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나무 밑에 놓인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그를 처음 본 순간그가 파가니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초록의 나뭇잎은 무성했고 틈 사이로 햇빛이 쏟아졌다그는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이자 햇빛이 그려낸 빗방울 속에 파묻혀 있었다빛을 받은 금발은 더 밝게 빛났고 음영에 젖은 부위는 제 색을 잃고 바래졌다뭘 그렇게 수심에 빠져있는지 벽안은 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전의 세계에서는 거슬리는 빛이 지워내지 못할 짐이었는데 이 시대에서 처음 만난 그는 우울해보였다정말로 그가 파가니니인가내가 아는 파가니니는 저렇게 주눅든 사람이 아니었는데오히려 강렬해서 도무지 떨쳐낼 수 없던… 발을 떼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사색에 잠겨있던 그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교차한 순간 후회했다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생각하는데 그는 멀뚱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에게 용건이 있나요?

 

 

내게 처음 건넨 한 마디가 그거였다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는 안도와 동시에 어떻게 나를 알려야할지 고민했다.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짓말이었다이 세계에서도 연주를 할 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으니 도박이었다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고 아… 탄식하더니 씁쓸한 얼굴을 했다.

 

 

콩쿠르라면 벌써 작년이네요지금은 나가본 적이 없어서.

 

 

자세히 보니 오른 손에는 테이핑이 감겨있었다.

재활치료는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었다손의 감각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아요이래서는 휠을 쥘 수 없는데그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왜 연주 할 수 없다고 단정 짓죠물으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할 수 없어요감각이 느껴지지 않아요교통사고였다흔하디흔한천재의 재능을 앗아가는 것이 고작 그런 사건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신을 믿나요?

 

 

그는 내 말에 괴로운 얼굴을 했다그는 내가 입은 수단과 목에 걸린 십자가를 보며 하조소했다.

 

 

믿었었죠가세요.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기에 손을 낚아챘다뭐하는그가 뭐라 하든 말든 손바닥의 여러 군데를 지압하듯 눌렀다그의 얼굴을 관찰했지만 표정은 계속 찡그리고 있어 변화를 알 수가 없었다.

 

 

아프신가요?

아니요.

이래도 안 느껴지나요?

안 느껴져요.

여기도?

대체 저랑 뭘 하고 싶은 겁니


 

슬슬 짜증이 나는지 화를 억누르려 하기에 그의 손을 입에 가까이 가져가 손바닥을 핥았다테이핑이 군데군데 감겨있어 맨 살이 닿는 부위가 아닌 곳은 감촉이 까칠거렸다그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얼굴이 다른 의미로 굳어졌다.

 

 

무슨 짓… 그만 둬요경찰을 부를 겁니다!

 

 

그제서 내게 집중하는 모양새이기에 보란 듯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그가 붙들린 손을 빼 몸을 물리려고 하기에 혀를 옮겨 손가락을 핥았다그제서 그의 저항이 멎었다설령 지금 활동하지 못한다 한들 바이올린리스트에게 손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그의 반응을 재며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놓자 그가 움찔했다정말로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아까 분명 손으로 눌렀을 때 그는 아니라 했지만 손이 움직이는 걸 봤다내 생각이 맞다면눈으로 반응을 지켜보며 손가락의 피부를 깨물자 아, 으…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간다자리를 옮겨가며 계속하자 제발그만… 이상한 얼굴로 나를 만류하려기에 입술을 뗐다그의 손을 놓아주자 그가 다급히 손을 빼며 거리를 벌리더니 멀어졌다황당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나를 경계하며 노려보고 있었다손등으로 대충 입가를 문지르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느껴지죠도망치고 있잖아요.

…….

할 수 없다고 단정 짓지 마세요당신은 할 수 있어요저는 당신의 연주를 듣고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당신이 악마라고 생각했다고 사실을 실토하면 되나그래서 당신을 모함에 빠뜨려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고성직자로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미안하다고 사과해서 될 일이었다면 사과로 끝내고 싶었다말이라면 얼마든지 유창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왜 그 순간 과부하가 걸린 건지전생의 업으로 인한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 제 연주를 듣고?

 

 

그는 어느 순간 끊겨버린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손가락은 타액으로 번들거렸지만 그는 내가 말하는 걸 더 듣고 싶어 했다여기에 있는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자신이 연주를 해야 할 동기피드백이나 감상연주자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건 세간의 반응이니자존감이 결여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는 정해져있었다.

 

 

… 다시 듣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악마에 홀린 사람처럼.

 

 

마지막 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대로 고해하듯 토해냈다어차피 내가 죄를 지은 상대는 이미 죽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니당신에게 사과를 전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영혼이라면 적어도 면죄부 정도는 되지 않을까전생의 나도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면 좋았을 것을후회라는 건 늘 지나고 나서 깨닫는 것이라 사죄할 길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무한한 미궁을 헤매야만 했다그런다 한들 천국을 가고 싶다거나 내 죄를 씻고 지워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던 건 아니었다기억 속의 모습과 같은 그가 내 기억과 달리 초라한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터이다당신은 차라리 나를 골탕 먹이며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때가 더 나았어선한 외양으로 손이 춤추며 만들어내는 기괴한 연주는 마음 어딘가를 건드려서그 당시 그게 당신의 연주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내가 말을 아끼고 침묵하는 동안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푸른 표면 위로 얇은 막이 어렸다둥근 눈이 서글서글했다.

 

 

고마워요그리고… 미안해요신을 버렸다고 해서.

힘든 시기는 오니까요버린 것이 아니라 신은 늘 마음 속에 있습니다언제나.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원한다면 성당으로 오세요.

이런 전도는 또 처음인데나쁘진 않네요.

 


그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싱그러운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었고 세피아 빛으로 젖어든 그의 모습이 벽화에서 봤을 듯한 천사처럼 아름다웠다지금 그가 펼치는 연주는 어떤 느낌일까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그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는 발을 뗐다당신의 그 연주가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은제 영혼을 송두리채로 뒤흔들었던 흥분이 각인된 것마냥 남았는지 지금은 멜로디도 뭐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가끔은 그리웠다자극에 노출이 되면 더 강한 걸 찾는다더니 이래서인지좀 더 수련을 열심히 해야 이 들 뜬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지감회는 새로웠지만 그를 이 시대에서 만났다는 사실 자체는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 때문인지뭐가 되었든 표정을 감출 수 없어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는데,

 

 

연주꼭 다시 들려드릴 테니까요신부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만간 미사에 참석하러 성당에 갈게요.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애써돌아보지 않았다그의 말에 대답하는 것 대신 목에 걸린 십자가를 손에 움켜쥐고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아버지길 잃은 어린양이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옵소서. 당신의 곁에서 빛을 받을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초안은 올해 4월. 파가니니 오슷 듣다가 너무 그리워서 저렴하게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