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 결말 이후 시점. 스포일러 포함.
올리버클레어, 올리버+제임스. 올리버 시점.
왜 제임스가 저를 이 곳으로 보냈는지, 떨어뜨리려 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클레어의 마지막 순간에는 제가 곁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수명을 다해 작동을 완전히 멈추면 클레어는 제 방인 531호에 자신을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자신과 만났던 기억을 전부 지울 것을 약속했습니다. 전처럼 몇 가지 기억해도 좋을 것들을 알려주고는 그 외 나머지 기억들은 초기화를 꼭 하라는 말을 당부처럼 남겼습니다. 헬퍼봇이 하는 마지막 말도 유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임종 전의 사람들 곁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임스도 분명 그 순간을 겪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이별은 하기 위해 보내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힘든 거니까요. 작용과 반작용 같은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제 친구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해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감정들을 그녀를 만나고, 그녀를 보내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정은 왜 이렇게 많이 탑재된 것일까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구식 모델에 지나지 않는 헬퍼봇5인데 말이에요. 그녀를 만나고 나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는 알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습니다.
원래는 클레어 혼자서 끝을 맞이하고 싶어 했지만 제가 싫다고 우겼습니다. 그녀는 몇 가지의 약속을 제게서 받아내고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 약속은 잔인했지만 클레어가 꺾을 의지를 보이지 않아 결국 알겠다고 마지못해 약속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사랑의 마지막을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클레어는,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눈물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다 입술을 맞췄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입맞춤이 되겠지요.
헬퍼봇의 끝을 처음 봤습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배터리가 방전된 모습과 같은 모습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분홍색 담요를 그녀의 무릎에 덮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보내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녀의 마지막 기억 속의 저는 어떤 얼굴로 저장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기록이 되었는지 묻고 싶어도 부재중이네요. 벌써부터 묻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아서야. 눈물이 계속 같은 자리를 적셔 담요가 마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클레어와의 약속을, 저는 곧바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ㅡ 밝은 우비를 쓰고 병을 모으지 않아도 돼.
클레어의 말을 기억하고 우비를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색이라 낮에도 병을 모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들키면 어떨까 싶었지만 고작해야 병을 줍는 안드로이드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동안은 많은 기억들이 괴로워서, 배터리가 바닥나서 멈춰버리지 않을 선 안에서 병을 계속 모아서 팔았습니다. 동전이 점점 많아집니다. 오른쪽 팔꿈치는 전보다 연결부가 느슨해진 건지 너덜거려 가끔 툭 늘어지는 바람에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프지는 않습니다. 관절을 감싸고 다른 손을 움직입니다. 저에게는 돈을 모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커튼을 열어 햇빛을 들이자 밝은 빛이 그녀를 덮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녀는 담요를 덮은 채 제 방의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음악을 틀었습니다. 우리는 왜 사랑했을까, 1941년 5월에 암스테르담에서 녹음된 LP판이 돌아갑니다. 클레어가 신기해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제가 그녀의 손을 잡아도 제 손을 잡아주진 못하지만.
사람은 죽으면 땅에 묻히지만 헬퍼봇들은 이 아파트의 작은 제 방이 곧 무덤이 됩니다.
저희들의 안식처인 그 곳에서 혼자 수명이 다할 그 날까지.
당연한 전제가 쓸쓸하다는 사실을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임스가 데리러 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해봤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그 이후에는 클레어와 지내느라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도 있겠지요.
아직 그래봐야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남겨진 기억이 너무 아려서 이대로 기억을 지우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합니다. 노을에 물든 눈이 감긴 클레어의 얼굴을 보면서 제임스가 남긴 LP판을 들을 때면 이상한 생각들이 몰려옵니다.
제임스의 무덤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제주도가 본가였으니 그 쪽에 무덤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닐 가능성도 30% 정도 되겠지만 그건 그 이후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실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건 클레어로부터 배운 것이니 분명 더 나은 선택이 될 거에요. 교통수단을 갈아타며 제주도를 헬퍼봇5가 혼자 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고, 로봇인 것을 들키지 않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겠지만 미뤄봐야 좋을 건 없겠지요. 신호가 약한 와이파이를 열심히 잡아 제주도로 가는 방법을 검색했습니다. 오차범위를 가정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가장 저렴한 교통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전보다 분명 동전을 모으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차비는 왕복으로 두 배를 계산해둬야 했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머물 생각이 아니었으니까요. 이제는 돌아와야만 했죠. 제 방으로, 그녀가 잠든 이 방으로.
목표가 있다는 건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건 슬픔을 제법 견디게 해주었습니다. 제 수명은 550일에서 850일 남았습니다. 그 동안은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습니다.
클레어의 조언은 늘 그렇듯 도움이 되었고 전에 모아둔 병과 8달 동안 모은 병으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오른 팔이 자꾸 미끄러져서 걱정입니다. 사람처럼 보이려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편이 눈에 띄지 않으려나요. 이번에 짐은 배낭에 최소한 간소하게 꾸렸습니다. 충전기와 옷 몇 벌, 유리병 2개, 그리고 여행 자금. 휴대용 충전기가 불안하기는 했지만 숙소에 머물 계획을 잡아뒀으니 괜찮겠지요.
“집과 클레어를 잘 지키고 있어야 해. 알았지, 화분?”
화분을 여행의 동반자로 데려가려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클레어 혼자 남게 되니까. 화분이 곁을 지키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녀 곁에 나뒀습니다. 직사광선을 쐬지 말라는 말 따라 커튼을 쳐뒀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일주일 안에 올 수 있을 테니, 화분에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과 클레어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름이라 걱정되는 감이 없잖아 있어 평소보다 물을 많이 줬습니다. 며칠간 힘내라고 화분에게 말을 하고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여전히 제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시선을 떼기가 힘겹습니다.
“금방 돌아올게. 클레어.”
문을 닫았습니다.
방 밖으로 발을 뗐습니다. 팔꿈치 한 쪽은 뻐걱거려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지만, 크게 지장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늘 그래왔으니까요.
제주도까지 가는 여정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겁을 먹는 일이 줄어들어서일까요. 아니면 일정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서일까요? 배터리의 충전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중간에 머물 때마다 여관이나 모텔에서 계속 충전을 했으니까요.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여름이라 해가 쨍하지만 그만큼 푸른 바다로부터 반사되는 빛이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클레어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생각을 하면서 발을 옮겼습니다.
반겨줄 이가 없는 제임스의 집을 다시 가기는 뭐해 와이파이로 검색해 제주도 그 주변의 무덤이 있을 만한 곳들을 찾았습니다. 만약 화장을 해서 바다에 흘려보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제임스는 서구 문화에 친숙했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임스의 가족들에게 기일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그 때는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게 분명합니다. 지도로 체크를 해두고 와이파이와 사람들에게 물어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시기를 맞출 수 있어 다행입니다. 6월이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던 반딧불을 같이 봤던 날이 제작년 여름 6월.
지도를 보며 그녀와 갔던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클레어랑 같이 다시 오고 싶었는데 오지 못한 것이 슬퍼질 줄 몰랐습니다. 반딧불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곁에 클레어는 없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점점이 작은 빛이 밝아왔습니다. 우거진 초록의 숲 사이에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 있었습니다. 불빛들이 어둔 숲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녀와 처음 봤던 제작년의 그 날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 때 봤던 반딧불들은 아니겠지만 클레어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녀가 이런 제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말을 할까요? 한심하다고 그럴까요? 아니면 괜찮다고 그럴까요? 늘 그랬지만 유독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날입니다.
뚜껑이 열린 유리병을 한 개씩 놓아 반딧불을 한 마리씩 병 안으로 들였습니다.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 손을 덮어 뚜껑을 닫습니다. 두 마리의 반딧불이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전구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가방에 챙겼습니다.
그 다음 날, 제임스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제임스의 집과 가까운 곳부터 먼저 묘지를 찾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제주도라는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작아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리운 이름이 묘비에 적혀있었습니다. 돌아가셨다는 자각은 그때서 느껴졌습니다. 머리로 전해 들어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근처에서 파는 흰 국화꽃 한 송이와 반딧불이 담긴 병을 그의 무덤 앞에 뒀습니다.
“제임스.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찾아 왔어요. 늦게 와서 미안해요. 이건 제 선물이에요.”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있었습니다. 초여름인 까닭인지 밤은 생각보다 바람이 시원합니다. 병 속에 갇힌 반딧불의 불빛이 점멸하는 전구처럼 밤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밤은 흔히들 사람들이 무섭다고 하는데, 안드로이드는 귀신을 볼 수 없을까요? 왜, 외국 문화 중에 할로윈이라는 날에는 죽은 사람들이 유령으로도 돌아오고는 한다던데. 제임스가 예전에 이야기 해줬던 기억이 있어 생각이 나네요. 한국도 제사를 지내는 날에는 영혼이 돌아온다던데.
내 주인이자 친구인 제임스. 그가 남겨줬던 음악. 방에 있는 턴테이블을 들고 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임스가 남긴 LP판과 좋아했던 음악을 그랑 같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아니면 역시 무리해서라도 차를 빌려 연습이라도 했어야 했을까요? 그러면 같이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제임스는 이해해줄 거라 생각합니다. 머릿속에서는 몇 백 번은 넘게 재생했던 음악이 귓가에 흐릅니다. 제임스가 좋아했던 것들.
밤하늘에 별이 반짝입니다. 내 친구가 좋아했던 것들. 제임스. 당신은 병 때문에 많이 아파했을까요? 제가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저를 생각하면서 많이 괴로웠을까요. 그래서 저를 헬퍼봇들이 모인 그 아파트에 보냈던 거겠죠. 클레어를 사랑하면서 저는 제임스가 그곳으로 저를 보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그 감정들을. 귓가에서는 여전히 기억 속의 LP판 소리와 매미 소리가 흐릅니다. 머리카락이 흩날려서 시야를 가리는 게 조금 귀찮지만 야외에서 듣는 음악 같아 나쁘지 않습니다. 무덤 앞에 올려둔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반딧불을 다시 하늘로 되돌려 보내줬습니다. 빛이 무덤 주위를 아롱거리듯 빛내며 맴돌다 날아갑니다. 제임스도 반딧불을 좋아했겠죠? 제 마음과 선물이 닿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해주겠죠. 착한 우리 올리버. 고맙구나. 그러면 저는 그 온화한 미소를 보며 대답하겠죠. 천만해요!
모텔에서 하루를 꼬박 묵었습니다. 휴대용 충전기로 하루 종일 풀 충전을 해야 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밖에서 있었습니다. 추위를 타지도, 더위를 타지도 않지만 헬퍼봇들에게 방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반딧불 한 마리가 담긴 유리병을 가지고 다시 헬퍼봇 아파트로 돌아갔습니다. 여정은 길고 새로운 환경에 신경을 잔뜩 쓰느라 지쳤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클레어의 말대로 구식 헬퍼봇들에게 큰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지나가던 할머니의 짐이 무거워 보여 대신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청년, 고맙구려.” 그 말에 저는 “천만해요!”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정말 좋은 기분이에요.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와 그리운 방문을 열었을 때, 잠든 그녀와 화분이 있었습니다. 커튼을 치자 빛이 들어와 제 작은 방을 밝혔습니다.
“화분, 그 동안 잘 지키고 있었지?”
인사를 건네며 클레어에게 다가갔습니다.
“돌아왔어. 클레어. 미안해. 혼자 둬서. 이건… 선물.”
배낭 속에서 꺼내 그녀의 품 안에 반딧불이 담긴 유리병을 안겨줬습니다. 노란 빛이 반짝입니다. 반딧불의 수명 기간은 고작해야 두 달이라서. 생명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녀의 남은 시간처럼. 그녀가 눈을 감기 전 그녀가 데려온 반딧불은 하늘로 날아갔지만 수명을 다해 죽었고, 그녀 역시 깨어나지 못하는 잠에 빠져 있습니다. 잠든 클레어의 무릎 위에 반딧불이 담긴 유리병을 올려둡니다. 그리고 손을 덮어줍니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이니까. 실은 그녀가 눈을 감기 전에 주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클레어와 함께 제주도에 한 번 더 가고 싶었습니다. 그 때 클레어는 신체의 많은 부분들이 연결되지 않아 구동하지 않았고, 자칫하다 더 빨리 연소될 뿐인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주도 여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를 운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작년에 후회했던 것이 그거였던 것 같아요.
소중했던 친구와 연인이 사라지고 난 다음. 무엇을 해야 할 지 전부터 한참 생각하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거의 전부를 이뤘습니다. 저는 친구의 무덤을 갔고, 제 연인에게 가장 주고 싶었던 선물을 전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가 있네요. 클레어와 한 약속을 지키는 것.
화분이 걱정입니다. 이 화분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너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니? 화분.”
물어봅니다. 물을 줄 상대가 없어진다는 건 큰일인데.
그래도 마음은 정했습니다. 이제 남은 수명은 300일에서 600일. 내구성이 좋으니 600일을 꼬박 채울지도 모르지요. 이대로 부식되어가기를 기다리기엔 남은 시간이 아직도 기네요. 그녀의 손을 잡는 손이 점점 닳아가고 그녀의 신체 부품들이 하나씩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녀에게는 기억을 지웠다 말하며 주위를 맴돌며 바라보던 그 시간 동안. 남은 시간이 서서히 줄어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왜 제 수명은 그녀와 같지 않은지를 생각했습니다. 생각은 클레어를 보며 늘 해왔던 것이고, 저는 계획을 짜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걸 좋아합니다.
선을 연결합니다. 마지막으로 메모리가 저장된 것들이 세 시점 있습니다. 클레어를 만나기 전, 클레어가 눈을 감고서 일주일이 지난 날, 그리고 최근 제주도에 다녀온 기억과 클레어에게 반딧불을 선물했던 날이 포함된 3일 전.
제임스에게 선물로 받은 LP판을 올리고 음악을 틉니다. 우린 서로 왜 사랑했을까.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클레어의 옆에 앉았습니다. 화분을 오른 손으로 안고 그녀의 옆에서 그 음악을 듣습니다. 늘 하는 일상입니다. 음악이 멎고 TV로부터 영상이 나옵니다.
“아침 뉴스.”
- 오늘 서울 메트로폴리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겠습니다. 최고기온은 28도, 여름인 만큼 외출하는 시민들은 일사병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일사병을 조심하래. 들었지? 화분. 햇빛을 너무 오래 쐬면 좋지 않아.”
일기예보의 익숙한 아나운서의 얼굴과 음성이 들리고 습관처럼 따라 화분에게 말을 겁니다.
“안녕, 화분. 그 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왼손으로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오른 팔을 잘 고정시키곤 화분을 단단히 끌어안습니다. 그리고는 왼 손을 뻗어 닳은 클레어의 오른 손을 잡습니다. 놓지 않을 것처럼 깍지를 꽉 낍니다.
모든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제 더는 슬프지 않은 날이 되겠지요.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동시에 전부 선택합니다. 내구성이 제아무리 좋다 해도 구식인 안드로이드입니다. 과부하로 인해 버퍼링이 걸립니다. 정확하게 같은 속도로 세 선택지를 눌렀으니 그 어떤 것도 선택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호는 일정하고 그 어떤 것도 예외는 없습니다. 과열된 신호. 지지직, 전기선들이 마찰해가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자초해서 앞당기는 헬퍼봇들이 있을까요? 그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클레어와의 약속은 지켰습니다. 저는 초기화를 시도했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단락마다 끊깁니다. 당연하죠. 오류로 작동이 멈춰가고 있으니까요. 아, 한 가지는 어기겠네요. 제가 그녀랑 함께 있고 싶단 욕심이 그녀를 그녀의 방에 홀로 두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이건 제 욕심입니다. 그녀를 혼자 나두고 싶지 않고, 저 또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 그래도 이건 용서해줄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그녀가 저를 혼내러 오겠죠? 신기하게도 기억은 흐릿해지긴 커녕 너무나도 제 안에서는 선명해 저를 행복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드네요. 신경 회로가 하나씩 끊어지자 몸이 덜덜 떨립니다. 전혀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이대로 아마 몇 분. 버티지 못할 것을 압니다. 제 안의 회로는 전부 타들어가 끊어지겠죠.
창문 너머 보이는 풍경을 바라봅니다. 해가 들어오네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저의 안식처였던 방 안. 이제는 저와 클레어의 무덤이 되겠네요.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를 합니다.
이게 제 생각의 마지막 기록이 되겠네요.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제임스와 클레어와 함께 있는 꿈을요.
제 친구와 제 연인과 제주도에서 반딧불을 보며 야외에서 레코드 음반을 듣는 그런 꿈을요.
어쩌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지직, 눈이 감겨옵니다. 음악 소리가 들려옵니다. 지금 턴테이블에서 흐르는 음악은 우린 왜 사라ㅡ
작년 앵콜 무대로 자첫을 했을 때는 올리버가 혼자 남겨지고서 남은 인생을 겉으로는 평소처럼 살아가는 일상을 생각했는데, 올해 공연을 보고 나서 생각하는 건데 저 남은 시간 동안 올리버는 어떻게 지냈을까... 클레어와 올리버의 수명 차이인 2년이라는 시간은 혼자 남겨진 그에게는 긴 시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올리버는 기억은 초기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더 안타까운 것 같고... 그래도 마지막 유언이라면 지키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의 기억이 지워지는 걸 견딜 수 있을까. 나는 그 상황에서 생각한 것이 자살일 거라 생각한다. 로봇들에게 자율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기능을 주지는 않을 것 같다 생각해서 스스로 자기 파멸을 생각해야만 했지만. 좀처럼 프로그래밍 되어져 있지는 않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돕기 위한 헬퍼봇이니까. 아마 남은 시간 동안 그냥 살아갔을 것 같기도 하다. 기억들을 모두 끌어안고.
대본집을 읽는데 헬퍼봇 아파트는 죽어가는 시한부 로봇들을 위한 것이라는 걸 보고서 결국 낡아빠진 헬퍼봇 아파트의 방은 헬퍼봇들의 무덤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졌던 것 같다. 실제로 클레어 넘버에서 '끝까지 끝은 아니야' 들을 때마다 '정말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이 찾아오면 조용히 눈 감겠지' 그 부분 들을 때마다 먹먹하다. 어햎 극은 초반 우체부 아저씨 부분부터 슬픈데 외로움과 슬픔, 고독, 위로의 정서를 너무 사랑해서 극이 너무 아련하게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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