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공 이후. 스포 포함.
유진+맷. 노넴맷 일부 O.
상담을 거듭한 끝에 인격 통합 치료를 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맷 시니어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모든 죗값을 치르겠다고 했고, 자기 머릿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건넬 수 있으면 직접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모두의 허락을 받고 난 다음에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저 때문에 모두가 사라지는 것도 부조리라고 느낄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그들의 도움을 받은 주제에,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고서 이제 와서 없앤다니. 조안이 저를 장난감 취급했던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뒷말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유진은 따듯한 김이 피어오르는 페퍼민트 차를 앞에 두고 마실 생각을 하지 않는 맷의 속을 헤아려보려는 것처럼 한참 쳐다보았다. 조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오필리어의 연쇄 살인범이 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 맷은 괴로워했지만 최면 치료를 반복하고 이야기를 거듭하면서 그는 저에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체념 끝에 찾아온 차분함은 형량을 깎으려고 보이는 계산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제가 해 온 일이 모두 기반이 튼튼하지 않는 모래사장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이었단 사실을 깨달아서일까. 파도에 휩쓸려 흩어지는 모래알들을, 물거품처럼 산산이 부서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심경은 어떠할지. 어린 시절의 혹독한 학대를 받은 아동학대의 피해자이자 생존자. 동정은 가지만 그래도 그의 모든 의견에 공감할 수는 없다.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러라고 그에게 수긍하며 카페인이 듬뿍 들어간 커피를 마셨다. 정리는 깔끔한 쪽이 뒤탈이 없을 테니.
어떠한 원리인지는 몰라도 맷의 머릿속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방이 있다고 했다. 안에서 잘 이야기를 나눈 건지 최종적인 보고를 전해주기 위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름이 없는 그였다. 모든 기억을 온전히 갖고 있는 그는 그림자처럼 말이 없었고 지금만 해도 별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앤은 원래부터 나오고 싶지 않아했어요. 우디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알았다고 했고요. 저 역시도 맷이 그렇게 결심했다면야 별 다른 불만은 없어요. 다만…”
“다만?”
“선생. 하나만 약속해줘요. 맷이 죽지 않도록 잘 지켜봐주겠다고.”
“약속하지. 어디까지나 인격 통합 치료는 맷을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치료법이야. 나는 맷이 기억을 되찾고서 정당한 죗값을 치르고 제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바야.”
“… 전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맷이 선생을 신뢰하니.”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못마땅한 어투는 아니었다. 자신들이 통합이 된다고 한들 제각각의 존재로 살아왔던 형태가 불분명해지고 지워지는 현상인데 차분하게 물을 마시는 그에게선 두려워하는 기색은 느낄 수가 없었다. 무섭지 않은가?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쓸데없는 말이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유진은 침묵했다. 충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순순히 협조를 받아낸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유진은 고맙다고 말을 건네다가 그가 말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빠져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노네임을 쳐다보았지만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왜 자기가 희생해야 하냐면서 멱살을 쥐어 잡더니 물건을 집어던지더군요. 뒤처리를 하느라 생고생 시킬 때는 언제였냐면서 악을 쓰는데 자처해서 분풀이 대상이 되고 싶진 않네요. 선생이 맷을 설득했으니 지미도 잘 설득해 봐요.”
“… 허.”
살벌한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도 말한다. 종종 겪는 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지미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감정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아 모호한 얼굴이다. 맷이 이야기를 전부 끝마친 게 아니었나? 아무리 몸의 주인이라고 해도 반항적인 지미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려나?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쳐 유진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안경알 안의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자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생에 평온한 일만 있으라는 법은 없죠.”
“너희를 맡은 것부터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는 걸 아나?”
“그래도 선생은 맷을 도울 거잖아요.”
펜을 무기 삼아 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가 언제라고, 이름 없는 청년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접혔다. 희미하게 떠오른 그의 웃음엔 소리가 없었다. 그는 블라인드를 친 창문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창을 덮은 블라인드를 기울였다. 틈이 생기자 조각나듯 잘린 햇빛이 층을 이루며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마웠어요. 선생 덕분에 맷과 아주 오랜만에 대화를 했어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블라인드의 각도가 기울었다. 밝은 빛이 차지하는 면적은 넓어지더니 그는 이내 따듯한 색으로 물들었다. 갈색의 머리칼이 태양빛에 잠식하고 푸른 눈동자에 햇볕이 곁들었다.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올 줄은.”
회상에 금방이고 잠겨들 것 같은 얼굴 사이로 보이는 건 그리움이 묻어나는 눈이었다. 감상적인 태도가 드물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끝을 유진이 따라가 보니 어린 남자 아이 둘이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겹쳐보고 있는 것일까. 주위에는 푸르른 녹음이 펼쳐져있었고 햇빛은 그에게 깃들듯 쏟아지고 있었다. 형체를 지워버릴 것처럼 그가 서있는 곳만 지나치게 밝았다. 마지막을 직감한 이름 없는 자는 별다른 감정의 고조 없이 나른하고 온화했다.
“날이 좋네요.”
평화로운 오후를 만끽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틀어 유진을 쳐다봤다.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두 눈은 언제나 그렇듯 흔들림이 없어 올곧았다.
“맷을, 그리고 지미를 끝까지 잘 부탁해요.”
사이가 나쁜 것 같더니 그는 둘을 유진에게 떠맡기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역할을 마친 사람의 퇴장이었다.
누가 제 눈앞에 있는지 헤아리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청년은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에 나둔 담뱃갑에 손을 뻗었다. 익숙하단 듯이 담배를 한 개비 빼물고 유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순히 라이터를 주지 않자 성급한 손이 제가 벗어둔 자켓을 뒤져 기어코 라이터를 빼냈다. 창문도 열지 않고 불을 붙여 담배를 입에 물자 고스란히 방 안이 매캐한 연기로 휩싸였다. 흡연에 대한 집착이라고 하기에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드러내고자 하는 일종의 불안 심리라는 걸 안다. 이렇게까지 말이 없는 타입도 아니니. 유진은 알싸한 연기에 창문을 열어 환기할 통로를 만들고 너구리 소굴로 만든 장본인을 바라봤다. 연기가 조금 걷히자 목재 테이블 위에 몸을 걸터앉아 묵묵히 담배를 태우는 그가 보였다.
“지미.”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담배를 문 채 빨아들이기를 반복하자 필터가 타들어갔다. 흡사 끝에서 바스러지는 재가 어떻게 보면 그의 인생 같았다. 효용을 다하고 부스러지는 삶.
“맷에게 이야기는 들었나.”
“… 씨발.”
인상이 팍 구겨지다 피던 담배 개비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불씨를 끄듯 구둣발로 꾸깃 밟으며 짓이기는 행동에서 그가 느끼고 있을 불안의 파편이 드러났다.
“작가 선생. 여기서 내가, 이 좆같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악당이 되는 건가?”
지미는 비틀린 얼굴로 하핫, 허탈하게 웃으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테이블에 몸을 대충 걸치듯 앉아있는 모양새처럼 그의 눈에 일렁이는 감정이 위태롭게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씨발… 그래. 존나 개보다도 못한 인생. 차라리 이렇게 살 거면 빨리 뒈져버렸음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손에 잡힌 사각형의 담뱃갑이 떨렸다. 말과 달리 아랫입술을 꽉 문 입술이 떨리는데 금방이고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유진은 그에게 건넬 말을 생각하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떠올리고서 침묵했다. 그가 느낄 분노와 위기의 감정은 지금 이 시점에서 정당했다.
“어이. 작가 선생. 뭐라고 구워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안에는 나와 맷밖에 남지 않았어. 이 곳이 이렇게 정적이었던 것도 처음이야.”
“잠깐. 지금… 다른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우디랑 앤, 그리고 노네임도?”
그 말에는 끼어들지 않으려 했던 유진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며칠 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빠른 시일 내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 최종적인 결정을 통합하고 행동을 취할 거란 사실은 알았지만 노네임은 맷에게 어떻게… 의식이라도 맡기고 있는 셈인가? 방식과 절차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진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당사자는 주위에 기척이 없다며 공황에 빠진 상태였다.
“하… 그림자 새끼가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나보고 뭐라고 잘난 조언을 지껄였는지 말해줘? 씨발. 우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태초로 돌아가는 거니 잘 생각해보라고 하더군. 하… 씨발, 그놈의 멍청한 이론! 언제는 우리가 발전한 거라고 그러더니, 씨발!! 그래놓고 이제 와서 누구 멋대로 사라져!!!”
격양된 어조와 함께 울분이 터졌다. 이제는 화를 내야 할 대상도 잃은 허무한 손이 테이블 위를 쓸고 지나가 차곡차곡 쌓여있던 종이들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지미는 종이 더미를 집어 던졌고 눈보라처럼 기록들이 흩날렸다. 환자에 대해 적어둔 기록이며 보고서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이는 걸 목격한 유진은 저도 모르게 일어섰다. 물건을 집어던졌다는 말이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갔다. 진정하라며 지미를 달랠 생각으로 다가가는데 지미가 유진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걸음걸이가 꼭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저에게 손을 뻗기에 저번처럼 자신을 공격하나 싶었지만 유진은 제 몸을 방어하는 것 대신 그대로 내어줬다. 한 방향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이 금방이고 쓰러질 것처럼 절박해서. 그대로 있지 않으면 그가 무너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지미는 유진과 가까워지자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멱살이라도 잡는가 싶었는데 그대로 한참을 말없이 서있었다. 고개가 금세 아래로 꺾였다.
“아무도 없어. 나를 봐준 사람들은. 있어도 다 사라졌지.”
“…….”
“작가 선생. 나는… 그림자 새끼와 달라. 지워지고 싶지 않아.”
음성이며 쥔 손가락이 떨렸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였다.
“악역인 건 상관없어. 늘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형편없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실리더니 이마가 닿았다. 유진은 그가 토해내듯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비명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맷에게 방해물이 될 수는 없어. 노네임이 지미에게 전한 말은 정론이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몰랐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존재 의의. 몸을 구성하며 운영하는 체계. 그들이 누구보다도 근원을 더 잘 알고 있었을 테니.
“… 생각할 시간을 줘.”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유진은 피로가 느껴지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행동을 왜 나에게 하냐고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지미는 잠잠했다.
며칠 동안 유진은 지미와 보냈다. 맷은 잘 있는 거냐며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제가 벌인 일이 도루묵 되어버릴까 유진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지미는 여느 때처럼 담배와 술을 즐겼고 저번에 저에게 보였던 약한 모습 대신 히죽거리며 웃었다.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지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진은 귀찮다는 태도 대신 그에게 어울려줬다. 삶에 미련이 남아있다면 마지막을 정리하는 모습은 전부 다 다를 테니까. 맷이 이따금씩 걱정이 되었지만 지미가 해치려들지 않을 거란 사실은 자명했다.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건 끔찍하게 두려워 하면서도 따르지 않겠다고 저항하는 태도도 아닌 걸 보면.
시간은 점점 촛불의 심지처럼 줄어들고 있었고 유진을 향해 쏟아지는 여론의 비난도 여전했다. 바깥도 제가 마주해야 할 안도 혼잡하기 짝이 없다. 1차 재판을 벌여야 할 날짜가 목을 죄어오듯 다가오고 있었다.
“작가 선생. 만약 내가 사라져도… 나를 기억해줄 건가?”
뜻밖의 습격이었다. 유진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나이를 처먹더니 귀가 먹었냐며 퉁명스러운 어조가 같이 돌아왔다.
“자네 같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잊겠나. 몸에 유해무익한 것들만 섭취를 하는데.”
“환자를 대하는 것 같은 사람의 말이군. 씨발. 너도 참 한결 같다.”
지미는 비아냥거리듯 말을 받았다. 말은 여전히 험악했지만 전보다는 수위가 줄었다. 욕설이 더 안 붙은 게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시점이었다.
“이런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면 뭘 원하는 건가.”
그러자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톡톡 치던 움직임이 멎었다.
“자네는 요 며칠간 생산적인 일은 단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아.”
“… 그게 뭐. 평소엔 내가 뭘 했다고,”
“지미. 자네가 욕망하는 바가 있을 거 아닌가.”
“내 욕망?”
“바라는 거 말일세.”
“씨발. 좆같네. 언제부터 나에게 그런 걸 신경 쓰셨다고.”
전과 같았으면 비웃거나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좆까라는 태도로 나왔을 법도 했는데 차분했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가라앉은 감정 폭은 침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 정체성을 하나 둘 버리고 흐리려는 것처럼.
“지미. 자네는 그 몸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닌가?”
“… 평범하게 살고 싶긴 했지. 다 같이 공생하는 걸로 협약을 맺었으니까.”
답을 주지 않을 것 같더니 지미는 말을 받았다. 유진이 빤히 쳐다보자 오히려 뭐가 어쨌냐는 식의 눈길이 돌아왔다.
“맷을 재워둔 것도 전원이 살기 위해서였어. 그림자 새끼와 내가 애들과 맷을 지키려 했다는 건… 뭐, 믿든 말든 자유지만.”
“믿어.”
두 눈이 유진을 쳐다봤다. 믿어. 유진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지미가 도리어 시선을 피했다.
“… 허 참. 싱겁기는.”
지미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의자 등받이에 몸을 있는 힘껏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요 며칠은 평범한 것 같더니 오늘은 지나치게 무기력하다. 심경적인 변화라고 하기 보다는 계속 심란했다고 적어두는 게 맞겠지. 유진은 속으로 헤아리다 늘어진 지미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서. 지금 자네의 기억은 맷과 공유하고 있는 셈인가?”
“뭐. 부분적으로는.”
“왜지?”
“지금까지 보호자인 양 지켜왔는데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아, 씨발. 이 새끼. 눈치는 어디다 줘버려서. 내가 이거까지 말을 해야 해? 작가 선생. 분위기 못 읽는다는 말 자주 듣지?”
도저히 못 듣겠다고 생각한 건지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로 지미는 유진을 쳐다봤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반항적인 모습은 유진이 처음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유진이 환기하듯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이제야 좀 자네 같군.”
크게 떠진 두 눈이, 한 쌍의 시선이 따라왔다. 기가 막힌 것처럼 동그래진 눈이 유진을 쳐다봤지만 눈앞의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견고했다. 얼빠진 표정을 하다 지미는 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이거 한 방 먹은 기분이군.”
“꼭 사라져야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 내가 사라지는 쪽이 당신에게는 더 좋은 거 아닌가?”
“내가 하고자 하는 건 통합이야. 지미. 자네가 사라진다기보다는 진정한 의미로의 합일이지. 맷을 중심으로 융합된다고 해야 하나. 자네들은 그의 안에 남는 거네. 하나가 되어.”
“결국 그것도 이론적인 가능성일 뿐은 아니고?”
지미는 이죽거리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의 말이 맞다. 사례가 별로 없는 일종의 희귀 케이스에서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하기 어려우니.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이럴 때 확신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얄궂게도 유진은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거의 한 달 간 같이 지낸 사람 역시도 알고 있다. 지미는 한 모금 삼키더니 연기를 고스란히 유진의 얼굴에다 뱉어냈다. 유진은 작게 콜록거리며 실눈으로 지미를 쳐다봤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전처럼 형형한 살기나 번뜩이는 생기가 없었지만 뭔가를 결심한 눈이었다.
“작가 선생. 나를 만족시킬 수 있겠어?”
맥락과 벗어난 대사였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유진은 기침이 멎고서 입을 뗐다.
“목적어를 생략하고 말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데.”
“아까 자기가 했던 말도 기억 못하는 걸 보니 노망났나 보네. 아까, 나에게 욕망이라고 했던가? 내가 원하는 거?”
지미는 손가락 사이에 물린 담배를 목재 테이블 위에 지졌다. 불빛에 그을린 자국이 생겨나며 연기가 파스스 줄어들었다. 가늘게 피어난 잔향 같은 연기가 둘이 서있는 공간을 갈랐다. 시선이 맞닿고 한참을 오가다 유진의 넥타이가 지미의 손에 붙잡혔다. 힘을 줬지만 몸이 앞으로 딸려가듯 기울었다. 유진이 급하게 테이블 가장자리 안쪽으로 손을 짚었다. 신경전처럼 기류가 얽혀드는가 싶더니 지미가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유진의 허벅지를 스치다 혁대를 잡는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게 이상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 맷은.”
유진은 말을 꺼내면서도 지미가 제가 말한 뜻을 곡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맷을 우선시해서 꺼낸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말 꼬투리를 잡는 언쟁은 하기 싫었다.
“의식은 내가 잡고 있어. 맷에게 이 기억을 넘겨줄 것 같아?”
그리고 처음으로 지미에게 유진의 뜻이 통했다. 달리 말하면 이 순간의 기억은 차단된다는 뜻이었다. 유진은 그제서 한시름 놓았다. 가정 폭력 피해자에게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한 기억은 여러모로 곤란했다. 그건 지미 역시도 유진과 같은 의견인 모양이었다.
“뇌파의 통일성이라고 했던가? 애당초 나는 맷에게 준 적이 없어. 그냥, 갈 때 가더라도 좀 놀다가 간다고 말을 해뒀지.”
가벼운 말이었지만 지미 나름대로는 맷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힘을 쓴 건 알 수 있다. 쿨한 척은 다 해놓고서 뒤에서는 이렇게 벌벌 떨 거면서. 비가 오는 날처럼 겁에 질려서. 자기 자신 하나 간수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밑바닥을 보이는 건 질색하고. 동정표는 사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저에게 보일 관심 하나에 절실하게 매달릴 거면서. 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살아온 방식 또한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겪은 고충의 일부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마자 알 수 없는 모텔에서 죽어있는 여자들을 발견했을 때의 심경은 어떠할지. 그라고 트라우마가 적지는 않을 것이다. 비가 올 때는 호흡 곤란이 일어나 죽을 것 같은 환자. 어쩌면 맷이랑 비슷할 지도 모르는… 유진이 말이 없자 지미가 유진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유진이 주저앉듯 끌려왔고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입술이 닿았다. 촉감에 대한 감상보다는 익숙한 담배의 맛이 났다.
“지미. 자네는 괜찮은가?”
“아? 작가 선생.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댁도 처음 아니신가? 깐죽거리듯 사족 같은 말이 덧붙었지만 저에게 큰 해를 입힐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았지만 유진은 제가 걱정한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해두지만. 나를 먼저 도발한 건 지미 테일러. 자네일세.”
별로 져주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덧붙이자 뭐가 그리도 웃긴지 지미는 킥킥 웃었다. 손가락이 매듭진 사이로 들어오고 넥타이가 그의 손에 느슨해지며 풀리더니 목에 손이 둘러졌다. 그의 무게가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유진에게 쏟아졌다.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베이지색 자켓을 입은 청년은 허밍하며 원두알을 넣고 커피머신을 돌렸다. 익숙한 멜로디가 이어지는 동안 능숙한 몸짓으로 그는 분쇄가 끝나자 곱게 갈린 원두 커피를 내렸다. 방 안에 향긋한 커피 향이 퍼졌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청년은 저에게 머그컵을 건넨다. 습관처럼 붙은 말이었지만 그가 타는 커피가 제 주위의 조교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다. 유진은 커피의 향을 즐기다 입에 가져갔다.
“훌륭해. 자네가 만든 커피는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 중에 단연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네.”
솔직한 칭찬 평에 청년의 눈이 반달모양으로 휘어진다.
“영광이네요.”
정작 본인은 카페인에 민감해 자신의 몫으로는 찻잎이 띄워진 차가 잔에 담겨있었다.
1차 재판은 무사히 받았다. 인격 통합 치료를 병행하며 사회적인 감시를 받는 것으로, 그리고 나서 온전히 그가 기억을 되찾고 나면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 이러한 판결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어느 정도 인격 통합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맷 시니어는 전처럼 감정에 쉽게 지배당하지 않았고 기억과 시간을 잃지도 않았다. 맷에게 물으니 지금까지와 다르게 머리가 맑고 조용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씁쓸한 표정을 내비쳤다.
ㅡ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지금도 그들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무의식중에 제 마음이 흘러나간 걸 깨닫고 맷은 부인하듯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꼬투리를 잡지 않고 대신 그렇게 말했다. 다 네가 갖춰야 할 성격이었다고. 네 안에 있던 많은 것들이 조각난 것뿐이라고. 누구에게나 있는 부분이니 걱정할 건 없다고 했지만 맷은 아직은 자신이 없다면서 이것저것 물어봐도 되냐고 묻기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맷에게는 알려줘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인격 통합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기대는 해볼 만한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둬냈다. 앞으로가 중요했다.
사소한 점이라고 해야 하나. 맷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목까지 잠긴 단추를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유진이 물어보니 답답하게 자신의 목을 졸라매는 기분이 소름끼친다고 했다. 예전에는 안 그러지 않았냐고 묻자 맷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ㅡ 음… 모르겠어요. 하지만 견딜 수가 없는 걸요.
그런 행동을 취하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맷. 자네도 담배 어떤가?”
유진은 창문을 열면서 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담배 한 개비를 건네자 난처한 것처럼 쳐진 눈을 한 얼굴을 하고서 손바닥을 보이며 양손으로 흔드는 제스쳐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요. 저 담배 못 피는 거 아시잖아요. 카페인도 니코틴도 알코올도 전부 다 쥐약인 걸요.”
“그랬었지.”
농담이네. 유진은 가볍게 말을 덧붙이곤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비흡연자 앞에서 필 만큼 충동적인 기분이 들어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인격 통합 치료를 제안했던 것이 옳은 일이었나. 이따금씩 유진은 생각해보지만 자신이 치료를 맡은 환자는 어디까지나 맷 시니어다. 그런데도 이따금씩 제가 피우던 담배 냄새가, 저에게 흩뿌려지던 담배향이, 제 입 안에 혀와 혀로 감기던 것이, 그의 얼굴이, 억양이, 체온이 떠오른다. 고요하게 마음에 스며든 것처럼. 후회하는가. 묻는다면 정신심리학 박사로서는 아니라고 대답해야겠지만.
ㅡ 이제야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생기겠네.
유진은 제가 피우던 직사각형 육면체로 이루어진 말보로 레드 케이스를 본다. 유진은 담배를 태운다. 익숙한 맛이 폐 속으로 침투한다. 눈을 감으면 환상처럼 그날이 떠올랐다. 꿈은 아니었던 현실이.
죄의식은 기억 어딘가에 묻어두는데 무릇 그들만이 그런 건 아닐 테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담배 기호 취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제 안에 이미 한 사람이 새겨진 탓이고 유진은 저에게 각인된 그 현상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동정이든 연민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지미 테일러가 있었던 삶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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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13 썰 기반. 이미지는 17건작(+18건쀼)..
이거 말고 ㅁㄴㄵㅁ 썰 꺼내오고 싶었는데 2년 전에도 그랬듯 빻소재+분량 문제로 완성할 자신이... 누가 완성 좀 해줬음 좋겠다 그건 정말로... 내가보고싶어...
연극 인ㅅr이드 끝나기 전에 완성하고 싶었는데 소설 쓰려고 잡아둔 썰이 아니었다보니 비어있어서 새로 쓰다보니 시간이..... 하... 인ㅅr이드.. 보시고 저랑 감상 교류 좀 해달라고 후기 쓰려고 주구절절 썰 꺼내온 거였는데 생각이 바꼈어요. 뮤텁 회전러였는데 궁금하다? 하시면 한 번 보고 오시고, 아님 마세요. 패스하셔도.
좋았던 연출도 있었는데요... 아니.. 하... 내가 맞아..,,, 뭘 해도 내가 맞다... 추작이 틀렸거든요.... 건진 거... 우리 맷은 페퍼민트 차를 좋아한다..(카페인이 없는 차라면서요...ㅠ) 조안 연출은 좋았는데..... 하...... 염병..... 본공 적폐 해석을 무대에서 본 게 제일 충격이네요. 추작보단 아무튼 내가 맞다. 정말 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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