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연구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어느 날의 이야기.

ㄱ명렬 ㄷ의신 ㅂ케이. CP보다는 조합에 가까운 일상물.



어떤 대상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심도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정도는 어디까지일까. 의신은 어릴 적부터 제가 의문을 느끼게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고 온 신경을 다 기울이곤 했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이 소홀해지기 마련이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 생각해버리는 탓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기는 경향이 있었다. 한 마디로 맹목적인 기질이 있었다. 남들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하나를 파고들면 끝장을 보는 성격 탓에 그의 별명으로 괴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연구자라는 타이틀은 그런 의신의 성격에 적합이기는 했다. 의사라는 직함과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 없었지만.

 


이 몸으로 환자를 진료하겠다는 거 아니지? 지금 형이 환자거든요?”

 


청진기로 가슴을 짚어 소리를 듣다 넓적한 은색의 막대로 혀를 눌러 목구멍을 확인하더니 입에 체온계가 물렸다가 이내 거둬진다. 마주하고 있는 고운 얼굴은 언짢은지 미간이 퍽 찌푸려진다.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체온계에 표시된 온도를 확인하고는 내 이럴 줄 알았어, 제 몸 관리도 못하면서 의사는 무슨.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명백하게 비아냥거리는 소리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라 의신은 드물게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한다. 요 며칠 잠을 못 잤다 싶은 것 때문에 머리가 무거운 줄 알았는데 온몸이 한기가 든 것처럼 춥다. 감기 몸살기가 있으려나, 조심해야겠네. 평상시였다면 미연에 방지한다고 미리 약을 먹었겠지만 K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밝혀지는 연구 결과가 나날이 흥미로웠던 나머지 제 몸 상태가 어떤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몸이 평소와 좀 다른 것 같단 감각은 있었지만 별 생각 없이 넘긴 게 화근이었다.

유독 몸이 늘어지듯 쳐지는 것 같아 기숙사 방 책상에 팔을 포개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놀러온 사람은 명렬이었다. 간만에 의신을 본 명렬이 어어, 의신이 형!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반가움을 표했지만 잠에 든 의신의 의식은 바깥세상과 차단되었으니 손님이 누가 왔는지 알 리가 없다. “이럴 거면 침대에서 자. 불편하게.” 시무룩한 기분을 숨기고 명렬이 말을 건네며 어깨를 흔드는데 불규칙적인 호흡소리가 들렸다. 코를 고는 것도 아니고 어딘지 앓는 소리가 흘러 이상함을 감지한 명렬이 의신의 이마를 짚었을 때는 열이 들끓고 있었다. ? 의신이 형잠에 든 의신을 억지로 깨워 비몽사몽한 의신을 붙들고 급한 대로 명렬이 진찰에 들어간 게 지금 상황이었다. 명렬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요즘 수업도 자주 빠져서 얼굴 보기도 힘들고. 밥은 제대로 먹긴 해?”

먹고 있어. 너무 걱정은 안 해도

 잘 챙겨먹고 있다고?”

 


눈이 얇게 가늘어지더니 갑자기 흰 얼굴에 비웃음이 번진다. , 이런, 잘못 건드렸어. 주먹을 쥔 손이 떨리는 걸 보면서 명렬이 화를 삭히는 게 느껴져 의신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형 얼굴이 어떤지 보기는 했어? , 지금 완전 홀쭉해졌거든? 얼굴이 반쪽이 됐어. 수척해진 정도가 아니라. 눈 밑은 완전 퀭하고. 거울 줄 테니까 형 얼굴이나 보고 다시 말해, 거짓말을 할 거면 티 안 나게 하던가.”

 


평소 같았음 시끄러우니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차트로 머리를 내리쳤을 것을, 의신은 명렬이 조목조목 따져가며 꿍얼거리는 핀잔을 듣는다. 내 불찰이 맞긴 하지. 좀처럼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하다 힘이 빠지고 고개가 꺾여 이마를 짚는다. 명렬이가 제게 열이 난다고 그러더니 정말로 머리가 어지럽다. 이 정도 상황에 이르기까지 몸을 방치한 줄도 모르고 혹사시켰는데 본인 자각이 없다는 건 다른 의미로 신기하다. 신경을 어디다가 두고 다니는 건지. 이 경우 속이 타들어가는 건 당사자보다는 지켜보고 있는 사람 쪽이다. 그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렬의 말이 끝나자 의신이 나지막하게 입을 연다.

 


의사로서 내게 충고하는 거라면 조심해야겠다. , 너무 감정적이야.”

뒤의 말은 형의 동생으로서 충고하는 거네요!”

 


조언이랍시고 한 말이었건만 신경이 예민해진 명렬은 날카롭게 되받아친다. 저 성격도 좀 죽여야 할 텐데. 누구 때문에 저러는 지 뻔히 알면서 의신 혼자만이 태평하다. 명렬이 의신에게 콜레라라는 병명 하나 제대로 못 외웠다고 타박을 받긴 해도 명렬 역시 경성의전 학부생인지라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의거한 의학 정신과 기본적인 의학 지식은 갖추고 있다. 명렬이 선반 위에 진열된 알약 병들을 살펴보더니 라벨에 적힌 성분을 신중히 보면서 골라내고는 약을 조합한다. 그리고는 의신에게 알약 몇 알을 건네준다.

 


언제는 예방이 중요하다면서 자기 몸 관리 하나 못해서야. 지금 형에게 필요한 건 다 넣었어. , 여기.”

 


입은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명렬은 의신에게 물 한 컵을 같이 건넨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명렬의 배려라는 것 정도는 안다. 의신은 얌전히 명렬에게서 알약을 받아들어 잠깐 쳐다보더니 그 중 한 알은 골라내 책상 위에 나둔다. 물 한 모금과 손에 들린 다른 알약은 전부 삼키고 알약 하나만 남겨두자 가는 눈이 이내 동그래진다. 제가 잘못 처방했나 싶어 명렬이 재차 해당하는 알약 병에 적힌 성분을 유심히 다시 살펴보다가 제대로 꺼냈는데? 당황한 눈으로 약병과 의신을 번갈아 쳐다본다.

 


, 잠깐, 그걸 왜 빼? 그 약이 가장 효과 직방인데?”

수면 성분이 들어가 있잖아. 지금 잘 수는 없으니까. 나머지만으로도 충분해.”

.”

 


알고 있는 사람의 고집이 더 하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의신은 비척거리면서 일어선다.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 내려와 있어 지쳐 보이는 게 역력한지라 명렬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지금 잠을 자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명렬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서는 뭔지 알겠다는 듯이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K라는 사람과 만날 시각까지 얼마 남지 않았나보네. 명렬은 복잡한 얼굴로 의신을 바라본다.


, K라는 사람과 이제 만나지 마. 그 연구 때문에 지금 이 꼴이 되었잖아.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할 건 뭐가 있어. 나에게 비밀로 하고 있지만 나는 형이 뭘 연구하는지 알고 있어. 나를 믿고 차라리 같이 연구를 하면 안 돼? 아플 때 형은 좀 쉬고, 내가 일부 이어가면 되잖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더 의지가 되잖아. 아니면 내가 그렇게까지 믿음이 안 가?

 

명렬은 목 끝까지 차고 올라오는 말을 차마 그에게 건네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다시 가라앉힌다. 의신의 일상적인 균형을 이루던 천칭은 K라는 수상한 자를 만나게 되면서 이미 한 쪽으로 기울었다. 치우치진 지금 이 상태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어떤 효력도 들어 먹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잘못 접근했다가 의신의 연구 기록을 몰래 살펴봤다는 걸 들켰을 때 의신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저에게까지 숨기고 있는 걸로 봐서 의신에게 K와 관련된 연구는 중요하다. 그의 건강마저 무뎌지게 만들 만큼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에게만큼은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 기저에 깔린 불안감이 명렬을 괴롭힌다. 애써 떨쳐내려는 것처럼 명렬이 고개를 흔들더니 의신의 손을 붙잡아 그를 침대에 앉힌다. 기력이 별로 없는 의신은 명렬의 손길에 쉽게 이끌린다. 의신의 얼굴은 열 때문인지 평소 총명한 눈빛과 달리 몽롱하다. 의식만 희미하게 있을 뿐이지 제정신은 분명 아니다. 그러지 않고선 이렇게 순순히 따를 리도 없지. 명렬이 의신의 목을 살짝 뒤로 젖혀 물이 담긴 컵을 그의 입술에 기울이곤 책상 위에 남겨둔 알약을 입술 틈새로 밀어 넣는다. 갑작스런 명렬의 횡포라 하더라도 의신 역시 의사인지라 입에 들어온 물과 알약을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는다. 삼켜야할지 고민하듯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눈에 보여 명렬이 작게 웃다 크흠, , , 목을 가다듬으며 평소 제 톤과 다른 굵은 음성을 낸다.

 


담당의로서 한 마디 하지요. 오늘은 푹 잠을 자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래야 빨리 낫지 않겠습니까? 식사도 제 때 꼬박꼬박 챙기시고, 생활 습관 역시 규칙적으로 맞추는 편이 좋겠지요. 연구라는 건 뭐,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니 장기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점잖은 모양새로 풀어내는 말은 아주 청산유수다. 의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입 안에 있는 물 때문에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결국 의신은 입 안에 남은 알약 하나를 마저 삼킨다. 목울대가 움직인다.

 


잘 생각했습니다, 환자분.”

 


어린애 취급하듯 장난스러운 태도에 의신이 웃는 명렬을 노려본다. 약이 물에 녹아 쓴 맛이 남았는지 의신이 몇 번 콜록거리면서 입을 가리곤 헛기침을 한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기침소리에 명렬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진다. 사례 걸렸어? 목소리는 평상 제가 아는 동생의 음성이다. 건네는 말 속에 담긴 걱정을 읽은 의신은 괜찮다는 말 대신 고개를 젓는다. 침을 몇 번 삼키고서 의신이 입을 뗀다.

 


내 몸은 내가 챙길 수 있어. 그렇지만 의사로서는 합격이야. 환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처방한 걸 칭찬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는 괜찮으니 내버려두라고 하는데, 그대로 나두면 죽을 게 뻔히 보이는 사람이 형의 눈앞에 있으면?”

살려야지.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나도 형과 같은 생각이야. 그러니까, 난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고.”

 


명렬이 의신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는데 뿌듯함이 묻어난다. 형 따라서 의사가 되기를 잘 했네. 따라붙는 명렬의 말에 의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항복의 표시로 피식 웃는다. 그제서 명렬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묘하게 그 모습이 신나보인다.

 


형은 진짜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 생사 확인이 안 될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 열나는 지도 몰랐잖아? 의대생 수석이면 뭐합니까?”

 


아주 비꼬는 게 습관처럼 입에 붙었다. 저 얼굴을 보니 당분간 명렬이 이 화제를 우려먹을 것이 눈에 환해 의신은 포기한 것처럼 한숨을 내쉰다. 그러기에 누가 몸 관리 하나 못 하래? 예전에 의신이 명렬이가 아팠을 때 했던 말을 되갚듯 고스란히 돌려준다.

 


자기 몸은 자기 자신 밖에 챙길 수가 없다고 그랬으면서. 연구가 중요해도 그렇지, 형도 신경 좀 써. 의대생이 감기로 쓰러져봐라. 일본놈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게 뻔한데.”

 


명렬이 제 목에 걸린 청진기를 원래 있던 자리인 서랍 속에 집어넣는다. 의신을 침대에 눕히고서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고 옆에 혹시 모를 수건을 놓는다. 이불까지 덮어준 후에야 제 할 일을 마친 것처럼 명렬은 몸을 일으킨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자 명렬이 피식 웃는다.

 


나는 갈게. 푹 자고 내일 일어나면 열은 떨어져 있을 거야.”

 


문으로 걸어 나가는 명렬의 뒷모습은 앳된 얼굴과 달리 다부진 어깨며 등이 넓어 듬직하다. 제 뒤를 따라오던 꼬마가 언제 저렇게 컸지, 문득 의신은 옛 생각을 하고 만다. 기껏해야 체온이 몇 도 더 올랐다고 사고는 일정하게 흘러가질 않는다.

 


명렬아.”

?”

고맙다.”

뭐래.”

 


방문 앞에 선 명렬이 의신의 말에 눈이 잠깐 흔들리더니 시선을 떨어뜨리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머쓱한 얼굴을 한다. 아픈 형을 돌보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의신에게 칭찬을 받는 건 어쩐지 늘 부끄러운 듯 간질간질한 느낌이다. 의신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하며 불을 끄려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명렬아, 제 이름을 재차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용건이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은 의신이 중얼거린다.

 


불은 끄지 말고

 


전기세를 아껴야하니 절약해야 한다고 필요 없을 땐 꼭 방 불을 끄라고 하더니, 지금은 그냥 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니 말 속에 담긴 뜻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잠깐 자고 이따 일어나시겠다? 어림도 없지. 명렬은 의신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무시하고 불을 꺼버린다. 명렬아. 명렬아? 의신이 저를 붙잡듯 부르지만 명렬은 그저 싱긋 웃는다. 



주치의로서의 판단입니다. 얌전히 잠이나 자세요.



의신이 계속 명렬을 부르지만 명렬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다. 의신이 어두워진 방 안에서 골머리를 썩듯 눈가를 팔로 가리며 저 청개구리 녀석탄식을 내뱉으며 누워있을 모습이 상상돼 명렬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잠이 반 쯤 이미 온 것 같으니 굳이 몸을 일으켜 방 불을 켜려고 하지는 않겠지. 아플 때 푹 쉬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고. K라는 자는 알 게 뭐야, 그 사람도 나처럼 헛걸음을 당해봐야 해. 사소하지만 그간 의신을 찾다 허탕을 치게 만든 것에 대한 명렬의 작은 복수였다.


 

*

 


이 시각에는 방문자를 반기듯 늘 전등이 켜져 있었건만 오늘은 어둡기 그지없다. 눈에 쓴 둥근 선글라스 렌즈가 시야 색상을 바꿨기 때문만은 아니다. 눈은 빛보단 어둠에 더 익숙해 K의 시야는 선명했지만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기척을 죽이고 소리로 주위를 파악해보지만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상 감지는 없다. 신중하게 확인을 거듭하고서 K는 의신의 방으로 발을 들어선다.

 


!”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표해 기척을 내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희미하게나 숨소리도 익숙한 체향도 느껴지는데 어딘지 좀 서운해진다. 딱히 김의신의 환영 인사를 바란 건 아니야. 변명처럼 제 생각에 반박하며 의신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어가자 침대 위에 익숙한 사람이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있다. 안경은 침대 옆에 접어져 올려져있고 종이나 책, 펜이 있는 것도 아닌 걸 보니 무언가를 하다가 잠든 모습은 아니다. 요즘 잠이 부족해보인 것 같기는 했으니까. 많이 피곤했던 걸까. K는 제가 쓴 선글라스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깨우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며 K는 의신이 침대에 늘어져있는 모습을 본다. 저번에는 이상한 자세로 취침에 들더니 오늘은 평범하다멀쩡한 모습… 멀쩡하다? 그렇다고 하기엔 호흡이 고르지 않다. 흘러내린 것처럼 떨어져 있는 젖은 수건.

 


설마,”

 


드러난 이마 위로 장갑을 끼지 않은 맨 손을 가져가대자 지나치게 뜨겁다. 불길이 옮겨 붙은 것 같은 온도에 케이는 흠칫 놀라 손을 거두고 만다. 평소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걸 떠올려보면 의신의 몸 상태가 악화돼 열이 끓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책상 위에 약포가 몇 봉지 있었는데 의신에게 처방된 약이라는 건 지금 알았다. 병은 고칠 수 있다고 설파를 하고 다니더니, 그 당사자가 앓아누운 모습은 의외라면 의외다.

 


의사도 아프기는 하네.”

 


K는 한참을 침대 옆에 서서 의신을 내려다보다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들어 침대 옆으로 가져온다. 의신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두고 의자에 앉는다. 커튼이 쳐진 창가를 향해 손을 움직이자 커튼이 옆으로 젖혀지며 달빛이 들어와 은은하게 방을 밝힌다. 찬찬히 잠에 든 의신을 살펴보니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며 창백한 낯빛이 평소와는 명백히 다르다. 그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K는 알고 있다. 의신은 원체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경성의전 소속이라는 것도 그러했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느라 시간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그랬고,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K와 만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K는 의신에게 자신의 괴이한 증상은 고칠 수 없으니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의신과 지내는 그 시간은 K에게도 유일하게 제 자신이 사람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라. 제가 햇빛을 볼 수 있지 못하더라도 당장 의신과 같이 지내는 그 시간을 포기하지 못해서. 아득히 긴 시간 동안 쌓인 외로움을 허무는 그 온도는 망각 속에 남아있는 제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삶이자 희망이라서. K는 옆에 놓인 수건으로 의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곤 조심스레 손을 가져간다. 손바닥을 이마에 대자 열을 지닌 사람의 체온은 제 손으로 느끼기엔 뜨겁다 못해 닿는 것이 약간은 따갑다. 화상을 입는 거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도 K는 살아있는 감각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손을 떼지 않는다.

 


엄마아빠…….”

 


고요한 적막 위로 목소리가 들려 K가 다급히 손을 떼며 의신을 쳐다본다. 잠에서 깼나 싶었지만 잠꼬대였던 모양이다. 예상지 못한 단어에 K는 저도 모르게 떠올린다. 지금은 얼굴도 흐릿해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 제 부모였던 사람들을, 저의 기나긴 역사에 묻힌 그들을 생각한다. 그러다 눈앞의 사람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감긴 눈 안으로부터 넘치는 건지 눈 꼬리에 맺힌 눈물이 얼굴선을 타고 흐른다. 아플 때는 마음이 약해져 보고 싶은 사람을 찾기 마련인데 의신에게는 그 사람이 부모인 것 같았다.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 역시도 외로운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일찍 부모를 병으로 여위었다고 했었지. 의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그렇다 한들 죽은 사람을 위해 슬퍼할 수 있는 감정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K에게 미묘하게 다가온다. 갑작스레 변한 체질 때문에 부모에게 말없이 행적을 감추고 살다 끝끝내 그들의 죽음을 제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것도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무덤 앞에서 슬퍼했던 기억도 까마득한 예전이다. K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상 체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삶을 지긋지긋하게 저 홀로 연명하게 된 억울함뿐이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연히 만난 이질적인 존재가 무감각하게 느껴졌던 제 시간을 바꿨다. 길고 어둡기만 하던 그 무한한 시간 속에 고립된 저를 등대처럼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난 건. 창문으로부터 달빛만이 들어오는 방 안은 푸르스름하게 잠겨 있어 K는 문득 의신을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왔던 처음 그 순간을 떠올렸다. 저를 바라보던 맑은 눈동자. 차별 없이 진심을 부딪쳐 오던 눈. 김의신. 너와 나는 같은 점이 많을까. 다른 점이 많을까. 나를 사람이라 말해주는 너는 나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너에게 내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줘야 할까.

 


케이?”

 


의신이 몸을 작게 뒤척이다 부스스 눈을 뜬다. 잠긴 목소리는 발음이 뭉개져 소리가 어딘지 불분명하다. 눈을 깜빡거리지만 초점 역시 제대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K는 저와 다른 의신의 검은 눈을 내려다본다.

 


왔으면깨우지 그랬어 오래 기다렸어?”

 


의신이 힘없이 중얼거리지만 몸을 바로 일으키지는 않는다. 몸이 제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거겠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저를 인식하는 두 눈동자. 그거면 목적은 성취했다는 것처럼 K는 의신의 반쯤 떠진 두 눈을 제 손으로 감기며 손으로 의신의 눈부터 이마를 덮는다. 눈두덩 위로 서늘한 온도가 머물러 시원하다.

 


연구는 내일 하는 걸로. 오늘은 자는 게 좋겠군.”

하하. 걱정해주는 거야?”

…….”

 


K는 의신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려울 때 K가 침묵한다는 걸 알게 된 의신은 나른한 정신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그의 온기를 느낀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 저체온증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차가운 물수건이며 얼음주머니가 따로 필요 없다. 이럴 목적으로 그를 오게 만든 게 아닌데. 졸지에 K와 제 처지가 뒤바뀐 상황은 우습다. 이래서야 K가 간병인이네. 의신이 한숨을 내쉰다.

 


한심하지. 케이너를 고쳐주겠다고 해놓고…….”

 


목소리는 자책하는 것처럼 풀이 죽어있다. K는 침묵으로 일관하려다가 정적을 깬다.

 


시간은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까지는 없어.”

 


K와 달리 의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K는 그렇게 말한다. 연구를 하는 동안 김의신, 너는 나랑 같이 있을 거잖아. 그렇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 해도 괜찮아. 구태여 K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의신 역시 K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한다. 어둠에 녹아든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도. 햇빛을 갈망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할 텐데도. 날 배려하는 건가. 의신이 별 생각 없이 중얼거린다.

 


너는 상냥하네.”

 


그 말에 K가 잠시 움찔한다. 뭘 생각했는지 몰라도 의신이 생각한 것이 제가 생각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직은 한참 남았을 것 같아. 어느 정도의 속도로 다가가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순간에 다다를 수 있을까. 사람과 교감하는 법을 잊은 K는 막연하게 생각하며 제 다른 손을 의신의 볼에 가져간다. 의신이 시원함을 찾아 K의 손에 제 볼을 비빈다. 여전히 온도는 높고 타인의 피부에 닿은 손은 따끔거린다.

 


케이. 네 손, 차가워서 기분 좋아…….”

 


의신이 배시시 웃으며 달라붙어온다. 나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 나에게 서슴없이 다가오는 사람. 나를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K는 제 두 손을 의신에게 전부 내어주고서 의신을 먹먹히 바라본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 K는 머뭇거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이렇게 있어줄게.”

 


그 말에 의신이 말한다. 많이 불편할 텐데. 의신은 멍하니 생각한다. 허리를 굽히고 있어 엉거주춤할 텐데.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것처럼 K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야, 말을 덧붙인다.

 


빨리 나아야 연구도 진척이 있지. 더 자는 게 좋겠어.”

 


K가 잠을 자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의신의 이마를 다시 짚는다. 신기하게도 열은 옮아가질 않아 K의 손은 시원함을 유지하고 있다. 평소 의신이었다면 이 현상에 의문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그저 열이 있는 환자인지라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K의 말에 수긍을 표한다.

 


최고의 병문안 선물이네. 빨리 나을게. 케이.”

 


약속을 새기는 것처럼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잦아든다. 눈이 가물가물 감기더니 말이 끝나고 머지않아 숨소리가 들린다. 눈꺼풀이 둥글게 덮인 걸 보니 또 다시 무의식의 저편으로, 잠의 세계로 빠져버린 모양이지만 상관은 없다. 우리의 밤은 오늘도, 내일도 이어져 있으니까. K는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의신의 체온을 반추하며 창가를 바라본다. 익숙한 밤하늘에 흰 달이 걸려 있었지만 K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배니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렬] 속죄의 시간  (0) 2019.01.05
[케이의신케이] 교차하는 평행선  (0) 2018.05.14
[케이의신] 필요충분조건  (0) 2018.03.17
[케이의신] 비틀린 회항(回航)  (0) 2018.01.05
[명렬의신] 되풀이되는 계절  (0) 2017.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