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키 소재 끼얹은 재구성. 스포 포함.

 


 

세훈이 일본에서 한참 지낼 때 여학생들이 수군거리면서 말하는 대화 중에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다. 짝사랑을 하면 꽃을 토해내는 병에 걸린다는 내용이었는데 의학적으로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사랑이 이루어지면 그 현상이 낫는다고 했다. 허무맹랑한 미신 같은 이야기에 비교적 그럴듯한 질병의 이름까지 있는 것이 기구했지만 하나하키(花吐)’ 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상대를 볼 때마다 꽃을 뱉어난다문학에서 보는 수사적인 표현 같네. 실제로 그런 증상이 있다면 어렵게 마음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좀처럼 전하지 못하는 말 대신에 꽃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면 예쁘겠다.’



한 턱을 괸 세훈은 창문 너머에 피어난 벚꽃을 바라보았다. 연분홍색의 잎이 단조로운 교정을 장식하듯 따사로운 햇빛에 뒤섞여 팔랑팔랑 흩날렸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꽃이라.’

 

 

세훈은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교과서 한 편에 연필로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을 그렸다. 소설로 쓰기에 좋은 소재가 될 지도 모르겠어. 꽃과 사랑이 버무려진 이미지에서 그려지는 감성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첫사랑의 이미지처럼 풋풋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

 

 

우윽

 

 

해진 선생님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그간 존경해왔던 사람을 곁에서 도울 수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거짓으로 그를 속인다는 죄악감이 공존하기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등을 돌리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가만히 있었지만 속이 메슥거렸다. 천천히 내쉬는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오한이 드는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세훈아. 어디 아프니?”

 

 

티를 내지 않으려 했건만 다소곳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거였다. 괜히 나 때문에 선생님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는데괜찮다고 애써 웃어 보이려 했지만 느닷없이 구역감이 치솟아 세훈은 입을 틀어막고 다급히 자리를 떴다. 세훈아, 괜찮니? 해진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어느 순간 메아리로 멀어져갔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실내를 벗어나고 바깥의 찬 공기에 숨을 트자 현기증이 크게 일었다. 손을 떼자 일순 기도를 틀어막으며 채우고 있던 꽃잎들이 타액과 같이 쏟아졌다. 낱개로 흩어진 꽃잎 여러 장이 팔랑거리며 메마른 땅을 수놓았다. 세훈이 몸을 굽혀 몇 번을 헛구역질 한 끝에 마지막 꽃잎 하나가 허공에서 춤추듯 빙글거리더니 천천히 낙하했다. 가까스로 이상 현상이 멎자 세훈은 비척거리며 땅에 주저앉았다. 바닥에는 노란 꽃잎들이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사람의 몸에서 먹지도 않은 꽃잎이 나온다니. 아름다워 보이던 환상은 현실로 옮겨져 왔을 때 낭만적이라기보다는 괴기했다. 어디서 기원했는지도 모를 미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현상이 세훈을 덮쳤을 때는 당혹감이 먼저였다.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동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 사살 당한 기분은 어떠했는지.

 

사랑.


글자로만 접해본 두 음절의 단어가 그제서 저에게 닿아 세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상대가 해진 선생님이라니. 처음 느껴본 감정에는 설렘만이 아닌 두려움도 동반했고 상대방의 반응이 담긴 답장을 읽으면 마냥 좋기보다 까마득해졌다. 이 모순적인 마음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좋아한다는 말로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가 없다 생각하기는 했었지만눈두덩을 꾹꾹 눌러보지만 피로가 풀리지 않아 세훈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는다.

 

 

해진 선생님이 나를 애타게 찾는다. 내가 아닌 내가 빚어낸 형상을.

 

 

사랑의 자각과 동시에 찾아든 감정은 뼈아픈 실연이었다. 콜록, 기침을 하자 익숙해진 노란 꽃잎 몇 잎이 보인다.

 

 

얼마나 이걸 더 토해내야 할까.

 

 

빛으로 그려낸 환상을 한 겹 편지 위에 올려두고 세훈은 침잠한다. 저에게 쏟아지는 편지는 어느 순간 연서로 변모해 저에게 집착하듯 매달리고 있었고 선생님의 글이 위안이 되었단 제가 보낸 편지 역시 그에 맞게 대담히 변해가고 있었다. 서로에게 기대듯 자신을 필요하다고 속삭이는 감정에 이끌렸으나 처음 의도와 달리 지금은 기형적인 관계였다.


 

나는 어차피 사랑받지 못할 텐데 언제까지 속여야 하며 이 고통을 반복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그만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지 않나.

 

 

제 필명이었던 히카루는 이제 저를 상징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김해진, 그가 대하는 태도로 인해 이분법으로 나눠져버린 이상 히카루는 제 분신이었지만 저와 달리 사랑 받는 꿈이었다. 제가 원했던 것을 모두 가져 소심할 일도 없고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빛나는 여인. 환상을 거듭할수록 정세훈이란 본체는 정작 그림자 속에 묻혔다.

 

 

차라리 마음을 접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세훈은 흩어진 꽃잎들을 쓸어 쓰레기통에 담았다. 초라하게 버려지는 마음의 잔해들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이 마음도 낙엽처럼 시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싱그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살아있는 생화(生花)였다.

 

 

생각처럼 쉬웠더라면 이렇게 일이 꼬일 때까지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나는 그저, 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지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종이에 벤 피부가 아문 것과 달리 상흔이 남은 마음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꼬인 실을 풀 방법은 매듭을 잘라내는 방법밖에 없었으나 그 순간 제가 이뤄왔던 행복이 공중으로 분해되어 안개로 흩어질 거란 사실 정도는 알았다. 이명이 울린다. 거짓말쟁이가 벌을 받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네가 있어야 할 장소를 잃게 될 거야.

 

사실을 고하기는 늦었고 거짓을 말하기에는 양심이 버티질 못한다. 그래도 더 늦어지기 전에 진실을 실토하지 않으면. 기로(岐路)에 선 소년은 이도 저도 못한 채 망연하게 서있다. 세훈은 제가 하나 둘 더해가며 말하던 거짓이, 희망을 그리려던 미래가 까닥하면 비극적인 결말과 교차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목을 간질거리는 감각이 들이차자 기침이 터지고 어김없이 꽃잎이 나풀나풀 흩날린다. 지긋지긋한 노란색이 허공에 산산이 펼쳐진다. 어쩌면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할 저주가 될 지도. 꽃잎이 바닥으로 사뿐 떨어지는 장면을 바라본다.

 

 

진실은 영원히 목 안에 가두고 입술을 박음질해버리는 편이 덜 실망하시겠지.”

 

 

울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알 수 없어 세훈은 입술을 앙다문다. 아무리 소모한다 한들 사라지지 않을 잔여물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이게 형벌이라면 정말 꼴사납네. 세훈은 제 손으로 마저 꽃잎을 하나하나 주워 쓰레기통에 버린다. 퍽이나 잘 어울리는 최후다.


 

*

 

 

히카루에게서 온 편지에 꽃잎이 한 장 섞여 있었다. 꽃잎이 접힌 걸로 봐서 같이 동봉할 생각은 없던 걸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피지 않은 꽃. 해진은 이걸 본 적이 있었다.

 

 

 

제가 쓰던 책상 주위에는 늘 종이가 가득했다.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정 부호를 그어 지우기도 했고, 그 부호가 계속 이어지면 책상 아래에 내려두었다. 천재라고 주위에서 추대했지만 여느 작가들이 그랬듯 글이 막힐 때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그 다음을 쓸 수 없어 버려지는 종이도 많았다. 따스한 볕을 받다 저도 모르게 잠에 들기도 했지만 마음에 드는 분량을 쓰면 해진은 그때서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선택받지 못한 원고지들을 버리려 책상 아래 쌓인 원고지를 집어드는데 꽃잎이 팔랑 떨어졌다. 이 주변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꽃이라 갸웃거렸다. 순수문학을 쓰는 작가에게 자연은 가까운 벗이다. 어디서 흘러 들어온 걸까? 고민 끝에 원고지를 가져다주는 세훈이가 같이 운반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 내지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더니 내가 모르는 명소라도 알고 있는지?’



나중에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꽃의 모양을 상상한다. 노란색의 꽃. 아마 히카루와는 어울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렇게 편지가 늦어진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쓰레기통 옆에 버릴 원고를 묶어 두는데 노란색 잎들이 쓰레기통 안에 흩어져있다. 온전한 형태가 없는 걸로 보아 하나씩 뜯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해진은 고민한다. 말을 못 한다 하지만 생명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되는데



꽃점이라도 본 건가? 그럴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생각은 갑자기 침입한 친구로 인해 끊겼다. 난입한 윤이 태연한 얼굴로 제 목에 팔을 걸며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글은 잘 쓰고 있냐는 말에 망설이다 답장이 오지 않았다고 말하니 또 그 빤라따 이야기냐며 주막으로 끌려갔다. 약주 말고 오늘은 밥을 먹자며 윤이 알아서 주문을 하고 반찬이 차려지는 동안 여러 화제의 대화가 오갔다.

 

 

- 아 참. . 그러고보니 세훈이가 꽤 재밌는 말을 하더라고. ‘예전에 일본에서 사랑을 하는 사람을 보면 꽃을 토해낸다는 증상이 발현한다는 이야기가 유행하듯 돌았어요. 특이한 괴담이라고 생각하지만 문학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꽤 낭만적이지 않나요?’ 라고 하더라고. 의외로 대담한 면이 있단 말이야. 해진이 형. 세훈이에게도 역시 문학도의 기질이 있는 것 같지 않소? 그 녀석, 왜 도통 글을 안 보여주는지 원.

- 아직은 부끄러워 그런가 보오. 때가 되면 보여주겠죠.


 

당시만 해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다. 왜 갑자기 불현듯 윤이 저랑 같이 식사 자리에서 나온 시시콜콜한 대화의 한 단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넘겼던 이야기가 지금은 입에 부스러기로 남는다. 조화로운 사고의 흐름 속에 이질적인 내용이 끼어들자 꺼끌꺼끌하다. 해진은 접힌 꽃잎 모퉁이를 조심스레 펴서 손가락으로 매만지다 코에 가져가본다.

 

 

…….


왜 그동안 몰랐을까.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니.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해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긍정하며 제가 그려낸 환상에서 깨기에는 제멋대로 쌓아온 감정이 고통스러웠고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은 저를 홀릴 만큼 매력적이라 아픈 와중 저를 견딜 수 있게 하는 마취제였다.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문체. 편지는 계속 이어졌고 해진은 제 곁에 있는 아이가 저랑 같은 슬픔을 안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손을 먼저 뻗지 못한 이유는.

 


나는 이제 죽어갈 테니까.

 


현실로 끌어내려지면 그저 폐병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암의 말기에 이르자 몸의 면역력이 쉽게 무너졌다. 정신력만으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었지만 단순히 병마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허약한 몸으로 저항은 제대로 하지 못하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생각이 무섭게 폐부를 찌르는 기침이 몸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한참을 콜록거리며 내뱉자 몸이 거세게 흔들려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손에 피를 쏟아냈다. 서서히 가라앉자 몸의 떨림이 멎어갔고 해진은 가까스로 틀어막은 입가에서 손을 뗐다. 눈을 뜨니 익숙한 핏덩이가 손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해진은 침을 두어 번 삼켜 목을 부드럽게 만들고는 젖은 천에 제 손을 대충 닦아내고 펜을 쥐었다. 간헐적으로 나오는 잔기침 소리를 죽이며 흔들리는 몸을 뒤로하고 글씨를 한 자라도 더 적는다. 글쟁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쓰는 것뿐이다.

 

 

그래도 손과 머리를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지. 아직까지는 글을 쓸 수 있으니.

 

 

숨을 가다듬으며 원고지 위에 촉을 가져대자 사각사각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 술렁이던 마음을 잠재울 만큼 차분해지며 맑아지는 정신. 모든 감각이 생생하고 살아있다. 세훈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에게 약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을 내친다.

 

 

나는 환상 속에서 이야기의 성을 쌓고, 몇 자 더 남기고 갈 테니.

내가 죽더라도 글은 남을 테니까. 생이 다하기 전에 끝을 맺지 않으면.

너에게 위안이 되었던 그 글처럼.

내가 글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눈을 감는다. 상상 속으로 그려낸 여인은 희미해지고 어느 시점에서 제 곁을 지내던 소년으로 바뀌어져 간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뎌지면서 해진은 허우적거린다. 글의 동지는 지금까지 제가 그려낸 이미지가 더 들어맞았는데. 해진은 잡히지 않는 형상을 붙들어놓듯 필사적으로 펜을 붙든다. 거짓 속에 사는 생()은 현실을 내버려두고 글 속에 파묻힌 삶과 닮아 있다. 해진이 글을 써내려가며 원고지가 빼곡하게 채워지는 동안 애써 외면하려 들지만 그를 지키는 자가 남긴 파편에서는 부드러운 향이 감돈다. 눈꺼풀 안의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해도 지문처럼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

 

 

슬픔을 나누어주신 것처럼 아픔 또한 같이 나눌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 뜻을 따랐을 텐데.

 

 

나 바보 같네.”

 

 

꽃을 토해내는 현상도 무작정 발작처럼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감정에 반응하듯 좋아한다는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려 들 때, 주체할 수 없을 때 주로 숨이 막히면서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시시각각 그랬다면 해진의 곁을 지킬 수도 없었을 테니 다행이었다. 아니, 차라리 계속되어서 곁에 있을 수 없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그랬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세훈은 한참 동안 꽃잎을 뱉어내고서 제 기력이 다했을 때 약국에서 타온 약포를 집었다. 소파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해진이 송장처럼 늘어져 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드시지 않을 테니까. 물에 가루로 된 약을 타 수저를 살짝 벌어진 그의 입에 대고 약을 흘려보냈다. 전에는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더니 지금은 반응조차 없다. 파리해진 얼굴이며 색이 없는 입술에는 죽음의 낫빛이 서려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김해진의 글에 매료되어 여기까지 온 건 사실이었으나 그를 한계로 몰아놓고 죽이려고 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이제 와서? 그런다 한들 연명시키는 것밖에 더 되지 않잖아.

저를 괴롭혔던 제 악몽이 비웃었다.

나 없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런다 하더라도 이렇게 선생님이 죽음에 삼켜지게 나둘 수는 없어.

 

 

죄송해요. 선생님.”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을 할 걸. 저를 향한 문장들이 너무 따스하고 포근해서.

세훈은 붕대로 몇 겹 감싼 오른 손을 붙들고 몸을 웅크렸다. 끝내야 할 시간이다.

 

 

*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났던 일주간 해진은 방 안에 틀어박혀 여전히 콜록거렸다. 증세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여전히 피를 토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떻게든 생각을, 글을 써보려 하지만 눈이 점점 어둡다. 하릴없이 문을 열어두고 바깥 정경을 바라본다. 아직은 봄이라도 날이 차 해진은 문을 닫으려다 꽃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걸 바라본다.

 

 

- 선생님을 죽이는 글을더는

 

 

뒤늦게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혼란을 흘려내고서 편지를 다시 읽었다. 눈이 점점 캄캄해져 글자를 읽는 것이 점점 힘들었지만 전에 읽었던 내용이니 기억을 복귀하는 건 어렵지 않다. 자신의 망상을 지워내자 거기에 외로운 소년이 보인다. 저처럼 유년기의 기억이 좋지 않은 소년이. 세훈이, 저를 처음 보던 그 맑은 눈이 자신을 본다. 제 주위를 떠돌던 향기. 숨겨지듯 흩어져있던 그 꽃잎. 진심을 토해내던 목소리. 숨기려야 숨길 수 없던 떨림을.

 

 

처음부터 널 보고도 알아채지 못한 건 나였는데.

 

 

해진은 다발로 엮은 라벤더 꽃을 구해달라고 윤에게 부탁했다. 그이에게 주고 싶던. 편지를 쓰던 이에게 주고 싶던 제 마음이었다. 이 편지를 무사히 부치고 싶은데 주소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났으니 아는 단서도 없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편지는 직접 전해주고 싶었는데. 세훈이 쓰던 캐비넷에 편지를 넣어두고 하루에 한 번 경과를 지켜보지만 건든 흔적 없이 그대로 남겨져있다. 언제 닿을 지, 닿지 않을 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이 괴로웠지만 그럴 때마다 편지를 고쳐 썼다. 갱신된 새 편지로 교체하고 매일같이 기다리지만 받는 이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제 몸뚱이 하나 감당하지 못해 상처를 주고 말았다. 어린 아이에게.

 

해진은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든다. 시야가 여전히 하얗게, 까맣게 점멸한다. 콜록콜록, 마른 기침이 터진다. 한 번 시작되자 둑이 터진 양 길게 이어진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멎기를 기다린다. 기침의 빈도며 찾아오는 주기가 잦아져 목이 자주 탄다. 침을 몇 번이고 삼켜 넘긴다.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떠 집중해보지만 맺힌 상은 여전하다. 평소 쓰던 감각을 살려 글자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답장을 받고 싶었는데. 너에게.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 편지를 읽게 될지 모르겠지만. 해진은 글을 쓴다. 눈을 감으면 이제 그의 뮤즈가 온전한 형상으로 드러난다. 내쳐진 아이는 엎어진 채로 저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 눈에 어린 눈물을 닦아줬어야 했는데. 너는 나에게 슬픔을 나누어달라고 했는데.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지금에 와서 되돌릴 수 없어 갑갑할 뿐이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해진은 펜 촉 끝을 누르며 제 과오와 전하고 싶던 마음을 솔직하게 적는다.

 

 

우리는 만났고, 사랑의 모든 형태를 탐닉했으며, 너의 말들로 내가 그 순간들로 버티었으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땅거미가 진다. 내가 죽더라도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니 더 이상 나로 인해 슬퍼하지 않기를. 말라가는 노란 꽃잎을 본다. 일찍 답을 줄 수 있다면 좋았을 걸. 구체적인 걸 깨닫는 시점은 언제나 많은 것이 지나간 후다. 답장을 받는 이의 얼굴을 모를 때는 그리도 설레서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더니 알게 된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글자로 이어진 인연이라 하더라도 문장으로 전하는 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싶었지만. 직접 만나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토록 많은데. 해진은 눈을 감는다. 허상이 아닌 제 마지막 기억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를 끌어안는다.

 

 

한결 같이 너의 답장을 기다리며.


 

*

 

 

세훈은 해진의 부고를 듣고 무너졌다.

 

장례식에 찾아 갈 염치는 없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세훈은 죄인처럼 멀리서 광경을 지켜만 봤다. 죽음의 광경은 그가 써오던 글과 다른 색으로 낯설었지만 金海振 이라는 이름 석 자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서있었던 건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세훈은 돌아와서 며칠을 앓았다. 열이 들끓었지만 헛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제 입에서 꽃은 토해내지 않았지만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

 

 

정체성을 죽이면서 글과 함께 살아왔던 인생은 버렸다. 세훈은 그 날 이후 문학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서 철이 들었냐며 경영에 필요한 것을 가르쳤고 세훈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인형놀음에 불과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제 삶을 흘러가는 대로 방치했다.

 

죽은 사람과 달리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았다. 껍데기뿐인 인생이었지만.

 

미련으로 점철된 과거를 안고 있다 한들 사람에게는 행복도 발전도 없다. 그리고 그걸 몰라서 기억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시점의 가정. 지금으로서는 효용이 없는 것들을.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다 신문으로부터 유고집 소식을 접했다. 해진의 부고가 있고서 1년 후의 일이었다.

 

후회를 반복하던 끝에 세훈은 이윤을 찾았고 해진의 마지막 편지를 찾았다. 마지막 편지. 자신이 유일하게 받지 못한 편지였다. 거기에 뭐가 써져 있을까. 더 이상 숨길 수 없던 거짓을 이윤에게 참회하듯 토로한 끝에서야 세훈은 자신이 찾던 편지가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다시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명일일보 신문사였다. 기억 속에 묻어버린 죽음의 무덤. 선생님은 나를 많이 원망했을까.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거절당했던 기억도 큰 상처였지만 그보다도 해진의 장례식을 멀리서 서성이며 보기만 했던 기억이 쓸려왔다. 해진 선생님. 떨리는 손으로 제가 쓰던 캐비닛을 열었다. 해진이 남긴 말라비틀어진 꽃을 꺼내자 부스러진 꽃가루가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열자 그토록 찾던 그의 말이, 그리운 필체가 적혀있었다. 편지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울음이 터져 가지런한 글씨가 번져 보였다. 저에게 비난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건만 문장은 한결같았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목소리가 제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기 편지와 원고 받아주면 좋겠다.

그녀에게 주고 싶던 꽃과 함께.

 

 

세훈은 제게 남겨진 라벤더 꽃다발과 메마른 꽃잎을 보았다. 해진이 남긴 꽃과는 다른 종류였지만 다른 의미로 익숙했다. 제가 그토록 지겹게 뱉어내던 꽃잎과 같은 꽃이었다.

 

 

……

 

 

눈앞이 재차 흐려졌다. 언젠가부터 깨달았다. 선생님은 내가 히카루인 것을 알고 있었어.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그가 없는 계절을 몇 차례 반복한 후였다. 세훈은 편지의 글자를 더듬으며 편지를 끌어안았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탓에 눈물이 멎지 않아 눈가가 뜨거웠다.

 

 

그게 누구라도, 나는 편지의 주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꽃을 토해내지는 않았지만 세훈은 제 사랑이 그간 끝나지 않았었다는 것을 그제서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많이 아팠던 사랑을 보내줘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해진이 저에게 남긴 시들어버린 꽃다발을 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꽃잎이 흩날리는 봄이었다.

 

 

 

 

 

171227 제작년에 쓰다 말았던 글 이어. 최근에 해진이 편지를 고쳐 썼을 거라는 다른 분 생각을 봤는데 생각해보니 진짜 그럴 것 같아서(억장 두 번 무너짐).. 세훈이가 토해내는 꽃은 달맞이꽃 생각했다. 온전한 꽃을 토해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서 언급할 일은 없었지만.

 

재연 당시엔 세훈이에게 친절한 성장물이라 생각했는데 올해는 모르겠다... 재연도 몇몇 의문점이 있기는 했지만 삼연은... 극도 변했지만 나도 변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