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케이 ㄷ의신, 케이+의신. IF K만이 인간으로 돌아간다면

※ 본공과 후반부 부분이 조금 다르게 변형되어 들어갑니다. 햇빛맆 재구성.


 

- 변하지 않는 건 없어. 케이. 어쩌면 나만이 도태된 걸지도 모르지. 썩은 과일 곁에 온전한 과일을 놓아두면 그 과일도 같이 썩고 말아. 나는 네게 도움이 되지 않아. 너를 더 이상 고칠 수도 없고 너와 같이 햇빛 아래에서 체온을 느끼며 걸을 수도 없어.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알겠다고 할 생각이야?

 


지친 얼굴이 냉소적인 독설을 내뱉는 동안에도 K는 움직이지 않았다한 뼘 남짓한 공백이 흘렀다어려운 건, 몰라말을 교정하는 중이었으나 곤란할 때는 평상 쓰던 말이 나와 K는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뒤죽박죽 뒤섞인 억양으로 문장의 호흡을 중간중간 끊었다. 회피하듯 검은 눈동자만이 허공을 굴렀다. 상대가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의신, K가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랐다.

 


- 꽃이 피지 않아도, 나는 같이 있을 거야. 의신이, 처음 내게 손을 뻗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K가 마른기침을 뱉어내면서도 정확한 뜻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스러지듯 작아지는 음성이 마침표를 찍자 정적이 밀려들었다. 틈을 메우듯 창가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케이+의신] 교차하는 평행선

 

 



K의 손길에 끌려 처박혀있던 연구실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밤의 어둠이 희석되어 한결 엷어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거적때기처럼 보이는 두꺼운 천을 뒤집어쓰고 의신이 다친 제 몸을 K의 어깨에 기대다시피 부축해 길이 나지 않은 숲을 걷는 내내 그의 얼굴은 나뭇잎의 그림자가 드리운 까닭인지 내려앉은 우울이 드러났다. 내가 그동안 사람을 죽였던 거였구나. 자각과 동시에 혼란이 찾아들고 뒤이어 찾아든 감정은 빛바래진 죄책감이었다. 미안하단 감정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단 합리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단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래, K. 네가 말한 게 맞았어. 나는 너와 다를 바 없었고, 나는 결국 이용당하기만 할 거였지. 눈을 감으면 저에게 매달려 목숨을 갈구하다 피가 빨려나가 숨이 끊어지고 스르르 가라앉았던 명렬의 온기가 과거에 대한 잔상처럼 진득하니 저를 휘감았다. 의신이 형. 노스탤지어로의 회귀를 꿈꾸는지 기억이 온전한 탓에 앳된 얼굴을 한 환상이 망령처럼 뇌리에 되새겨져 현실과의 괴리에 부대꼈다. 설령 원래대로 돌아가더라도 모든 것이 완전하게 돌아올 수는 없어. 계획의 구상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이상(理想)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조건은 처음과 달리 많은 것이 틀어졌어.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헛딛었고 비척거리던 몸이 주저앉으려는 것을 K가 같이 휘청거리면서도 하반신을 낮춰 제 균형을 다잡곤 빠르게 팔을 뻗어 의신의 허리를 받쳤다. 칼날이 파고들었던 가슴 부위는 다량의 피가 셔츠에 혈흔으로 한가득 적셔진 채 남아있어 K가 의신을 빤히 바라봤다.

 


많이다쳤어?”

아니. 난 괜찮아. 피도 멎었고.”

…… 슬퍼?”

 


옆으로 고개가 기울은 K의 적안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제 형상이 비췄다. 공감을 전혀 형성하지 못하던 전과 달리 그의 얼굴이 팔자눈썹으로 눈꼬리가 쳐지는 걸 보았다. 이렇게 제대로 서로를 바라보던 것도 얼마만인지. 의신은 K를 올려다보다 K가 붙든 손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본의 아니게 뜸을 들여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의신이 손에 잡히는 곱실거리는 더벅머리를 비비적거리며 휘저었다. K는 헝클어지는 머리에 뭐하는… 거야,”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의신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몇 계절 동안 떨어져 혼자 지냈으니 간만에 느끼는 감촉이 반가웠으리라. K와 의신이 떨어져있던 시간은 그들이 보내왔던 긴 밤을 떠올리면 찰나였지만 짙은 그리움이 시간을 왜곡했다. 그래도 너와 떨어져 연구실에서 지내던 그 외로웠던 시간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의신은 다른 제 손에 쥐여진 유리관을 아스라한 희망인 양 손을 꽉 말았다.

 


케이, 너를 봐서 기뻐.”

 


진심이 담긴 말을 덧붙였지만 으르렁거리듯 성내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으신은! 거짓말… 쟁이.”

 


공격적인 말투일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강약의 악센트로 이루어진 뒷말은 작아 목 안으로 삼켜졌다. 힘없는 항의 표현 속에 걱정이 담긴 걸 느끼며 의신이 K를 도닥이듯 그의 어깨에 제 팔을 둘렀다.



돌아왔잖아.”

내가마중 간. 거잖아.”

 


투정이 뒤섞인 목소리에 문득 너도 내가 불렀을 때 오지 않았잖아, 어린애처럼 반박하려던 감정을 억눌렀다. 그동안 소리 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저를 주시하던 그 끈질긴 시선을 정말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서로에게 간파당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는 누가 어느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 경계가 흐려졌고 의미를 알 수 없어 의신이 상념을 날리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곤 케이에게 제 무게를 실었다. 으시인, 무거워. 대답이 없자 K가 불만을 토해냈다. 몇 발짝을 떼고 의신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때가 되면 돌아갈 생각이었어. 떠나는 그 날도 그렇게 말했잖아.”

정말?”

.”

이제는, 돌아갈 때. 같아?”



의신은 흘낏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안에만 갇혀있다 간만에 마주한 하늘은 드넓었고 동이 트려는지 지평선 너머로 해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지는 것을 보니 밟고 있는 대지가 양지로 점령당할 시간도 머지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빨리 가자, 케이.”

 


의신이 재촉하듯 K를 끌었다. 서두르지 않은 건, 으신인데. 투덜거림이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따라붙었지만 자박자박 나뭇잎을 밟는 발소리에 지워졌다.

 

 


 


오랜만에 돌아온 폐가는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것 없어 변함없이 정체된 그대로였다. K가 의신이 돌아왔으니 환영 축제라도 하자며 마시지도 못하는 축배를 들자는 걸 의신이 잠시 미뤘다.

 


케이. 그 전에 잠깐.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

 


느닷없는 말에 의아하게 쳐다보는 K를 의자에 앉히고 K의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팔꿈치까지 걷었다. 오자마자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더니 K 앞에 섰을 때는 의신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바늘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일어서려는 K의 반응에 의신이 웃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몸에 좋은 거야. 케이, 나 믿지?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며 건네는 음성이 사뭇 상냥해 K는 의신을 바라보며 엉거주춤 의자에 다시 앉았다.

 


최대한 힘 빼고, 아프면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 내가 전에 가르쳐줬던 거, 기억 나?”

 


의신이 손을 말아 주먹을 쥐고 잼잼, 소리를 냈고 K는 한 박자 느리게 아, 반응했다. 의신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고 있었던 일이다. 따라붙는 설명은 알 수 없었지만 자기가 가진 피가 이상한 게 아니라 대단하다고 경의를 나타내며 제 존재를 긍정하며 받아줬던 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의신이 저를 떠났다 하더라도 그에게 갖는 신뢰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견고해 K는 화가 났었던 것도 잊고 의신에게 제 몸을 맡겼다.

 


긴장 풀어.”

 


소독 솜으로 피부를 문지르고 나서 팔에 바늘이 꽂히는 건 먹잇감을 흡혈할 때처럼 순간이었다. 피부를 통해 몸 안으로 주입되며 줄어드는 실린더 몸체 안의 액체를 K는 빤히 쳐다봤다. 주사바늘이 거둬지고 제 팔을 번갈아보던 K는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무언가 이상한 것처럼 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손을 짚자 잃어버린 시간을 일깨우듯 고동이 느껴졌다.

 


아…?”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 이어졌다. K는 한참을 그대로 있다 잠시 손을 떼고 손을 느리게 쥐었다 피었다를 반복했는데 관절이 뻣뻣하지 않아 부드럽게 펴졌다. 피를 마시고 나서 나타나는 현상과 흡사 유사했는데 혈관을 통해 피가 온 몸으로 퍼져 흘러나가 순환하기 시작했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K는 제 손목에 귀를 가져가댔다. 고요하기만 했던 무형물로부터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제 심장이 위치할 가슴에 손을 재차 짚자 생()을 증명하듯 심장박동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열기는 동심원을 그리듯 서서히 퍼져나갔다. 달음박질하는 심장으로부터 느껴지는 떨림이 생경했다

 


으신. , , 심장이뛰어!

 


K가 뒤죽박죽인 억양으로 입을 떼며 의신을 보았다. 그 특유의 늘어진 말투였지만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며 크게 뜬 눈에서 K의 심경이 여실히 드러냈다. 검은 눈으로 돌아온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으며 아롱졌다.

 


네 연구성공, 했어!”

 


의신이 화색이 도는 K의 피부를 보며 가늘어지는 눈으로 따라 웃었다. 마주하는 그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축하해. 케이.”

 


떨리는 음성이며 감격이 묻어나는 표정과 달리 의신의 피부는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했다. K가 저에게 나타난 현상에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의신의 손을 서슴없이 잡았다가 냉기에 몸을 움츠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저에게 머물고 있던 겨울의 온도였다. 놀라움이 곁든 검은 눈이 손을 놓지 못한 채로 한참을 의신을 쳐다봤다. ? 어째서? 의신은? 혼란스러워하는 눈에 담긴 의문은 많았지만 의신은 금방이고 울 것처럼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한 쌍의 눈은 환희로 가득했다. 제 나름대로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K가 더딘 손놀림으로 의신의 소매단추를 풀러 천을 걷어내자 팔이 접히는 부위의 피부에는 여러 개의 주사바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 뭐라 말을 전해야 할지 K는 방대한 언어의 서재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제 마음을 대신할 낱말을 건지지 못해 머뭇거렸다. K가 눈동자를 굴리며 떠올려봤지만 끝내 나온 말은 보편적이다 못해 그가 가장 근접하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고마워. 의신미안해.”

 


기뻐하던 순간이 언제였다고 금세 얼굴이 울상 지며 고개가 떨어졌다. 축축한 목소리에 이어 K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자 의신은 당황한 얼굴로 급히 앉아있는 K를 따라 허리를 굽혀 옆에 놓인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어라? 내가 생각한 반응과 좀 다른데? 아니, 기뻐하라니까 왜 울고 그래? 그렇게 기뻐? 케이, 넌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 거야. 알고 있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K가 의신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의신이 억, 꺾인 소리를 내며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치지 않아 다행이었지, 자칫했다 가벼운 뇌진탕을 겪을 뻔 했다. 과격한 행동은 다칠 수도 있으니 이제 삼가줬으면 하는데습관처럼 충고하려다 다른 말을 했다.

 


무거우니까 좀 떨어지면나 일어나고 싶은데.”

 


졸지에 눕게 된 의신이 저를 끌어안으며 위에 있던 상대에게 말을 건넸지만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행동이 어찌나 어린애 같은지. 의신이 나뒹굴고 있는 제 팔을 끌어당겨 K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케이. 이제 넌 햇빛 아래를 걸을 수 있어. 네가 언젠가 꿨던 꿈속에서처럼,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그러니 울지 마.”

 


의신의 손길에 K는 의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 의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열기를 품게 된 그의 눈물이 의신의 피부로 닿았다. 뜨거웠다. 사람의 체온은 의신 역시도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온도라서 의신은 제 유일한 희망을 껴안으며 위안을 느꼈다. 그래, 그래도 나는 한 가지는 지킬 수 있었네. 의사로서 너에게 한 약속은 지킬 수 있었어. K. 내가 지금까지 버텨온 이유는 그거 하나면 충분해.

 

실험은 성공이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의신과 몇 번의 사계절을 함께하고서 K는 인간으로 돌아갔다. K에 대한 연구 기록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다만 K와 같은 피대상자인 의신에게 같은 효능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자명했다. 다른 것을 전부 포기하고 K를 선택했던 시점부터 각오했던 거였다. 설령 원래대로 돌아가더라도 모든 것이 완전하게 돌아올 수는 없어. 계획의 구상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이상(理想)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조건은 처음과 달리 많은 것이 틀어졌어. 예외가 생겨버린 건 의신이 제 몸을 연구 실험체로 쓰길 거듭하면서 신체에 내성이 생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약의 개발을 위해 임상실험을 하는 도중 사람의 면역 체계에서 보이는 흔한 현상 중 하나로, 연구를 시작한 의신이 감수해야 할 결말이었다.

 

 



 

사람. 죽이기 싫다고, 그랬지? 내 피르을, 마셔.”

케이.”

으신. 의신이 힘들어 하는 건싫어.”

 


문제는 해결하고 나면 왜 또 연달아 생기는지, 곧바로 또 다른 난제에 부딪쳤다. K는 의신에게 제 손목으로 내려오는 코트와 셔츠를 걷더니 피부를 드러내며 보였고 의신은 떨떠름한 얼굴로 난감을 표했다. 명렬의 폭로로 제가 지금껏 마신 피가 짐승 피만이 아니었다는 걸 자각한 의신은 이 신체를 유지하는 조건이 사람의 피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의신은 K와의 약속을 지키고서 조용히 햇빛 속으로 사라질 생각이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혼자 남겨진 K가 적어도 사람 속에서 어울리려면 여러모로 고쳐야 할 것이 많았다. 사람과 지내는 게 익숙해지지 않아 이상하게 굳어버린 말이며 야생 동물에 가까운, 사회에 학습되지 않은 동작. 개성이 독특하면 눈에 뛰어 원하지 않더라도 주목받게 될 텐데. 적어도 평범한 사람처럼은 보여야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어울리며 살 수 있을 텐데. 일본 순사가 감시를 하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런 흉흉한 시대에서 이질적인 사람은 손쉽게 배척더 나아가 제거되곤 했다보니 머리가 지근거렸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에만 급급해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의신이 피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돌릴 겸 몸을 배배 꼬며 틀고 있는 K에게 입을 열었다.

 


케이. 이제 그렇게 움직이면 다칠 수도 있어. 몸을 꼬지 말고 똑바로. 유연성을 과시하려 하지 말고.”

 


의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K는 마냥 기분이 좋은지 해맑게 웃으며 의신, 이것 봐. , .” 어디서 그새 긁힌 건지 생채기가 난 피부를 보였다. 재생력이 전처럼 빠르지 않은 몸을 바라보다 뒤늦게 아픔을 호소하듯 아야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도 기뻐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그걸 인식할 새도 없이 의신은 떨리는 손으로 코를 다급히 틀어막으며 일어섰다. 아뿔싸, 이런. 의신은 허점을 찔린 얼굴로 저에게 훅 끼쳐오는 향기에 고개를 휙 돌리며 K의 말을 받아주지 못하고 자리를 급히 벗어났다. 빌어먹을 몸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본능적인 감지가 빨랐고 반응은 솔직했다. 귓가가 쿵쾅거리듯 들려오며 느껴지는 피의 갈망에 의신은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이제 나만이 이 현상을 겪는다면 내 생을 끝내야 하는데. 나의 소원도 이뤘으니 더 남아있는 미련은 없는데.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사라지는 게 맞나? 그렇지만 그건 K에게도 너무 무책임한 짓이야. 하지만 K를 사회에 정착시키고 내가 사라지려면, 내가 그 동안에는 어떻게 버텨야 하지? 나는 사람의 피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는데. 사람을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어. 그런다 한들 K의 피를 마시면서까지 목숨을 연명할 수는 없는데. 그러려고 그를 고친 게 아닌데.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지지부진한 미련처럼 턱하니 남아 의신은 제 본능적인 충동과 뒤섞인 사고 속에 갇혀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동안 일반적이지 않았던 현상들을 몸소 겪는 것에 K는 신기해했고 의신은 피를 의식하지 않으려 무단히 노력하며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준 후에야 K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을 가다듬었다. 내가 사라지고 나서 너는 평범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적응을 할 동안만이라도 부탁할 만한 사람들에게 맡기면 안심이라도 되겠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지워져버린 제 사회적 위치로는 그마저도 어려웠다. K의 친고는 무릇 300년 정도가 훨씬 더 오랜 전이라 그의 가문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으니 까마득했다.

 

 



 

,”

 


비틀린 탄식이 터졌다. 아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가가 미묘하게 찡그러져 K가 목으로 삼킨 뒷말은 자연스레 익숙한 음성지원으로 이어졌다. 의신이 K의 손목에서 잠시 입을 뗐다. 미처 다 삼키지 못한 건지 피가 입가에 묻어있었다. K를 쳐다보지 못하는 시선이 바닥을 기었다.

 


미안.”

, 찮아. , 정말로. 의신이 괴로워하는, . 더 싫어.”

…….”

나랑, 같이있어 줄 거지?”

 


시선을 떨어뜨린 의신을 내려다보던 K가 제 상반신을 낮춰 의신과 눈을 마주했다. 검은 눈과 붉은 눈이 두 뼘 정도 간격을 둔 허공에서 교차했다. 시선이 맞닿고 K가 재차 입술을 움직였다. 의시인. 나랑, 함께 할 거지? K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폐가의 바닥을 짚고 있던 의신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말이 없자 K가 양손을 뻗어 의신의 얼굴을 잡았다.

 


의신, 나를 봐.”

 


얼굴이 고정된 탓에 늘어지는 말이 느릿느릿 이어지는 동안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의신이 얼떨결에 눈을 깜박거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들이찬 형상을 확인하고서 K가 히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에겐, 내가 필요해.”

 


확신을 가진 목소리며 눈을 빛내는 얼굴이 의기양양했다. 전과 달리 그 문장이 뜻하는 바가 이중적이라 의신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알 수 없는 얼굴로 K를 바라보기만 했다.

 



 


 

해결책은 다른 방향에서 찾아왔으나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미제(謎題)로 남는 편이 나았다. 영겁의 시간 동안 일반적인 체질이 아니었던 탓인지 갑작스레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게 된 K의 면역력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연약했다. 무더운 여름이었는데도 K는 곧잘 감기에 걸렸다. 처음에는 환경 때문이라 생각해 의신이 K를 일단 경성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들이 지금껏 같이 지내온 폐가는 먼지도 많고 사람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K가 의신과 떨어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같이, 가는 게 아니면. 싫어.”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지금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닌 거, 알잖아. 넌 여기서 지내면 안 돼.”

, 몰라. 의신이 가지 않으면, 나도 안 가.”

케이! 너 진짜!”

 


의신이 성을 내면 K는 귀를 틀어막으며 온 몸으로 거부하듯 몸을 웅크리곤 등을 돌렸다. 건강이라는 문제 앞에서만큼은 의학도의 정신이 투철하게 발휘돼 의신은 완강하게 버티며 아우성치는 K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억지로 끌어냈다. 경성의 비어있는 모텔 방에 숙소를 잡아 의신은 매정하게 K를 남겨두고 오기도 했지만 의신보다 오래 살았던 폐가의 위치를 모를 리도 없는 K가 몇 시간을 걸쳐 기어코 제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온 바람에 의신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외려 의신이 눈을 뗀 사이에 K의 몸에 자잘한 상처만 늘어 하는 수 없이 폐가를 최대한 깨끗하게 청소해 임시나마 K가 지낼 수 있는 환경으로 구색을 갖추기만 했다. 어떻게든 K를 설득시켜보려 했지만 거처를 옮길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바람에 결국 의신은 심혈을 기울여 내부 공사를 하듯 폐가를 여기저기 손봤고 그 덕에 지금은 허름했던 전과 달리 오래된 집 정도로 느껴졌다. 허나 노력이 헛된 것처럼 K는 자주 기침을 내뱉었고 약을 먹어도 좀처럼 쉽게 낫지를 않았다. 기침 증세가 오래가면 폐병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 의신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환경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이 갖고 있는 면역력의 문제였지만 의신은 후자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이사를 가는 게 좋겠어, 중얼거리며 K의 손을 잡았다.

 


케이. 우리 같이다른 곳에서 살까. 작은 도시라면 병원도 있고 경성에서의 소문이 퍼지지도 않았을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면허가 지금도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원 보조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둘이 먹고 살 수는 있을 거야.”

 


체온이 다른 손가락이 맞물리듯 얽어들었다.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와 반대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 때의 의신이 그랬듯 K도 거부하지 않았다. 맞닿은 온도는 달랐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K는 부인하듯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의신. 사람을 죽이는 거. 싫다고 했잖아.”

 


제가 몸소 겪어봤던 현상이라 의신이 태연한 척 숨기려 하더라도 사람이 많은 무리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느낄 그 현상이 어떨지는 K에게 숨길 수 없었다. 충동을 감안하면서까지 저에게 제안을 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구태여 의신을 강박증에 시달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K가 연이어 기침을 했다. 의신과 시선이 언뜻 닿을 때마다 K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저었다.

 


, 콜록, 하나도 안 아파. 콜록. 정말이야.”

 


기침이 멎자 K는 침을 삼켜 가라앉히곤 언제 그랬다는 듯이 괜찮은 것 마냥 굴면서 의신의 손을 낚아채 제 이마에 대더니 볼로 가져갔다. 서늘하다 못해 냉기가 도는 손이 힘없이 K의 손에 이끌려 품속에 갇혔다.

 


의신의 손… 차가워서 기분 좋아.”

 


미열이 도는지 맞닿은 K의 피부가 뜨끈했다. 열전도는 쉽게 이루어졌고 의신은 이제 제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온도가 저를 손쉽게 허물어 저를 무너뜨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케이, 나는 의사인데 왜 너를 완전히 고칠 수가 없지? 왜 네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지? 너 대신에 아플 수 없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재생력만을 뽑아낼 수 있는 V인자 연구를 계속 할 걸 그랬어. 제 곁에 있는 사람을 병() 때문에 또 다시 잃을 지도 모른단 무력함에 의신은 한없이 초라해졌고 후회와 미련만이 추악하게 늘어갔다.

 




 

K가 기침을 하는 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고 머지않아 K가 느닷없이 쓰러졌다. 한 계절을 온전히 넘기기도 전이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라 하더라도 더위가 가신 건 아닌지라 미적지근한 바람이며 날은 청명했지만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지 K가 몸을 떨며 춥다고 담요로 몸을 싸매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의신이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K의 이마를 짚었을 때에는 열이 들끓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에게 숟가락으로 액상의 해열제를 먹이고 의신이 수시로 체온계를 가지고 K의 상태를 체크하고, 그래도 약효가 먹히지 않아 알약을 빻아 가루약처럼 물에 녹여 넘겨보는 등 의신은 제가 알고 있는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약으로는 도무지 열이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문적인 장비로 치료를 받는 게 아닌 이상 원인을 밝혀내는 건 어려웠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인 것 같아. 의신은 울적한 얼굴을 했다. 의신은 앓아누운 K를 간호하기 시작하면서 K가 잠들면 그를 지켜보다 자주 울었다. 환자를 치료할 때는 정확한 증상 파악과 진단이 중요한 만큼 일련의 동요도 없었건만, 감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유지했던 것도 이미 너무 빛바래버린 옛 기억이었다. K가 깨어있을 때는 행여 불안이 점염될까 싶어 의신은 담담하게 K와 대화를 나눴지만 눈가는 그의 눈만큼 늘 붉었다. 잠에서 깨어난 K는 의신의 부운 눈과 숨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은 마른 눈물 자국으로부터 어림짐작 추측만 했다.

 

의신, 또 울었어?

 

예전 같았다면 입 밖으로 생각을 바로바로 꺼냈겠지만 함부로 내뱉지 않게 된 건 의신이 K에게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학습해야한다며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믿는 건 필요하지만 먼저 생각을 드러내는 건 이용당할 수 있으니 위험하다며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에도 조절을 가르쳤고, 조금씩이지만 말을 끊어 말하지 않고 긴 마디를 일정한 속도로 말하는 발화 방식을 가르쳤다. 이상하게 억양이 들어간 말을 고조가 없이 평탄하게 교정하며 자연스레 말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몸의 관절을 습관처럼 꺾으려 하는 걸 뼈가 부러지면 아프다는 걸 강조해 조금씩 줄여나가도록 했고, 식사를 할 때는 식기와 젓가락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 왜 해야 하냐고 K가 가끔 물으면 의신은 K가 이해하기 쉽도록 예시를 가져와 비교로 설명의 눈높이를 맞췄고 납득한 K는 불만 없이 의신을 따랐다.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K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최적화된 가르침이라 의신은 이상적인 교사의 표본이었다. 그저, K는 의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의심해본 적은 없지만 눈에 띄게 수척해지는 얼굴을 볼 때면 껄끄러운 마음만이 불어났다.

 

의신, 나 때문에 우는 거지? 나 정말 괜찮은데, 많이 아픈 것도 아닌데. 이제 나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울지 않으면 안 돼? 이 말도 쉽게 표현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야? 말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전할 수 있어?


K가 비몽사몽 몽롱한 정신으로 멍하니 생각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입술을 움직여 문장을, 단어를 구성하는 음절을 만들려 했지만 마른기침이 먼저 터진 바람에 비가 내리던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의신이 놀란 표정을 짓다 걱정 어린 눈으로 K를 내려다봤다.

 


괜찮아?”

 


의신이 흘러내린 이불을 K의 어깨에 걸치듯 덮어주며 누워있던 K를 부축했지만 기침이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아 K는 몸을 한참 들썩였다. 의신은 그의 등을 느리게 쓸며 다독였다. 가까스로 기침이 멎은 K에게 따듯한 물 한 컵을 건네자 K가 말없이 받았다. 뼈가 도드라지는 손목은 야위어 힘이 없었다. 컵을 기울여 목을 축이는 걸 확인하고서 의신이 도로 컵을 받아 선반으로 치우고는 K의 곁으로 다가왔다.

 


병원에 가자. 내가 같이 가줄게.”



K의 팔을 들어 몸을 부축하려 했지만 K가 의시인, 이름을 길게 부르며 옷자락을 붙잡았다. 네가 싫다고 해도 데려갈 거야. 의신이 강경하게 나왔지만 K는 고개를 숙인 채 의신의 팔을 붙잡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무언의 거부 표시였다. 의신이 K를 홱 쏘아봤다. 애써 감정을 가다듬고 말을 꺼내려 했지만 갑갑했던 탓인지 울컥해서 튀어나온 말투는 본의 아니게 날카로웠다.

 


네가 애야? 왜 그렇게 고집 부려? 몸은 악화되면 한 순간이야! 이렇게, 이 상황까지 나두면 안 되었던 건데내 불찰이야. 처음부터… 강제로라도 널 경성으로 보냈어야 했어. 내 부모님도 결국손을 쓰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고내가내가…….

 


무의식에 묻어둔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떠오른 탓에 평정(平靜)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먹먹함이 목 끝까지 올라 온 탓에 말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의신은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 알 수 없어 제 얼굴을 떨리는 손을 끌어 덮어 가렸다.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불시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엉망이었다.

 


의신은. 내가 죽는 게두려워?”

 


의신의 얼굴이 일시에 일그러졌다. 분위기를 읽었다면 이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말에 기가 막혔는지 의신이 저를 방어하듯 가리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K를 노려봤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덤덤했다. 상황이 주객전도가 된 게 아니라면 이렇게 온도차가 나는 반응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너는 어떻게! 의신이 허탈하게 웃으며 악을 쓰듯 언성을 높였다.

 


하… 그러면.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도 있어?”

 


주먹을 다부진 채 말을 토해내는 의신의 얼굴이 비틀렸다.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말을 마치고서 의신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색색거리는 모양새는 화를 억지로 참으려는 모습만이 역력했다. K는 감정 기복 없는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 입을 열었다.

 


의신. 네가 그렇잖아.”

 


비아냥과 조소가 담긴 질문에 돌아온 건 전혀 예상해본 적 없던 대답이었다. 항해키가 180도 틀어지면서 목적어의 대상이 전도돼 의신의 말문이 막혔다. 제가 한 말에 이런 식으로 제 발목이 붙들릴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K가 의신을 쳐다봤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무덤덤한 검은 눈동자에 의신의 형상이 던져지고서 고요했던 수면에 잔잔한 파동이 일어나는 걸 보았다.

 


나에게 조금씩 무언가 가르쳐주는 것도. 사라질 준비를 하는 거잖아. 나를햇빛 속에 남겨두고.”

 


어조는 평탄하고 끊어 말하지도 않아 언뜻 들으면 평범하게 들렸지만 문장이 내포한 뜻이 그렇지 않은 게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지냈던 모습이 전부 연기였다고 자백하는 K는 의신에게서 시선을 비껴 이불에 두었다. 모든 걸 K가 간파하고 있었단 사실이 충격이었던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이 되어서 그를 이길 재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의신은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이 순식간에 들이차면서 숨통을 압박했다. 수압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너와 경우가 다르잖아.”

 


의신이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여 말을 입 밖으로 꺼냈지만 눈을 내리깐 K의 얼굴은 기묘하게 어두웠다. 본인이 아팠던 내내 보이지 않던 표정이었건만 의신의 끝을 가정하자 침울하게 가라앉은 표정이 너무 선명했다. 제 아무리 의신이 사실 명제를 말한다 하더라도 K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변명일 거였다. 같이 지내면서 서로에게 끼친 여파가 얼마나 되는지 인지하지 못하다 지금에 와서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자각하는 게 우습고도 슬펐다. 케이,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니. 나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을 다 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왜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아? 묻는 게 두려워 그동안 미루고 미뤄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거꾸로 뒤집혀 저에게 돌아왔다. 케이, 너는 내 마지막 환자이자 하나뿐인 친구이니까. 네가 나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이니까. 진심은 너무 무거워 말로 꺼내는 순간엔 자칫했다 가치를 잃기 십상이었고 상대에게 부담만 안겨줄 뿐이라 의신은 흘러넘치지 않도록 제 감정을 억눌렀다. 문득 제가 느끼는 감정과 엇비슷한 크기로 K도 저를 생각할 지도 모른단 가정이 떠올랐지만 받아들이기 힘겨워 의신은 생각을 꺼뜨리려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 창문을 바라봤다환기를 하고 싶었지만 찬 바깥 공기가 K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의신은 잠시 숨을 돌렸다. 피차일반 서로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면야 동정으로 설득을 시키는 것보다는 깔끔한 단념으로 포기를 가르치는 편이 나았다.

 


케이. 그거 알아? 식물 중에는 꽃이 피지 않는 식물도 있는데 그걸 은화식물(隱花植物)이라고 불러. 포자를 이용해서 번식하는데 어려운 설명은 생략하고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이끼라던가 곰팡이가 이 항목에 속해. 한자로 쓰면 꽃이 가려져 있다고 쓰는데 사실상 꽃은 피우지 않아.”

 


 시선을 고정한 유리창 표면은 물방울이 다닥다닥 붙었다 흘러내리고 있었다. 의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의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비교하자면 나는 그런 거야. 내 몸에는 이제 어떤 약물도 먹히지 않아. 평범한 사람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조차 사라진 거지. 하다못해 식물은 햇빛과 물로 살 수라도 있지, 나는 사람 피가 아니면 살 수 없어. 내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인데. 아니이건 살아있다고 표현할 수도 없지. 지금만 해도 나는 너에게 기생하는 것밖에 더 안 돼.”

 


발언은 강도가 지나치게 세 자조적이다 못해 자학에 가까웠다. K가 의신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뭐라고 반박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의신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말이야. 너는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약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

…….”

처음부터 면역체계가 약했다면 나에게 피를 주면 안 되었어. 생각을 하지 못한 나도 어리석었지. 나에게 피를 주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나와 떨어져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면좀 더 나았을 거야. 나는왜 그 때 그러지 못했는지. 요즘에서 후회해.”

 


담담한 말이었지만 힘이 빠진 목소리에는 떨림이 남아있었고 습기가 차있었다. 자책이 묻어나는 긴 말이 끝맺어지고 나서 K가 의신, 이름을 불렀다. 의신은 조금씩 움직이기만 할 뿐 돌아보지 않았다. 눈물을 삼키고 있을 게 너무나도 명백했다. 어떻게 해야 더 이상 네가 울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너에게 닿을까. K는 의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진심을 전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의신.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해. 의신과 지낸 걸 후회하지 않아.”

지금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나중에는 아닐 거야.”

의신이 내게 소중한 건, 변하지 않아.”

 


직설적인 화법인 만큼 숨기는 것 없이 노골적이라 꾸밈이 없었다. 의신이 천천히 몸을 틀어 K를 돌아봤다. 눈가는 여전히 그의 눈처럼 붉었다. 서로의 눈이 맞닿자 의신이 설핏 웃었다. 가늘어진 눈과 달리 입가는 웃지 않아 슬프게 느껴졌다.

 


케이.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많은 걸 바꿔놓아. 명렬이도 과거엔 내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어. 유일한 가족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런데 결국엔 이렇게 되었지.

….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어. 시간은 계속 흐르고 사람들의 시간 역시 촛불의 심지처럼 타들며 줄어들어.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이라면 다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어? 그래서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는 거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러다보면 변할 수밖에 없어.”

 


의신이 잠시 펼친 제 손을 보았다. 피부는 핏기가 돌지 않아 지나칠 정도로 창백했다.

 


그 굴레를 벗어난 게 있다면 이 저주받은 신체일 거야. 이건 진보라기보다는 퇴행했다고 봐야할 테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결국 변하지 않는 건 나태에 지나지 않아. 사람은 발전하기 위해 변하는 거니까.”

 


의신은 K를 쳐다봤다. 자기가 한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상적인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별은 필히 그들이 겪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케이. 네가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면 넌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해. 그들과 어울리다보면 너에게 소중한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야. 꽃을 피워낼 수 있는 미래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걸 손쉽게 져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너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무한하지 않아.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둬서는 안 돼. 나와 있던 시간에 머물러있지 마. 너는 나와 같이 있으면 지금처럼 자주 아플 거야.”

나, 나는의신이, 같이 있지 않으면더 아플 거야. 마음이.”

 


검은 눈과 붉은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울상 지듯 쳐진 눈이 저에게 매달리듯 호소하는 검은 눈이 애처로웠다. 단호하게 내치려해도 달라붙어오는 눈빛에 먹먹해져 의신이 저에게로 전해지는 신호를 차단하려 눈을 잠시 감았다. 그를 위한다면 이제 더 이상의 퇴로는 없어야 했다.

 


마음이 아픈 건 시간이 해결해주기 마련이야.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거든. 하지만 몸이 아픈 건때를 놓치면 끝이야. 영영.”

 


의사로서의 본분이 의신을 떠밀었고 K를 밀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의신과 K는 의사와 환자로서 만났고 아직도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객관적인 치료를 위해서라도 사적인 감정을 끼워 넣지 않아야 했다. 자신이 치료할 수 없다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의사에게로 환자를 보내야 했다. 그게 의신이 수행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 될 거였다. 의신은 K를 쳐다봤다.

 


변하지 않는 건 없어. 케이. 어쩌면 나만이 도태된 걸지도 모르지. 썩은 과일 곁에 온전한 과일을 놓아두면 그 과일도 같이 썩고 말아. 나는 네게 도움이 되지 않아. 너를 더 이상 고칠 수도 없고 너와 같이 햇빛 아래에서 체온을 느끼며 걸을 수도 없어.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알겠다고 할 생각이야?”

 


지친 얼굴이 냉소적인 독설을 내뱉는 동안에도 K는 움직이지 않았다한 뼘 남짓한 공백이 흘렀다어려운 건, 몰라말을 교정하는 중이었으나 곤란할 때는 평상 쓰던 말이 나와 K는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뒤죽박죽 뒤섞인 억양으로 문장의 호흡을 중간중간 끊었다. 회피하듯 검은 눈동자만이 허공을 굴렀다. 상대가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이번에는 K가 의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빨랐다.

 


의신. 사람이 태어나면, 죽음도 있는 거잖아. 나는지금까지, 그게 없었어.”

 


K는 방금 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했다. 늘어지는 말인데도 의신은 그렇게 선명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끝을 갖고 싶어.”

 


그 문장은 금방이고 치환되어 인생을 갖고 싶다는 것으로 들렸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가 살아왔던 삶이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길고 긴 어둠을 헤매오며 지내왔던 날들,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듯 숨어 지내오던 삶. 제 그림자를 보며 손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외로움을 견디며 혼자 지내왔던 시간. 잊고 살아오던 영겁의 시간 속에서 만나게 된 단 하나의 등대였던 빛과 같은 사람. 제 존재를 인정해준 유일한 상대인 의신을 K는 똑바로 응시했다. 잃어버렸던 시간이 다시 흐르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고 말하듯 K가 습관처럼 의신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의신. 죽는 것은. 내가 바라던 일이야.”

 


언뜻 들으면 이기적인 말처럼 들렸지만 간절한 염원처럼 느껴졌다. 맞닿은 손에서는 어김없이 생을 증명하듯 체온이 느껴져 먹먹함이 몰려왔다. , 왜 나는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렇게 없을까. 애써 침착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했지만 목이 메 말을 잇지 못하는 의신을 보며 케이는 눈을 휘며 웃었다. 수심이 가득한 붉은 눈을 보며 K가 말을 건넸다.


 

슬, 퍼하지 마. 나는… 의신과 있어서, 기쁘고. 좋아.”

 


조곤거리는 목소리에 힘이 풀려 의신의 고개가 처연하게 떨어졌다. K가 잡은 손 위로 깍지 끼듯 얽으며 다른 팔로 웅크린 의신을 끌어안았다.

 


꽃이 피지 않아도, 나는 같이 있을 거야. 의신이, 처음 내게 손을 뻗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K가 마른기침을 뱉어내면서도 정확한 뜻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울지 말고, 나랑. 같이 있어줘. 스러지듯 작아지는 음성이 마침표를 찍자 정적이 밀려들었다. 틈을 메우듯 창가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증상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K가 기침을 할 때면 피가 섞여 나왔고 몸은 버티질 못해 누워서 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부터 폐병이었어. 이 와중에서도 피의 냄새에 반응하는 제 몸뚱이를 저주했다.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봐야 고작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햇빛을 느낄 수 있게 된 시점으로부터 아주 조금 연장된 생명선. 언제 꺼질 지 알 수 없는고비는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신은 K를 바라보다 커튼으로 덮여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몇 년 간 본 적 없는 선명한 햇빛. 자신의 소멸을 가로막고 있는 이 공간. 그 너머 빛에 잠긴 바깥을 상상하며 응시했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었으니 K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친구로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K가 몸을 뒤척이며 웅얼거리다 게슴츠레 눈을 떴을 때는 의신은 두꺼운 겉옷을 입고 이어진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으시인?”

좋은 아침. 잘 잤어?”

이 시간에, 깨어있는 거흐아암. 처음 봤어…

 


K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생체리듬이 달라지면서 둘의 생활이 겹치는 때는 오후와 저녁 사이부터 이른 밤 시간대였고 의신은 아침에 대체적으로 수면에 빠졌으니 의문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잠을 덜 잤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하고, 싶은 일?”


 

K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아직 잠이 덜 깨 몽롱한 눈을 한 K를 보며 의신이 까치집이 된 K의 머리를 정돈하며 매만져주고는 이불을 걷어냈다.

 


나랑 같이 햇빛 속을 걷자.”

같이?”

 


단번에 잠이 달아났는지 K가 반문하며 의신을 멀뚱히 쳐다봤다. 놀란 기색이 드러나는 걸 보고서 의신이 K의 겉옷을 입혔다.

 


그래. 옷을 걸쳤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덥기야 하겠지만.”

 


제 시야가 희부옇게 흐린 건 미뤄두고 K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제 손을 K의 허리에 감았다. 저를 받쳐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부축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K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의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 생일도 아닌데?”

그 동안 많이 싸웠으니까. 화해하고 싶단 의미.”

ㅡ화해.”

 


서로에게 화가 풀린 지는 한참 전이었지만 K는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의신의 말을 따라 말하며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의신에게 제 몸을 맡겨 일어서는데 문득 목으로 울컥 비린 액체가 역류했다. 자칫했단 치솟을 것 같아 잠시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방해하지 마. 의신을 의식하고는 기침이 올라오는 걸 애써 가라앉히듯 K는 침을 여러 차례 삼켜 억눌렀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딛곤 서로에게 의지하며 문을 열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 시간대에 나와 본 것이 얼마만인지, 의신은 피부에 닿을까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닥만을 바라봤다. 익숙한 어둠 대신 햇빛으로 물들어 밝은 면적이 훨씬 많았다.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그림자가 들지 않은 양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직접적으로 닿는 햇빛은 아니라 이 정도는 견딜 만 했지만 살갗을 찌르는 것처럼 따갑게 느껴지기는 했다.

 


밝고, 따뜻해.”

 


K가 눈부시다는 듯이 가늘어진 눈으로 해를 올려다보다 의신에게 걸친 팔을 푸르고 긴 천속에 감춰진 의신의 손을 잡았다. 가죽장갑을 끼지 않아 햇빛이 언뜻언뜻 닿아 K의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체온이 유독 더 따갑게 느껴졌지만 의신은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더워. 작은 불만이 섞여있었지만 의신은 K의 손을 잡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

나쁘지, 않아.”

그래?”

농담, 이야. 아주 좋아.”

 


K는 환히 웃었다. 광대가 볼에 걸렸다. 얼굴 근육이 움직여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해맑아 의신이 따라 피식 웃었다.

 


누군가의 온기를 느끼며 걷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건 이루어주지 못하네. 미안.”

 


덧붙여진 말에 K가 완강하게 부인하듯 의신의 손을 꼭 붙들며 힘을 주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의신.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 중에, 제일!”

 


K가 화색 띤 얼굴로 말을 더 이으려 했지만 불시에 기침이 터져 뒷말이 입술 안으로 먹혔다. 계속해서 참았던 것의 반동인지 K는 몸을 들썩이며 연거푸 기침을 했고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의신이 받칠 새도 없이 몸이 곧바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의신이 굳어진 얼굴로 다급히 무릎을 굽혀 앉으며 발작하듯 움직이는 K를 잡았지만 K가 막고 있는 손과 입 주변으로 붉은 피가 흘러 묻어나왔다. 의신은 제 아랫입술을 깨무는 걸로 충동을 짓이기며 K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가까스로 기침이 멎고서 K가 입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손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지만 K는 힘겨워 보이는 얼굴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휘어진 눈이 얇게 접혀 잔주름이 생겨났다.

 


내겐, 가장… 기쁜 순간이야… 꿈과 같아” 



K가 숨을 몰아쉬며 의신에게 몸을 기댔다. 피가 묻지 않은 다른 손을 더듬거리기에 의신이 그 손을 꽉 쥐었다. 제 무릎을 내어줘 K의 뒷목을 받쳐 자세를 편하게 만들자 K가 의신을 올려다보았다. 해를 등져 의신의 얼굴은 음영으로 가려져있었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의신의 얼굴은 금방이고 울 것처럼 슬프게 느껴졌다. 너는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해줬는데, 나는 너를 힘들게만 하네. 미안해. 그래도 나는 너를 만나서… K는 저만을 위한 제 빛을 온전히 두 눈에 담았다.

 


고마워… 미안해. 의신고마웠어.”

 


K가 이를 드러내며 히웃더니 저에게로 쏟아지는 나른한 햇볕을 즐기는 양 눈을 감았다. 자세를 다잡지 못한 채 몸 위로 걸쳐있다시피 걸려있던 피 묻은 손이 땅에 툭 떨어졌다. 저에게 기대고 있던 몸이 축 늘어졌다. 눈물이 K의 몸 위로 투둑 떨어졌다. 해가 자리를 옮기며 중천에 떴다 저물 때까지 K는 따사로운 햇빛 속에 잠겨있었다. 의신은 곁을 지키듯 K의 손을 잡고 같이 있었다.

 

 



 

익숙한 밤이 찾아오자 시야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다의신은 K의 시신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해가 잘 드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도와 지형을 확인하고서 삽으로 땅을 파 흙을 파내고, 그가 몇 백 년 간 휴식을 취했던 나무로 짜인 관 속에 자신의 마지막 환자이자 친구를 담았다. 시신은 평온한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신은 흐트러진 K의 곱슬머리를 정돈했다.

 


안녕. 케이. 잘 자.”

 


의신은 제 때 전해지 못했던 인사를 마지막으로 관의 뚜껑을 덮었다.

 

삽으로 흙을 파고 덮어 메우는 걸 혼자 하는 건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보다 의신을 더 힘들게 만든 건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밤은 어둡고 사라진 온기 속에 밤공기는 유독 서늘해서 의신은 문득 예전에 자기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떠올렸다. 시계를 보고 있다면 언제쯤 마칠 수 있을지 감이라도 올 텐데. 시간이라도 재고 싶단 생각을 의신은 정상적이지 않은 몸이 된 이후로 처음 했다. 그 동안은 곁에 K가 있었으니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들이었다. 심장이라도 뛰면 심장소리로 시간을 셀 수 있는데 그조차도 의신에겐 이루기 어려운 일이라 단순 노동을 하며 보내기에 그 밤은 너무 외로웠다. 그러다가 땅 속에 묻힌 K를 떠올리고서 너는 이제 외롭지 않은 걸까, 네가 원했던 인생을 갖게 된 걸까,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몸을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인 까닭인지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관 위로 흙이 전부 덮이고 틈이 메워져 의신은 손으로 둥글게 다져 봉분을 만들고서 꽃을 꺾어왔다. 제법 그럴싸한 무덤을 만들고서 한 가운데 꽃을 얹었다양지 바른 곳에 제 친구를 묻고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시리게 빛나는 하얀 달을 보며 의신은 K의 무덤 옆에 앉아 기다렸다.

 


캄캄한 밤하늘이 서서히 농도를 흐리며 옅어지더니 달빛이 배경색에 묻히듯 가려졌다. 어둠이 물러가고 분간이 좀처럼 되지 않은 시야 안으로 빛이 들어섰다. 지평선이 밝아오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육안으로 마주한 해는 제 뼈를 녹여버릴 만큼 강렬하고 금방이고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었다. 의신은 가늘게 눈을 떴다. 색으로밖에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케이. 너랑 같이 일출 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빛이 사방에서 저를 덮치듯 찾아왔다. 고통은 삽시간에 온 몸을 타고 흘러퍼졌다. 피부는 화상을 입으며 짓물러지더니 빠른 속도로 부식되었고 피부의 표면은 바싹 말라비틀어진 땅처럼 전부 갈라졌다. 선이 침식한 몸의 형태가 무너져가면서 햇빛의 입자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이 뒤섞이기 시작했다의신은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를 젖혀 제 얼굴을 마저 드러냈다

 


금방 데리러 갈게.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의신은 지워져가는 제 몸을 감싸는 찬란한 빛에 맡겼다해가 주위를 환히 적시게 되었을 때에는 주인을 잃은 낡은 거적때기가 꽃과 함께 묘비 없는 무덤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