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14. 00:02

루치오x파가니니. 전생을 기억하는 AU.




“처음에 만났을 때 절 보고도 모른 체 하셨잖아요. 왜 그랬어요? 저를 다시 보는 게 괴로웠어요?”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이자 밤의 색에 가려진 금색의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무심히 흐트러진다.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태양처럼 눈부시던 금발도 불이 켜 있지 않은 방에서만큼은 푸르스름한 색상으로 물들어 있었다. 때와는 상관없이 그의 형상은 밝아 좀처럼 제 시야에서 피사체를 지워낼 수 없다는 사실을 루치오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선명해서 눈을 감아도 망막에 각인되듯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지. 제 자신을 시달리게 만든 아득히 먼 과거부터 그를 잊기에 충분할 만큼 거대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어김없었다. 저를 홀리게 만드는 존재를 구별하듯 색채는 어둠 속에서도 밝아 루치오는 침대에 편히 누워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청년을 가만히 응시한다. 손이 닿을 수 있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세계를 거쳤는지 루치오는 기억하고 있지만 당사자 앞에서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고요를 지키듯 묵언했다. 혀끝에서 문장들이 박음질되어 목 안으로 침잠하는 건 익숙한 인내였다.



루치오가 처음 파가니니를 알게 되었던 세계에서 둘 사이에 형성된 험악한 관계는 다른 세계로 이행되면서 조건이 똑같이 주어지지 않은 탓에 쉽게 깨졌다. 달리 말해 원한다면 그와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뜻이었지만 루치오는 방관자로 남아있었다. 공통적인 화제도 없어 접점을 만들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만났을 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지 판단을 재기 어려워서였다. 내가 한 일도 아닌데 하지도 않은 일을 사과해야 하나? 2번째 세계만 해도 루치오는 전생의 기억이 꺼끌꺼끌해서 타인의 기억을 제 머릿속에 심어놓은 것 같다고 느낄 때였다. 타인의 인생을 제 잘못된 판단으로 파탄에 이르게 한 걸 어떻게 사과하는 게 좋지? 이것보다 약 80년 전, 당신의 인생을 망쳤으니 제가 회개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이게 또 다른 과거의 내가 저지른 기억이 아닐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 저쪽이 날 기억하라는 법도 없는데. 그래서 바로 전의 기억을 갖고 있던 루치오는 우연히 그 시간대에서 파가니니를 발견했지만 외면했다.


신기한 건 달라진 시간대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도 그들이 매번 선택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루치오의 경우 신앙을, 파가니니의 경우 음악을. 


태어났다 죽고, 다시 다른 시간대에 태어났다 죽고, 또 다시 태어나고… 3번째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 왜 경험하지도 않은 기억들이 제 안에서 쌓여 가는지 알 수 없어 루치오는 괴리감을 견디지 못하고 울면서 신에게 매달리듯 기도를 올렸다.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자문을 구해봤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받질 못해 루치오가 정신착란을 느낄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즈음, 루치오가 알지 못하는 기억 속에 있는 청년은 구원의 음악소리와 같이 나타났다. 바이올린 선율은 옥타브를 손쉽게 넘나들며 부드럽게 음을 이어갔다. 음악이라곤 미사밖에 모르는 루치오에게도 신기할 정도로 유동적이라 여겨지는 바이올린 소리였다. 안정적으로 흘러가다가 섬세해지고 파격적으로 변할 때의 현의 떨림은 저도 모르게 감상에 젖을 만큼 마음을 뒤흔들었다. 강렬한 색채를 지닌 음악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루치오를 사로잡았고 파가니니의 음악을 다시 듣게 된 루치오는 이 만남을 위해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파가니니. 당신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군요.


자신이 살아왔던 생애를 거듭하며 기억하는 루치오에게 있어 매 시간대마다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 동업자가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마음의 위안이었다. 운명이 우리를 이렇게 이끌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루치오는 몇 번이고 반복되어지는 생을 살아가면서 그늘에 잠긴 객석에서 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감상하곤 했다. 그런다고 그에게 직접 접근하거나 말을 건네지는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던 시대에서 자신이 그의 음악에 빠져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루치오는 그의 음악이 신이 내린 빛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내 손에 닿으면 부서질 지도 모르니까. 루치오는 그의 손이 활을 쥐고 현 위에서 화려하게 춤추는 선율을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몇 차례의 생을 반복하면서 이런 삶이 지겹지 않은지 자문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신을 믿는 것과 같은 이치에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필연이었는지, 악보가 바람에 날아가 하늘에서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걸 우연히 루치오가 잡으면서 새롭게 관계는 형성되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스스럼없이 이름을 물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금발의 청년은 지금까지 루치오의 기억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빛을 발하며 양지 속에서 반짝거리는 청년을 눈앞에서 목격한 루치오는 악보를 건네주는 그 순간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9번째의 삶을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생겨난 만남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익숙한 게 편했는데 이렇게 번거로워질 줄은 몰랐지. 그와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루치오의 생애는 지금까지 반복했던 생활과는 판이하게 벗어나 궤도가 틀어졌다. 규칙적이고 조용한 일상에 소란스러움이 불규칙적으로 방문하면서 루치오가 감수해야 할 부분도 많아졌다그럼에도 루치오 본인 스스로는 지금의 환경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뜻하지 않게 회상에 잠긴 탓인지 굳게 다문 입술이 떨어지지 않자 질문을 건넨 자의 얼굴이 금세 부루퉁하게 변한다. 볼에 바람을 넣어 잔뜩 부풀린 모습은 나이에 맞지 않았지만 예로부터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못마땅하단 기색을 어김없이 드러내며 입이 열린다.



“하긴. 양심이 있으면 그러긴 했겠죠. 뭐, 지금의 신부님께서 잘못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지금 사는 것보다 몇 백 년 전의 생(生)에서 일어난 일이고. 태어나기도 전의 일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묻는 것도 아이러니하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도 지금은 파가니니라는 유명인사가 아니기도 하고.”



사실이었다. 루치오 아모스와 다르게 니콜로 파가니니는 같은 이름을 갖지 못하고 태어났다. 악마의 바이올린리스트라는 수식어는 저주 받아 그 이름만큼은 유전되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사람의 외관과 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그의 특색은 변하지 않아 루치오는 늘 그를 손쉽게 찾아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이 가고 있었다. 불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드는 습관성 같았다. 제가 지은 죄악 때문에 회개하기 위한 벌을 받고 있는 건지 아닌지 판단하는 걸 그만 둔 건 6번째 세계에서였다. 루치오 아모스에게 있어 파가니니를 찾는 건 일관된 흐름 중 하나로 당연해진 일상이었다. 단 한 번도 연속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입에 올린 적 없으니 눈앞의 상대는 맨 처음 만났던 세계 밖에 기억할 리 없겠지만. 그 동안 접점을 만들지 않고 지나쳐 온 세계의 파가니니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9번째 세계에서 만난 그는 루치오 아모스가 파가니니를 추락시켰던 첫 번째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오른쪽 손등에 십자가가 없네요. 반지도 예전과는 다른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고. 액세서리 취향이라도 변한 건가요?


질문을 듣고서 루치오는 눈에 띠게 창백해졌고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맥락과 상관 없는 말이라 흘릴 수도 있었지만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상대가 갖고 있다는 건 제가 마땅히 비난받고 증오의 대상이 되어 복수를 하러 달려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당신이 한 짓도 아니지 않습니까? 책임소재를 당신에게 물어서 뭐해요?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무뎌진 건지 아니면 지금의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배포가 큰 건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흐아아암 하품을 늘어뜨리며 만사태평한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루치오 신부님. 지금의 당신이 하지도 않은 짓을 방패삼아 멀어지려고 하지만 말아요. 진짜 상처받으니까.


외로움이 엿보이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저와 다르지 않은 고독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다른 감정이 움트듯 피어나 루치오는 그에게 자각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상념에 자꾸 잠기려 드는 루치오를 현실로 끌어내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때처럼 잠도 못자고 밥도 굶으면서 절실하게 연습에 매달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지낸 것도 아니었고요. 평화롭다면 평화롭지만 그만큼 실력은 많이 무뎌졌죠.”

“… 그렇습니까?”

“왜 이렇게 반응이 싱거워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감정적인 대응 대신 별 감흥을 보이지 않자 단조로운 말이 주고받아진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전처럼 대립적인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니었으니 어떻게 보면 지금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알맞은 온도였다. 아득히 먼 시절 악마의 눈동자라 생각했던 녹안이 일그러지더니 한숨을 내쉰다.



“변했군요. 예전에는 저를 볼 때 당장이고 어떻게 하질 못해서 그렇게 안달이더니. 이거야… 저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겁니까?”

“… 하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 생겨난 비이상적인 집착을 애정이라 명명하는 겁니까? 당신에게 그런 마조히스트 성향이 있는 줄 몰랐군요.”

“마조히스트라니… 저보단 루치오 아모스 신부님이야말로 사디스트가 아닌지 재고해보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니, 지금은 자학하는 걸 보니 마조히스트에 더 가까운가? 신부님에게 자신의 고해 성사를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군요.”

“…….”

“뭐… 그런다 한들 지금으로선 의미가 없네요. 그건 어디까지나 몇 백 년 전 당신이 지닌 모습이니.”

“…….”

“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했죠. 원망도 증오도 사랑도… 많은 감정들이 퇴색해버리기에는 좋을 만큼 긴 시간이네요.”



몇 백 년이라는 수식어로 뭉뚱그리며 재단해버리는 건 그의 안 좋은 습관이었다. 언뜻언뜻 비춰지는 그의 태도만 놓고 보면 예전처럼 루치오가 파가니니에게 집착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몇 세기 동안 당신 주위를 맴돌며 지켜봐온 내 시간은 모르면서. 지층의 몇 겹처럼 단단히 쌓인 감정을 토해내면 감당하지도 못하고 도망칠 거면서. 이쯤 되니 눌러둔 제 마음을 모르는 게 원망스러워 루치오는 입술을 꾹 물고 손에 쥔 성경책과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선반에 올려뒀다. 어디까지 나를 시험하려 드는지. 아래로 내리깐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격양된 감정을 가다듬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청년의 말을 긍정하듯 정적이 이어졌다. 아니, 마음에 지핀 불길은 사그라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루치오의 입술이 사고를 앞지르며 달싹였다.



“개인의 생각을 보편적인 것 마냥 일반화하듯 말하는 건 그만 두세요. 저는 당신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으니까요.”



부인하는 목소리는 재판장에 서서 대답했던 때처럼 단호했지만 화를 삭이는 모습이 역력했다. 굳어진 루치오의 얼굴을 보며 금발의 청년이 이크… 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뒤늦게 뭘 그렇게 열을 내나며 땀 좀 식히라고 손으로 부채질을 해왔지만 루치오는 선의가 담긴 손길을 쳐냈다.



“아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죠. 당신이 당신 입으로 저에게 해답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실력이 전과 같지 않다고.”

“아… 그래도 사제님을 홀릴만한 연주 실력은 갖추고 있는데요. 일단은 바이올린 전공이고 지금은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내용과 달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나무라는 듯이 말한 것도 아니었건만 루치오가 음악에 대해 말할 때면 그는 어째서인지 시선을 회피하며 저자세로 나왔다. 본인의 실력이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자격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다 한들 그 연주로 루치오라는 한 사람은 손쉽게 집어삼킬 거면서.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루치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면서. 당신은 정작 저에게 들려주는 걸 싫어하지 않습니까.”



9번째 세계는 루치오 아모스가 파가니니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유일하게 그의 음악을 듣지 못한 세계였다. 콘서트에 가겠다고 하면 그는 컨디션이 안 좋으니 별로일 거라니 뭐니 늘 핑계를 대며 루치오가 오는 것을 거부했다. 일정을 뒤늦게라도 알아내 표를 사려 찾아보면 전석 매진이라 루치오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남들도 멀쩡히 다 듣고 있는데 왜 나는 그 좌석 하나 구하질 못하는지? 루치오에게 그의 음악은 다른 의미로 신과 닮아 그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은근슬쩍 떠봤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말만 번지르하게 늘어놓을 뿐 음악에 대해선 입에 올리지 않았다. 참다 참다 역차별적인 대우에 짜증이 솟아 암표를 살까 생각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은 불쾌한 자가 가물가물 떠올랐다. 그 인간만 아니었으면 파가니니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일도 없었는데. 처음 시작을 잘못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고쳐놓을 수 없는 옛 기억이 루치오의 발목을 잡았다.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나듯 얼굴이 펴지지 않는 루치오가 꽤나 험악해 보였는지 금발의 청년이 한참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뗐다.



“… 기억이… 방해를 하네요. 생각보다 힘들다고요. 지금의 신부님이 한 게 아니란 걸 알아도.”



의외의 말에 루치오가 잠시 멈칫했다. 그간 왜 저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걸 꺼려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금까지는 생을 반복하면서 파가니니와는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지금은 그러고 나서 처음 만나는 것이었으니. 루치오는 변명 대신 수긍했다.



“제가 미처 생각이 짧았군요.”

“신부님 때문에 무대공포증도 생겼어요. 알면 됐습니다.”

“이건 인과관계가 옳지 못하군요. 근거도 없이 타인의 탓인 양 책임을 전가하는 건 바람직한 행동이 아닙니다.”

“와. 이제는 정말 올바른 하느님의 사제가 되셨군요… 하나 빼고는.”



청년은 짐짓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며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루치오를 제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방심한 탓에 균형을 잃으며 힘에 따라 이끌려졌다. 루치오가 금발의 청년 위로 몸이 무너지려는 걸 다급히 상대의 몸을 피해 무릎으로 침대를 딛고 팔을 뻗어 짚었다. 수단 밖으로 흘러나온 십자가 목걸이가 허공에서 출렁이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루치오가 동그래진 눈을 크게 깜박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땐 제 눈높이와 맞는 상대가 제 그림자에 온전히 잠겨 웃고 있었다. 또 시작인지. 루치오가 잠시 눈을 감으며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오해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으니 정정하고 가야겠군요. 동성애가 딱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가 사람들이 축소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죠. 신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애당초 그런 구절이 없으니 죄를 짓는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닌데. 찔리는 거라도 있어요? 가끔 보면 신부님은 저에게 간접 고백을 잘하시네요. 사랑한다는 말은 잘 하지도 않으면서.”

“…….”

“루치오 아모스 신부님.”



청년의 손이 이제는 십자가가 그려지지 않은 손등 위를 더듬거리더니 제 손을 겹쳐왔다. 루치오의 시선이 따라갔다. 닿아오는 온기는 그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것들이라 낯설고 따듯했다.



“당신에게 저는 어떤 모습인가요?”



루치오는 청년을 바라봤다. 자신의 바람이 닿으면 오히려 더 갈망하게 되는 건 왜인지. 한 사람만의 형상을 비추던 루치오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부드럽게 휘었다. 적안이 보기 드물게 온화했다.



“천사를 닮았죠. 외양은 이미 그들이 상징적으로 그려지는 모습과 다를 게 없군요.”

“와… 사탕발림을 이렇게… 정말 뻔뻔하시네요? 몇 백 년 전이랑은 완전히 다른 말을!”

“계속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연도를 들먹거리는데… 엄연히 다릅니다. 저는 당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더 말하지 않았나요?”

“흐음… 당시의 저는 악마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아예 매장 당했는데.”

“…….”

“뭐. 이 정도 요구하는 건 애교 아니겠어요?”



루치오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서 청년이 샐쭉 웃었다. 이 쯤 되면 요망한 건지 요물인 건지. 다루기 어려운 현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난감해하기에 청년은 손을 뻗어 루치오의 양 볼을 집고 가로로 늘렸다. 제지를 하러 들지는 않아 단정한 얼굴이 그의 힘 따라 볼살이 옆으로 늘어나며 퍼졌다. 옷 아래는 수단을 입어 다소곳하고 거룩한데 어울리지 않게 우스웠는지 푸훕, 웃음이 터졌다. 이거 너으십시어. 본인은 진지하다는 듯이 말을 하는데 발음이 새는 게 더 가관이었다. 웃으며 놓아주자 루치오는 아픈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제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아직도 제가 악마처럼 보이나요?”

“정말 뒤끝이 심하시군요.”

“대답해주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아이 흉내라도 낼까요?”



어리광을 부리는 양 확인을 재촉하는 말에 루치오는 망설임 없이 허리를 굽혔다. 얼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시선이 가까워지자 서로의 눈동자에 담긴 상대방의 형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제 영혼을 홀린단 점에서는… 틀린 말도 아니군요.”

“이 정도면 귀여운 악마 아니겠어요?”

“퇴치해드리죠. 회개할 각오나 하세요.”



흰 손이 흐트러진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리 피부를 매만져오는 손이며 저를 바라보는 적안은 적나라해서 금발의 청년이 소리 없이 응수하듯 웃었다.



“다음에 초대권 줄 테니까 보러 와주는 걸로 봐주는 건 어떠…”

“기각. 전 제가 표를 사서 보러갈 겁니다.”

“흐응, 열성팬이라 무서운데…”



뻔뻔한 상대의 입을 틀어막듯 루치오는 살짝 벌어진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혀가 얽히자 더 종용하는 것처럼 금발의 청년은 루치오의 목에 팔을 걸어왔다. 루치오는 자신이 무엇을 원했던 건지 여러 번 생을 반복하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당신의 등에 어떤 색이 되었든 날개가 돋아난다면 망설임 없이 꺾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걸 당신은 모르겠지요. 내 품안으로 당신이 떨어질 수 있게. 천사든 악마든 그 명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갖는 감정의 무게가 어떤지 루치오는 영영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끌리는 건 만유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마땅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니. 루치오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침묵의 정당성을 지키며 손을 움직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그토록 원했던 것에 닿을 수 있었다. 다신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루치오는 다른 손으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맞닿는 살갗으로부터 느껴지는 체향과 체온이 실로 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