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8. 00:40

그의 존재는 내 삶에 큰 획을 그었고, 나는 그에게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했네.





… 마에스트로, 살리에리?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추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예진 시야를 지우듯 눈을 깜박이자 흐릿하게 맺힌 상이 이내 선명해졌다. 시선을 내리니 자신의 몸 아래, 손가락 몇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차르트. 그가 누운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특별히 이상하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취기에 올라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려던 그를 잡아주려다 발이 얽혀 같이 넘어지게 된 것 뿐이었다. 그저, 그 뿐이었다.






성대하게 열린 무도회장에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인 살리에리가 발을 딛었을 때는 여인들의 각종 향수 냄새가 난잡하게 섞여 공기 속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걷자 웅성거림과 함께 여럿 시선이 따라왔다. 어머, 저 사람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잖아? 궁정의 유명한 작곡가이신.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에게 밀리지 않았어요?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모차르트 없었다면 그가 폐하의 기대를 받았을 텐데 말이에요.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파벌 중에 저 자도 들어가 있지 않겠어요? 술렁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로젠베르크경을 보니 모차르트를 모함하고자 하는 주도 세력일수도 있죠.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쉿! 그나저나, 저 자가 왜 여기에 온 거죠? 목소리를 낮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지만 살리에리의 귀에는 그들이 주고받은 속삭임이 전부 들려왔다. 가십거리의 대상으로 오르는 것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여기에 온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살리에리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몇 걸음 채 딛지 않은 시점에서 바로 취기에 한창 젖어있는 모차르트를 발견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화려한 옷차림으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에서 모차르트는 흰 피부가 상기된 채로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근심이란 단 한조각도 없어 보이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살리에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이 부풀려진 것만은 아니었는지 모차르트는 방탕한 삶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제 아무리 훌륭한 평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살리에리의 인식 속에 박힌 모차르트는 치기가 어린 젊은이에 불과했으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공연 상영을 앞두고 이렇게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였다. 피가로가 흥행했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긴장감이 없단 말인가? 정말로, 그 작품이 끝까지 무사히 성행할거라 생각하는지? 귀족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피가로를. 방향을 바꾸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대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제 자신이 갑자기 한심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에게 뭘 기대하고 여기에 온 것인지. 그대로 돌아갈까 하다 헛된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몰려왔다. 인사라도 하고 가는 편이 조금은 경각심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아, 살리에리는 심기 불편한 모습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모차르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차르트.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모차르트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옆 머리칼이 길었는지 백금발이 가벼이 휘날렸다. 시선이 맞았다. 그는 어딘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고 판단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모차르트의 표정은 뒤늦게 변했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호흡이 멎었다. 그의 눈이 고양이처럼 가늘어졌다.

 


… 안토니오… 살리에리.

 


얇아졌다 치켜뜬 눈동자에서 언뜻 경계심이 엿보였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저번에 처음 만났을 당시보다 발음이 꼬여있었다. 모차르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는 신호의 손짓을 표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따라 물러나듯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사라진 인파와 조용해진 공간을 확보하고서 모차르트는 아리쏭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째서, 여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살리에리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모차르트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해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휘청거렸다. 살리에리에게 다가가기 위해 모차르트는 다리를 움직였지만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 그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났고 이마에 손을 짚는 동작과 같이 모차르트의 몸이 기울었다. 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살리에리는 반사적으로 쓰러져가는 모차르트의 팔을 낚아채듯 잡았다. 마저 그의 허리를 팔로 받치려했지만 다리가 얽혔다. 헉, 이번에 목으로 삼켜지는 소리를 낸 건 살리에리였다.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면서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휩쓸려 넘어지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윽……. 누구라 할 것 없이 나지막하게 신음을 호소했다. 쉽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묻는다면 흔한 상황이었지만 상대를 생각한다면 자주 생길 법한 상황은 아니었다.

 


헉… 모차르트? 다친 데는 없습니까?

 


살리에리는 자신의 밑에 깔린 사람이 누군지 상기하고서 다급히 모차르트를 누르던 상반신을 일으켰다. 모차르트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에게서 와인의 향이 물씬 풍겼다.

 


Oui. 괜찮아요. 그보다, 저를 잡아주려다 넘어지셨네요.

이런… 실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오, 아니요! 천만에요. 살리에리. 당신은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나 싶어서요.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차르트의 눈이 살갑게 휘었다. 아까 전과 달리 얼굴엔 긴장이 풀려있었다. 살리에리는 호쾌한 목소리를 들으며 웃고 있는 모차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살리에리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무슨 소리를. 나는 당신처럼 경박한 사람은 질색이야. 별것도 아닌 행동을 호의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함을 넘어서 부아가 치밀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당신은 이제 곧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겠지. 피가로에 대한 소문은 조금씩 퍼지고 있고, 그 소문이 폐하의 귀에 닿는다면 자연스레 상영금지에 처할 거야. 그리고 나면 당신의 처지 또한 온전할 수 없을 테니. 각본에 짜인 하나의 극처럼 예정된 모차르트의 추락을 상상하니 이상하게도 환희보다는 연민이 몰려왔다. 당신은 그저 아름다운 곡을 만들고 싶었겠지. 실제로, 당신이 작곡한 곡은…….

 


그보다, 이제 비켜주지 않겠어요? 레이디들께서 오해를 하실 테니.

 


가벼이 농을 건네는 모차르트에게서는 부끄러워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리에리는 밀려오는 상념을 떨쳐내며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모차르트가 잠시 살리에리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모차르트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뻗는 행동이 더 빨랐다.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볼을 만지는 순간, 피부로부터 올라오는 쓰라림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흘낏 보니 왼쪽 볼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아까 넘어지면서 쓸렸었는지 살갗이 까진 자리에 피가 맺혀 있었다.

 


약을 바르는 편이 좋겠어요.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으니 대처가 빠르다면 흉이 지지는 않을 거예요.

 


오지랖 넘칠 정도로 상냥한 배려가 담긴 말을 하며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의 얼굴에서 손을 거뒀다. 그의 검지에 피가 묻어있었다. 그를 감싸려다 생겨난 상처가, 그로부터 생겨난 자신의 혈흔의 일부가, 그의 손에.

 


무슈. 이제 일어나주시겠어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살리에리의 손은 제 의지와 상관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모차르트의 목 위로 한 손을 가져다 대었고, 마저 다른 손을 가져가 흰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에 힘은 들어가지 않아 창백한 피부 위에 얹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상황은 의심할 여지만이 남아있었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자세였다.

 


… 마에스트로, 살리에리?

 


모차르트는 세간에서 음악의 천재라 불린 것과 달리 현재 이 상황이 어떤지 눈치 채지 못한 어린애처럼 눈을 깜박였다. 눈가의 화장 속에 남아있던 그의 눈을 살리에리는 한참 바라보았다. 한 점 티끌하나 없어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투명함을 내비치는 맑은 눈동자가 눈 밑의 보석보다 반짝였다. 빛을 흡수하듯 머금고 있는 그 눈동자는─ 태양이었다. 손에 닿지 않는 머나먼 곳에서 세상을 비추는, 맨 눈으로는 똑바로 마주할 수 없는 경외의 아름다움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신의 경지에 닿아있는 영역. 맨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아득한 심경에 눈이 부셔 살리에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 속에 투영된 자신을 마주하자니 느리게 목멤이 올라왔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재능이…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깊은 곳에 묻어둔 진심이 솟구쳐 올라 목 끝까지 말이 차올랐다. 허나 한 번 꺼내버리고 말면 제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가능성을 재단해버릴 것 같아, 살리에리는 금방이고 쏟아질 것 같은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심장부로 침전시켰다. 어중간하게 잘린 말 탓에 침묵이 고였다. 모차르트는 이어지지 않는 뒷말을 기다리다 목이 타는지 마른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파’에서 ‘라’로 올라갔다, ‘파’로 내려갔다. 손바닥에 모차르트의 호흡이 새겨졌다. 피부로부터 음악의 선율이 그려지자 그가 작곡한 악보가 또 다시 머릿속을 덮쳐왔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음표의 물결이 물고기 떼처럼 가상의 건반을 건들었고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조화가 머릿속에 선명할 정도로 찍혀져있었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소프라노의 고음이 가로질러왔다. 슬픔은 나의 운명이죠. 온 몸의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대를 떠나보내야 해요. 진득하게 뇌리에 달라붙어있는 그의 음악은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어 멜로디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 또 시작이야. 깨달았을 때는 그가 만든 음악이 회전목마처럼 주기적으로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지금껏 자기가 해왔던 곡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에 깃펜을 세게 움켜쥐었다. 검은 잉크를 찍고서 촉을 오선지 위로 가져갔을 때에는 한 번밖에 듣지 않았던 음악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머릿속을 돌고 돌았다. 사로잡힌 선율에 불협화음조차 끼어들 수가 없었다.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손이 멈춰 있는 사이─ 촉에 남아있던 검은 잉크가 오선지 위로 투둑 떨어졌다. 하나의 검은 얼룩이, 자신의 열등감을 대변하는 것 같은 잉크 자국이 종이 위로 번져나갔다.

 


살리에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서 살리에리는 자신이 생각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떴을 때는 모차르트가, 음악의 신이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수함이, 제 자신의 고뇌 따위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모습이, 그런 주제에 아무 여자에게나 키스를 날리며 경박스럽기 짝이 없는 난봉꾼이 거슬렸다. 자신만 초조함에 타들어가는 감각은 금방이고 목을 옥죄어 올 것 같아서. 금방이고 자신의 음악이 아닌 그의 음악으로 자신의 삶이 도배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자신의 음악 세계가 덧칠해질 것만 같아서. 지금껏 사랑해왔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뭐였는지 경계를 흐려버릴 것 같아서. 저항하듯 모차르트의 목에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요?

 


억양 없는 목소리를 흘리며 손에 마저 힘을 내리찍듯 주었다. 자신의 두 손에 갇힌 모차르트의 목소리가 단발마도 없이 끊겼다. 공기 마찰로 남아버린 스타카토, 맥박 치는 호흡이 32분의 1, 32분의 1, 32분의 1, 32분의 1, 16분의 1, 16분의 1, 8분의 1…… 음표처럼 목에 갇힌 호흡의 템포가 악보의 규칙을 지키지 못한 채 급격히 느려졌다. 자신의 손바닥에 잡혀 파르르 경련하는 눈과 몸에서 그가 살아온 생(生)의 격정이 느껴졌다.

 


Pardon.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천박스럽기 그지없는 당신이,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것이 경이로워. 인간의 경지에 있지 않은 당신의 재능이, 당신의 손끝에서 피어난 음악이 사방에서 덮쳐들어 나를 익사시키려 드는데. 그토록 아름다운 곡을 들으면 싫지 않아서. 소름이 돋아서. 살아있는 동안 이런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해서. 그렇지만 자신이 지금껏 생각해왔던 자신의 존재는 알 수가 없어져서. 비교를 하자니 제 자신이 한 없이도 초라해지고 남루해지고 말아서.

 


그러니… 죽어주시기를.

 


차단된 기도에 팔딱거리며 저항하려는 그를 있는 힘껏 짓눌렀다. 일그러진 표정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의 목소리와 비명 대신 그가 지은 음악이 머릿속을 배회한다. 천상의 선율과 소프라노의 소리가 고막을 장악한다. 그대를 멀리 떠나보냅니다. 이대로 그가 죽어버린다면. 음악의 신을 제 손으로 죽인다면. 피부의 뜨거움이 느껴지고 손바닥에 금방이고 잡힐 것 같은 숨과 맥박이 뛰는 약동이 요동친다. 고귀한 그의 재능을 제 손으로 거둬버린다면. 이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눈은 가느다란 핏발이 서있고, 갇혀버린 호흡은 애처롭다시피 처연해 금방이고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은 창백하다. 죽음의 장막이 드리운 것 마냥 그림자가 진다. 그가 갑작스럽게 닥친 현실에 저항하며 제 손등에 손톱을 세운다. 그의 손톱이 제 피부에 깊이 박힌다. 지휘하는 것처럼 그의 손끝에서 붉은 파도의 물결이 피어난다. 쓰라림이 희열로 음악과 함께 각인되는 고통을 살리에리는 제 손에 가득찬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잠잠해지더니 눈에 초점이 풀려갔다. 사신의 낫이 휙,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숨이 바스라졌다.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 호흡이 멎자 머릿속을 잠식했던 소리 또한 자연스레 사라지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아래를 바라보았다. 참수형을 당한 가련한 동백꽃마냥 모차르트의 머리가 꺾여있었다. 안식이 찾아든 정막 속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손끝을 보았다. 피가 맺혀있는 손톱 가운데 오른쪽 검지만이 엷게 핏자국이 스며들어 있었다. 시선을 옮겨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붉은 사선들만이 유일한 저항의 흔적처럼 여러 자욱 그어져있었다. 제 무능력의, 증거였다.

 

 

 



눈을 떴다. 식은땀이 한 가득이었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자 흐린 시야가 이내 또렷해졌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익숙한 방 안의 배치가 눈에 들어왔다. 푸르게 젖어든 방 안에 자신이 놓여있었다. 손등을 바라보았다. 흉터는 커녕 생채기의 흔적조차 없었다. 문득 저도 모르게 얼굴을 더듬었다. 왼쪽 볼에 손이 닿았지만 매끄러운 피부 위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흘러내리며 어깨를 조금 넘는 검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자다가 풀린 건지 머리끈이 침대 한 구석에서 뒹굴고 있었다. 차가운 물 한 컵을 따른 후 입에 가져갔다. 순식간에 서늘함이 식도를 타고 온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 꿈.

 


현실 자각은 뒤늦게 찾아들었다. 살리에리는 잠긴 제 목소리를 들으며 피로한 눈두덩 위로 손을 가져갔다.

 


… 악몽이야.

 


모차르트를 만난 이후로 수십번 반복되는 꿈에 해설 아닌 변명을 덧붙인다. 허나 그를 죽이려 드는 행위가 악몽인지, 그가 작곡하는 곡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악몽인지, 그도 아니면 그를 죽이지 못해 앞으로 몇 번의 좌절을 더 반복해야 하는 것이 악몽인지 살리에리는 알 수 없었다. 실은, 이 경험이 현실이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지. 자조하며 내뱉어진 자신의 목소리가 가증스러워 낮게 조소했다. 깨지 않는 현실 속에서 유일한 도피의 수단인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잠들 수 없던 꿈속에서마저 들었던 멜로디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그의 숨통을 옮아 맸던 두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의 흔적으로 강박증에 전염된 손이, 신의 근처에 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손가락만이 심하게 떨려왔다. 









160411 플로살리+미켈모차. 백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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