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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처럼 펼쳐진 현재 상황 덕에 희미한 과거를 회상하며 세르주는 냄비에 물을 받고 마크는 양파를 씻는다. 적당한 크기의 칼을 꺼내 식탁 위에 놓인 도마 옆에 조심스레 올려두곤 세르주는 감자칼날을 꺼내든다. 감자를 씻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감자를 쥔 손이 꽤나 어색하다. 마크는 칼을 든다. 세르주에 비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자세가 안정적이다. 마크가 보는 눈길이 느껴지는지 괜찮다고 확인시키려는 것처럼 세르주는 서슴없이 감자칼날을 감자에 가져다대고 긁는다. 기술이 부족하다 한들 간편한 도구의 사용은 초보자라 하더라도 무리는 없는지라 무난하다.

 


그냥 뭐, 껍질만 까면 되잖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어.”

그래. 이왕 시작한 거. 맛있게 만들자.”

뭐야. 맛있게 만들 생각이 없었어?”

, 말을 말자.”

 


마크가 칼을 잡으며 둥그런 양파 가운데에 가져대고 힘을 준다. 두 동강이 나며 설컹 잘린다. 단면이 생겨난 부위를 아래로 두고 마크는 적당선 간격을 두고 천천히 칼질을 한다. 마크라고 해서 익숙한 건 아니지만 조심성은 많아 좀처럼 칼에 베이거나 하진 않으니까라고 생각하는데 코로 닿는 감각이 알싸하고 안구가 뜨겁다. 눈을 찡그리는데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맵다. , 왜지? 왜 맵지? 전에는 이렇게까지 맵지 않았는데?

 


마크? , 너 괜찮냐?”

네 눈에는이게 괜찮아 보이냐?”

아니. 전혀.”

전에는 괜찮았는데왜지? 너 양파 잘못 사온 거 아냐?”

그럴 리가 있냐? 잠깐만, 검색을 해보면, 찬물에 좀 담가두면 괜찮다는데? 냉동고에 10분 정도 넣어둬도 좋데.”

그건 진작 말해야지

 


매운 기운이 잠식한 건지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팔을 올려 옷으로 대충 닦아보지만 시야는 여전해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끔벅거린다. 이게 최루탄이지 뭐야. 차라리 세르주에게 이걸 맡길 걸 그랬다. , 그럼 좀 더 재밌었을 지도? 곯릴 수 있었는데 아깝게 되었어.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깨끗해진 시야를 확보하고 양파를 마저 썬다. 한 개를 다 썰면 되겠지? 나머지 양파 반쪽을 써는데 느닷없이 둥근 표면으로부터 칼날이 미끄러진다. 칼날은 들어갔는데 간격이 비뚤어지면서 고정시킨다고 왼쪽 양파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아악!”

 


왼쪽 손을 빼며 칼을 쥔 손을 황급히 뺀다. 그 소리에 놀란 세르주가 손에 쥐던 것을 내려두고 다가와 마크의 손을 빼앗는다. 피가 나는 왼쪽 손가락을 살펴보는데 크게 베이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순간적으로 힘을 풀어 다행이었지, 그대로 힘을 넣었다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 쓰린 통증에 기껏 가셨던 눈물이 다시 나는 탓인지 검은 눈이 어른거린다.

 


넌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세르주의 한 쪽 눈이 찌푸려진다. 눈 속에 담긴 걱정보다도 듣게 되는 핀잔이 억울하다. 애당초 이 양파 자르기를 내가 왜 하고 있는데!

 


아픈 환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해도 돼?”

 


그러자 무슨 말이냐고 묻는 것처럼 세르주가 멀뚱멀뚱 마크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어린애 취급이라도 받고 싶어?”

너 설마 직장에서도 이러냐?”

상냥하게 대해 달라는 거지?”

너 내 말 일부로 무시하는 거

 


뒷말이 이어질 수가 없었다. 피가 나는 손가락을 그대로 세르주가 제 입으로 물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작동이 멈춘다. , 잠깐, 아니, 지혈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거든? 내가 말한 건 이런 게 아니라혀가 까진 부위에 닿아 마크가 아, 쓰린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다. 잠잠해지자 세르주가 입술을 뗀다. 마크가 뭐라 따져 물으려고 하지만 세르주는 마크의 손가락을 살펴보며 피는 멎었네.” 무심하게 중얼거린다.

 


잠깐 기다려. 데일밴드 가져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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