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 12:42

오메가버스AU, 팁차, ㅈ팁 ㅁ차

스티비가 리차드에게 처음부터 느낀 호감에 대해서 차근차근 생각해보는 이야기. (알오물 세계관이 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페로몬 영향X-)

예비 알파인 스티비가 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보편적인 알오물 세계관과 발현되기 전의 설정이 달라 글에 서술해둡니다. 성장물 기획이라 소재에 비해서는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 직접적인 수위 부분은 유료 발행으로 걸어둡니다.(반강제적 상황O, 합의O)(링크)

※ 초중반 스카리차 장면O

 

 

 

생각해보면 스티비는 아폴로니아를 처음 찾았던 불청객일 때부터 리차드를 잘 따랐다. 리차드와 오스카에게는 스테파노 로시니라는 인물이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당시에도 그 때문에 오스카와 리차드 사이를 불쑥 끼어들어 리차드의 기분을 오묘하게 만들었던 거야 지나간 일이니 둘째 치고, 스티비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따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리차드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스티비.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나만 기억 못하는 뭔가 있었던 거야? 내가 술 먹고 뭔가 했을 때인가? 리차드는 스티비와 자기가 만난 날이 아폴로니아가 문을 닫기로 예정되어있던 날보다 훨씬 전일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였지만 정작 제 기억에는 없어 불확실한 의문형만이 남았다. 스티비는 리차드의 질문에 이걸 만났다고 해야 하나? 중얼거리면서 말을 받았다.

 

 

리차드가 써니보이 구역의 도박장에서 돈을 잃을 때, 근처에 있긴 했어.”

 

 

카드 게임으로 처음 몇 판 말고는 이긴 적이 없었으니 꼴사나운 제 모습이 첫인상이었단 뜻이었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게 나았을지도. 리차드가 마음에 타격을 입은 것과 별개로 스티비의 화법만 놓고 봐서는 리차드를 직접적으로 봤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 그러면 나랑 뭔가 트러블이 있었어? 내 기억에는 전혀 없어서 묻는 거야.” 확인 차 묻는 말에 스티비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리차드랑 얽히지도 않았어. 지나고 나니 조금 아쉽긴 해.” 그러더니 푸스스 웃었다. 뭐가 아쉬운 건지 물어보려다가 스티비가 말한 것만으로는 제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리차드는 재차 물었다.

 

 

내 말은 왜 잘 따르는 거야?”

 

 

스티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리차드 말을 잘 들으면 좋은 거 아니야? 순진무구하다 못해 천진한 얼굴이며 리차드를 보는 눈이 맑았다.

 

 

문제가 없으면 좋은 거 아니야? 마피아 세계처럼 전쟁이라도 일으켜야 해? 다른 극장 선제공격이라도 할까?”

 

 

오른 손이 숄더 홀스터에 잠들어있는 권총을 향해 움직였다. 아폴로니아에 정착하고 난 이후로는 꽤나 오랜 시간 총을 꺼낼 일이 없어서였는지 총을 빼내는 움직임이 꽤나 버벅거렸다. 본인 스스로도 전처럼 행동이 매끄럽지 않은 게 이상했는지 총이 잘 안 빠져기름칠을 해야 하나?” 태평한 소리를 하면서 스티비는 홀스터의 가죽을 매만지더니 권총을 체크했다. 본인의 움직임이 둔해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예전엔 느닷없이 급발진을 하긴 했어도 총을 꺼내 협박하는 것만큼은 재빨라서 그 부분은 마피아 같긴 했었지. 리차드는 과거를 문득 생각해보다가 이게 과연 스티비에게 좋은 현상인가? 자기 방어는 할 줄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논리정연한 말싸움으로는 스티비가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없을 텐데. 얘는 총이라도 있어야 사기를 당하지 않을 거 같은데동양 무술인지 뭔지는 불한당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긴 한 거 맞아?’ 걱정스러웠는지 스티비를 애매한 얼굴로 쳐다봤다. 마피아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있었지만 리차드가 보기에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애로만 보여 여전히 미덥지 못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너 오스카보다 내 말을 더 잘 따르잖아. 오스카랑 나는 동등한 입장이야. 그리고 지금은 우리 셋 다 동등하고.”

.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잖아?”

기억하고 있었어?”

뭐야. 지금 날 바보 취급 하는 거야?”

 

 

딱 이런 식의 대응이 그랬다. 툭하면 울상인 얼굴을 하고 삐지면서 토라지는 모습이 물 밖에 내놓기엔 위험해보인단 말이지개인적인 걱정은 우선 미뤄두고 리차드는 화제를 이어갔다.

 

 

스티비. 왜 이 말을 꺼내나 싶겠지만넌 처음 봤을 때부터 내 말에는 쉽게 좌지우지 하는 거 같아보였거든. 우리가 아폴로니아에서 의뢰로 처음 만났을 때에는 서로가 낯선 사람이었을 텐데, 네 행동은 마치 전부터 날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나를 대했다고 해야 할까그래서 물어본 거야. 우리가 전에 알던 사이였나 싶어서. 만약 그런 거면 네가 서운해 할 것도 같아서.”

 

 

리차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풀어서 말하긴 했지만 당최 어떻게 설명하는 게 스티비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게끔 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스티비는 입에서 나온 답은 간결했다.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뭐야? 정말 생각도 못해본 대답에 리차드는 맥이 빠져 비틀거렸다. 황당한 얼굴을 한 리차드에게 스티비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써니보이가 자신의 직감을 믿으라고 했으니까!

 

 

 

*

 

 

 

리차드에게 질문을 받고 난 이후로 스티비는 명제를 곱씹었다. 리차드를 잘 따르게 된 계기. 생각을 해보니 아폴로니아에 왔을 때부터 리차드에게 친밀감을 느꼈고 그래서 리차드 주위에서 자주 알랑거린 거 같긴 하다. 그렇다고 리차드가 자기에게 잘 대해줬는가? 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NO’ 였다. 자기가 아폴로니아를 방문한 시점만 놓고 봤을 때 스티비에게 잘 대해준 사람은 성격이 무른 오스카 쪽이었고, 리차드는 경계하며 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모른 척 바짝 다가가는 건 스티비의 특기였고 침입자답게 리차드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깨부숴가며 거리감을 단숨에 좁혀 들이댔다.

 

리차드가 스티비에게 총구를 겨눴던 당시, 실탄이 들어있을지 아닐지를 재려다 무작정 제 이마에 총구를 가져댔던 행동은 무슨 배짱이었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리차드가 나를 해칠 리가 없어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직관이 틀렸다면 죽음뿐이겠지에 가까웠다. 전자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었다. 처음부터 리차드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순전히 스티비가 품은 일방적인 마음이었고, 스티비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 감정을 제 직감의 일종이라 믿었다. 상대가 자기와 다른 감정이라면 다른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이번 기회를 통해 몸소 겪었지만. 실탄이 들어있긴 했어도 리차드는 스티비를 쏘지 못했고 스티비는 현재 그들과 함께 이 아폴로니아 바에 남아있었다. 과정이 풀어지기까지는 복잡했지만 결말만 놓고 본다면 스티비의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 타인을 의심할 줄도 알아야해. 스티비.

 

 

제 가드파더가 했던 말이었다. 너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때 묻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과녁에 총을 맞추는 연습과 글자를 익히며 책을 읽는 건 계속 시켰다. 타인을 협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거에요? 어렸을 때 순수한 질문을 하자 돌아온 답은 신선했다.

 

 

- 네 몸은 지킬 줄 알아야 주위 사람들이 너를 위해 희생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다.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면 네가 강해져야 한단다.

 

 

그 말에 한 팔을 들고 저도 써니보이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라고 했던가? 그 말에 써니보이는 고개를 저었다.

 

 

- 나처럼 되는 건 재미없는 삶일 거란다. 스티비. 네 직감을 믿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될 만큼 강해지렴.

 

 

그 당시 스티비가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말이었지만 스티비는 이렇게 이해했다.

 

 

직감이라는 건 중요한 거구나. 그러면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겨야지!’

 

 

중간에 곡해되긴 했지만 어린 날 각인된 생각이 스티비의 인생철학이 되었고 그렇게 지금 여기까지 흘러왔다. 책을 계속해서 읽었던 거나 써니보이의 일대기를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친숙한 버전으로 각색해서 써낸 것도 그렇고, 목숨을 걸고 싸움의 세계를 전진해야하는 마피아보단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일이 더 흥미롭다고 느꼈던 것도 이 때문일 지도 몰랐다.

연기가 재밌다고 느끼는 것과 잘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라서 지금은 골머리를 앓고 있긴 했지만.

 

 

 

 

스티비가 썼던 미아 파밀리아, 마피아 일대기를 다룬 극과 달리 대다수의 일반적인 연극은 조곤조곤하고 기품이 있었다. 우당탕탕 진행되는 흐름이 아니니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섬세한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스티비의 연기 교정이 필요하다면서 리차드와 오스카는 둘이서 한참 논의했다. 자세는 같이 연습할 때 둘이서 지도하면 그만이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대사를 어떤 울림으로 입에 올려야 하는가?’ 같이 본인의 생각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건 외부적인 요소로 해결할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리차드가 스티비에게 준 과제는 연극 대본 읽기였다. 셰익스피어 책들을 선물이라고 주기에 스티비가 고개를 들고 , 무시하지 마! 나 예전에 읽었어! 나도 작가야!” 반박하다 기습으로 이마에 딱콩을 맞았다.

 

 

어허! 그냥 읽으라고 주는 거 아니야. 넌 이제 배우잖아. 이 대사들을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말할 건지 생각하면서 읽어보라는 거야. 입으로 소리를 내서 대사를 읽어봐.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 때만 해도 정통으로 맞은 이마가 아파 스티비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손바닥으로 이마를 벅벅 문지르면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게 도움이 돼? 정말로?’ 마음속으로 항의했지만 더 말해봤자 리차드에게 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으므로 스티비는 리차드가 주는 책을 얌전히 받았다. 책을 방 한 구석에 방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겠지만 스티비는 리차드의 말을 무시할 만한 성품이 되지 못했고 딱히 큰 할 일도 없었기에 영업 시작 전에 시간이 빌 때면 책을 펼쳤다.

 

리차드의 말은 정론이었다. 스티비는 제 방에서 천천히 책을 펼치고 대사 톤을 다르게 읽어보다가 이게 맞나?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됐다. 이 대사는 어떤 심리에 기반한 것이며, 그 때 나는 무슨 감정으로 대사를 말할 것인지? 이 상황은 어떤 흐름이며 이 때 등장인물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서 흥미위주로 책을 읽어나갔을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었고 접근법이 달라서인지 보이는 장면도 달랐다. 인물의 심경을 생각하면서 입으로 문장을 읊어보자 대사의 호흡과 톤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리차드와 오스카를 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부러워했던 안정적인 대사의 울림과 조금은 비슷한 것처럼 들렸다. 눈에 보이는 효과를 직접 체감하고 나니 점점 흥미가 붙어 스티비는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대사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문득 맨 처음에 미아 파밀리아 극을 올렸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내가 어떤 톤으로 말했더라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웃겼을 것 같단 생각만 들었다.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지. 리차드와 오스카가 낮게 탄식하던 모습이 기억을 스쳐지나갔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는데 머릿속에 목소리가 개입했다. 난 처음부터 잘하기를 원해. 예전에 리차드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나도 가르쳐주면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 두고 봐! 스티비는 환청에 반박하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대본에 몰입했다.

 

책을 읽었던 당시에는 아는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말로 내뱉으려 하니 묘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장면에서는 어떤 감정으로 말을 하는 게 더 낫지? 스티비는 본인 스스로 답이 나오지 않는 부분은 체크를 해뒀다가 리차드를 찾아갔다. 오스카를 만나면 오스카에게 묻기도 했지만 과제를 건네준 사람이 리차드여서 그런지 스티비는 습관처럼 리차드의 방을 종종 찾았고 방문을 똑똑 두드리면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연기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다고 하면 리차드는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방에 있을 때 주로 리차드는 신문이나 책 등 읽을거리를 손에 쥐고 있었고 가끔은 책상에서 대본으로 추측되는 글을 적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일 때조차 천상 리차드는 배우이자 작가의 표본이라 스티비는 감탄했다. ‘역시 연기랑 연출은 그냥 익혀지는 게 아니구나!’

 

 

그래서 지금은 뭐 읽고 있어? 햄릿?”

 

 

리차드는 스티비가 들고 온 책 표지를 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면서 책상 앞에 있던 나무 의자를 침대 근처로 끌어왔다. 스티비가 침대에 걸터앉으면 리차드는 의자를 바짝 붙였다. 스티비, 어떤 게 궁금해? 오늘은 어느 부분을 읽었어? 넌 어떻게 생각했는데? 리차드는 어느 시간대에 찾아오든 잠을 자다 억지로 깨어났을 때가 아니고서는 대체로 불편한 기색 없이 스티비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줬다. 답으로 결론이 도출되는 게 아니다보니 가끔은 그게 어딘지 모호하게 느껴졌다. 한번은 아리쏭하게만 느껴져 왜 정답을 알려주지 않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이게 맞다고 정해버리면 생각이 하나의 틀에 갇히기 때문에 공식처럼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거였다.

 

 

배우는 항상 생각하는 직업이라는 걸 명심해. 스티비.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해. 지금처럼 이렇게 고민해보는 게 중요한 거야. 너만의 연기를 하고 싶다 했지? 나랑 오스카가 하는 걸 보더라도 어디까지나 참고만 해. 목표로 삼지는 마. 계속 생각하면서 말하고 움직이다보면 연기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야.”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알 것만 같기도 해서 스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중요하다중얼거리자 리차드가 작게 웃었다.

 

 

열심히 하네. 스티비. 잘해봐.”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싶더니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따듯한 눈빛이며 손길이 온화했다. 써니보이도 내가 업무를 잘 해내면 머리를 이렇게 쓰다듬어줬는데. 스티비는 마음이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리차드에게 격려 받았어! 더 열심히 해야지! 오가는 건 말과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었지만 스티비에게 있어선 충분히 기쁜 보상이었다.

 

무대가 끝나고 오스카가 스티비, 연기 많이 늘었는데?” 순수하게 감탄하면 정말?” 화색하며 기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은 건 리차드에게서 긍정의 반응을 들을 때였다.

 

 

잘했어. 스티비!”

 

 

제 일처럼 기뻐하는 얼굴엔 거짓이 없었다. 제 어깨를 감싸 안다 등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칭찬을 해줄 때는 특히 기쁨이 차올랐다.

 

그 때만 해도 큰 생각을 하지 않았다가 연기 분석을 하면서 인물 분석을 하게 되었을 시점이었는지. 대본 속의 등장인물이 각각의 인물에게 갖는 감정이 다른 것처럼 스티비는 문득 제 심리 또한 제 주위 인물들에게 갖는 감정이 동일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오스카보다 내 말을 더 잘 따르잖아.

 

 

. 그때서 전에 리차드가 자기에게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러게. 왜 리차드에게 처음부터 친밀감을 느꼈지?’

 

 

스티비는 문득 이 불균등한 감정에 대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리차드가 오스카보다 더 다가가기 쉬운 인상이라서는 아니었다. 리차드는 좀처럼 웃지 않으면 심통 맞아 보이는데 틱틱거리기까지 해 첫 만남도 결코 좋지는 않았다. 나는 리차드를 써니보이 대신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생각해봤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써니보이가 업무를 수행할 때는 위압감 때문에 자기가 감히 입을 열지 못할 때도 많았다. 리차드도 엄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꾸짖는 모양새는 흡사 어머니를 닮았다. 스티비에게 있어 부모에 대한 기억은 사실상 공백이지만. 그러면 나는 리차드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나? 그러면 오스카는 아버지? 아니지, 내 아버지는 사실상 써니보이를 더 닮은 거 같은데. , 써니보이는 아버지. 리차드는 어머니? 이건가? 대본을 분석할 때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데 의식의 흐름은 이상한 방향으로 귀결이 났다.

 

리차드를 봤을 때 좋은 감정이 왜 먼저였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스티비는 대충 그렇게 제 안에서 결론을 지었다. 리차드가 안다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큰 애가 있냐고 웃으면서 한숨을 쉬겠지만.

 

 

그 날 밤이 오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

 

 

 

아폴로니아의 영업시간이 끝난 밤이었다. 공연 전에 리차드의 방에 들렸었지만 드물게도 부재중이었던 터라 스티비는 제가 읽었던 책을 가지고 리차드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릴 생각이었는데 문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주기는 다음 주인데 왜 지금오스카의 목소리였다. 오스카가 지금 리차드랑 같이 있나? 스티비는 그 문을 두드려야할지, 아님 용건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지 생각을 하는데

 

 

- 심각해보이는데

- 하핫아주 꼴사납지.

 

 

대화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 중인 거지? 맥락이 잘려서 감도 잡히질 않았다. 둘 사이를 끼어들 수 없는 화제에 스티비는 간만에 자기가 이방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약이 안 먹히는 건 처음이야

- 스티비 때문은 아니고?

 

 

? 리차드, 어디 아픈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제 이름이 튀어나왔다. ? 스티비는 입 밖으로 소리가 내뱉어지려는 걸 제 입을 틀어막고 기다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참인데 안에서 한숨과 함께 리차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는 형질에 속한 사람도 아니면서 잘도 아네.

- 네가 하는 걸 보면 알지. 스티비랑 있을 때 요즘 안색이 안 좋았잖아.

- 티 났어? 숨겨진 줄 알았는데.

- 크게는 아니라 스티비는 모를 거야.

 

 

순간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귓가를 장악한 심장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몸이 그대로 굳었다. 오스카의 말대로 지금까지 스티비는 리차드와 있으면서 불편한 기색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기를 간파하지 못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제 앞에서까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리차드. 내가 싫어? 내가 뭘 잘못했어? 마음 같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지만 발이 그 자리에 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 나도 더 정진해야겠네스티비가 알면 상처받을 거야.

 

 

덧붙여진 말에 수습이 되지 않던 생각이 멎었다. 내가 싫어서가 아니야? 스티비의 혼란이 거듭되는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 리차드이렇게 숨길 게 아니라 스티비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아? 자기가 알파인지 모르는 거 같은데. 갑자기 반응한 걸 보면 여기 오고서 발현한 게 맞지 않아?

- 아직은 아니야페로몬이 제대로 형성된 것도 아닌데시기가 너무 일러.

- 미리 알려줘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러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 마음 같으면 그러고야 싶지자위도 모를 것 같은 애에게 성교육이랑 형질을 같이 가르치라고? 연기라면 몰라도 이쪽 방면은나도 잘 모르는데.

 

 

자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정말로 써니보이에게 부탁하고 싶긴 하지만덧붙여지는 말까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파? 발현? 자위? 성교육? 형질?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자위와 성교육이 같은 선상으로 묶여있다는 것 하나 빼고는 스티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써니보이에게 부탁? 형질이 뭔데? 그보다 알파가 뭐지? 대화의 중심에 있는 지식의 부재로 내용을 도통 알 수 없어 스티비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리차드. 지금 중요한 건 스티비가 아니잖아. 괜찮은 거 맞아? 땀이 엄청 나는데

- ... 아니... 머리가 안 돌아가...

- 리차드...

- 어쩌겠어... 끝나기를 기다려야지...

 

 

안타까워 하는 오스카와 달리 리차드의 말은 덤덤했지만 말하는 사이사이에 이를 악무는 듯한 신음성이 섞여있었다. 많이 아픈 건가? 지금 대화를 이해한 게 맞다 하면 나 때문에 리차드가 아픈 거야? 기척을 내는 게 맞는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아 스티비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 약을 먹어도 상태 호전이 안 되는데

- 복용 시점이 늦은 거야. 내가 안일했나봐

- 어떻게 그게 네 잘못이야? 리차드. 스티비가 알파가 될 거란 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어. 너 때도 그랬잖아.

 

 

자책하는 리차드에게 단호하게 화를 내는 오스카는 평소와 같았다. 그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리차드의 음성이 점점 잦아들고 있는 현상으로부터 알아챘다. 스티비는 문고리를 잡는 걸 그만뒀다. 알파가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대화에서 얻은 내용은 자기가 알파가 되면서 리차드에게 이상 현상이 생겨서 리차드가 힘들어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문득 스티비는 리차드가 무슨 말을 할지 덜컥 두려웠지만 오스카가 한 말에는 답이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견디는 듯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 도와줄 수 있어?

- 나로는 도움이 안 될 텐데.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리차드는 앓는 신음성을 내더니 하하, 바람 빠진 것처럼 웃었다. 평소처럼 명량한 느낌이 아닌 땅으로 꺼지듯 사그라지는 소리였다.

 

 

- 고마워. 오스카. 덕분에... 고통스런 밤이 길진 않을 거 같아

 

 

그리고 나서는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던 불빛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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