맞닿다 눈이 감겼다. 리차드의 몸이 순식간에 기울어 오스카가 다급히 쓰러지는 리차드를 받았다. 리차드? 리차드? 이름을 불렀지만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공연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몸은 미약하게 미열을 띠고 있었다.

 

부축하듯 데려와 건물 안으로 들이고 몸을 눕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해 오스카는 찬 물에 담긴 물수건을 가져오고 비상약과 물을 가져왔다. 어디를 다친 건지 몰라 일단은 옷을 벗기려보는데 무대 의상도 아니고 원피스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치마를 거둬 올렸는데 맨 다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허벅지부터 타고 흐르는 피가…….

 

리차드는 꼬박 하루를 앓았고 그 다음 날 공연이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눈을 떴다. 파란 눈이 깜박거리더니 오스카를 확인했고 지금 몇 시냐고 물었다. 시간을 말하니 왜 날 안 깨웠냐고 일할 시간이지 않냐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팔로 침대를 짚고 다리를 움직이려는데 몸이 풀썩 쓰러졌다. 힘이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차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가 어지럽다면서, 자기 좀 부축해달라며 손을 뻗었지만 오스카가 고개를 저었다.

 

 

- 오늘 공연은 취소되었어.

 

 

리차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오스카를 쳐다봤다. 전화를 해뒀다고, 네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전하니 적잖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대신할 배우가 없었으니 아무리 비중이 적더라도 엑스트라가 아닌 한 한 명이 빠지면 공연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참여하는 배우들이었다.

 

 

- 누구 멋대로? 나 많이 안 다쳤어.

 

 

리차드는 드물게 화를 냈다. 밤새 옆에서 간병한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알고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무턱대고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 걸 오스카가 허리를 끌어안아 붙잡았다.

 

 

- 나 갈 거야. 비켜줘.

- 리차드. 제발 그만그만해.

 

 

안정을 취해달라는 뜻인지 어제처럼 어리석은 하지 말라는 뜻인지 부탁이 간절했다. 비켜, 오스카.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나가려고 강행하려는 걸 끝까지 막아서며 필사적으로 붙들어매자 바르작거리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리차드는 허탈한 얼굴로 벽시계를 바라봤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까지 시간은 아직 남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다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 공연이나 때문에 취소될 수도 있는 거였네.

 

 

자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힘이 스르르 빠졌다.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걸 확인한 오스카가 그때서 고개를 들었다.

 

 

- 내가 멍청했어.

 

 

리차드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다고 리차드는 고백했다. 돈을 주면서 여장한 모습으로 30분만 같이 있어달라고. 기분은 불쾌했지만 어렵지는 않은 사항이었으니 그렇고 있었다고. 처음에는 가벼웠던 요구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액수가 올라가니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고. 아슬아슬한 선까지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관계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고, 공연에 대한 피해가 올 거 같으니 그만하자고 얘기를 하려 했었다며 입을 다물었다. 어제의 처참한 현상을 떠올려본다면 그 다음이 어땠는지는 말을 안 해도 어림짐작이 갔다.

 


- 괜찮아?

 

 

오스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묻자 리차드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는 것도 충분히 괴로운 것 같았지만 리차드가 가장 힘들어했던 건 공연 취소였다. 눈썹이며 눈이 축 처졌다. 리차드는 이불이 덮인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으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절대로.

 

 

 

 

상념에서 헤어 나올 즈음 창밖의 하늘은 옅은 색이었다. 회상을 마치고 나니 앳된 얼굴이 지금의 얼굴로 바뀌었다. 시간이 흘러도 리차드는 리차드였고 오스카는 항상 곁에 있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오랜 시간을 같이 형제처럼 자랐으니 사실상 가족과도 같은 친구였다.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거였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다짐하기 위해 들렸던 시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변질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틀어졌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밧줄 자국을 몰랐더라면, 몸에 상처가 나고 있단 걸 몰랐더라면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을까? 가정을 세워보지만 결국은 자기 위로일 뿐이었다. 이미 이 시간 자체가 자기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으니.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거라고 했으면서.’

 

 

왜 그런 거냐고 생각해보지만 리차드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도박 빚도 아니면 시작할 만한 이유는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당사자가 입을 다물면 의도는 알 수가 없었다. 거짓말쟁이. 오스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가 이건 아닌가 싶어서 지웠다. 리차드가 그 날 이후로 공연을 못한 적이 있던가? 지장을 받았던 적은떠올려보면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덜렁거리면서 이럴 때는 철저했네. 직업 정신인가. 그만큼 공연을 중요하게 여긴 거겠지. 씁쓸함이 몰려왔다.

 

 

나는 이 시간들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오스카는 제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배우 생활을 그만 두면 보드빌리안을 내려놓고서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지를.

저와 같이 오랜 시간을 지내왔던 리차드를 떠나보낼 수 있는 지를.

 

답은 늘 아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보드빌 극장도 감소하고 있으니 배우 생활을 계속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도태에 가까웠다. 뜻밖의 찾아온 기회는 편하고 아늑한 삶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비록 결혼이라는 도피처는 오스카가 원하는 삶의 방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스카는 자신이 아끼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두고 가기로 결심했다. 퇴색시키지 않고 보존하려면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아끼고 품었던 것들이 어떻게 사라져갈지는 외면하더라도. 있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을 보고 그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면 어떨까.

 

그래서 전환점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관성이라 불려도 미련이라 불려도 좋았다. 바로 놓았다간 제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가 지워질 것 같았으므로.

 

 

 

 

거리를 두지 못하는 사람은 나인 것 같아.’

 

 

오스카는 담배를 한 대 더 태웠다. 제 우선순위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였다. 무대가 소중하다는 사실도, 앞뒤 가리지 않고 감정적인 대응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 것도.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니 별 수 없었다. 위협을 받는 사람이 리차드면 오스카는 언제든 감싸고 볼 거였다. 리차드가 저를 먼저 감싸는 것처럼.

 

 

리차드. 도박하지 마. 남자랑 자지 마. 네 자신을 함부로 여기지 마. 제발.

왜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전처럼 붙들고 끌어안아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력을 다해서 막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못 다한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다시 삼킨다.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런 말을 해서 안 되겠지. 리차드가 저에게 한 조언이자 충고를 떠올린다. 말을 내뱉은 이상 앞으로 리차드가 머물고 있는 방에 들리지도 못하겠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했어야하는 말이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전할 수 없겠지만.

 

 

담배를 피우고 나니 술 생각이 절실했다. 오스카는 떠나기 전 다리 너머의 풍경을 잠시 쳐다봤다. 사랑이 엇갈렸을 때 남겨진 여자가 바라봤을 저 강을. 몸을 던지면 모든 걸 잊고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나. 씁쓸한 맛이 입에 남았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확실한 건 사랑한다면 멀어지는 건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거였다. 멀어져야 하는 것들에 대한 각오를 해야 했지만 방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작별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연습도 이렇게 힘든 걸 보면.

 

오스카는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아폴로니아로 돌아가서 술을 마셔야겠다. 술 맛은 담배를 피운 직후라 떨어지겠지만.

 

 

금주령이라.”

 

 

오스카는 쓰게 웃었다. 이러니 술이 끊이질 않는 거겠지. 취하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어려운 세상이었다.

 

 

 

 

 

항상 리차드(+무대)를 보고 있는 오스카와, 오스카와 무대를 생각하는 리차드 같은 느낌으로... 상대방을 투영하는 게 그들의 삶이고(그래서 무대와 파트너를 떨어뜨려놓을 수 없는) 그 상대가 자신의 삶의 일부인 것처럼 써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자기 자신에게는 둘 다 무신경한 편일 거 같음.. 상대 우선이라고 해야하나...

 

200823 노선이 현실도피로 결혼이란 선택지로 회피하려했지만 시선과 마음만큼은 리차드에게 있던 스카였다고 느꼈어서. 밍밍 노선 중에서는 이날이 스카가 성숙해서 어른스러웠다보니 가장 이질적인 노선이었다. 평소에는 람zr에서 깨닫는 느낌인데, 0823은 오스카 본인이 이미 알고 있었어서... 맞관 삽질이긴 했는데 이날은 오스카가 리차드 마음도 알고 있지만 본인도 놓지 못하고 처신하는데 유독 비겁해보였다. 밍밍 자체도 차드가 형 느낌인데 '내가 도박을 왜 했는데..' 이건진짜해명해줘라...

 

... 라고 전기를 써뒀는데 정작 쓴 건 0823+기존 밍밍 노선 섞여서 어중간해짐... 적폐가 문제였나...

 

 

'미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팁리차] 시선이 돌아오는 순간  (0) 2022.11.27
[스팁리차] 탈피  (0) 2022.11.02
[스카리차] 약점  (0) 2022.08.27
[리차스카] 감정의 밀도  (0) 202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