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ㅍ옥균 ㅂ정훈

* 현대AU

* 캐붕O

 

 

 

 

김옥균. 처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정훈은 특이한 이름이라 생각한 게 첫 번째였고, 곧 이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친숙한 이유를 깨달았다.

 

근현대사에 나오던 이름 아니던가? 어디었지, 기억하는 게 틀리지 않다면 갑신정변3일 천하의 비운의 주인공이던가.’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니지만 국사 시험을 치를 때마다 시험 범위 안에는 꼭 들어가는 내용이었기 때문인지 대략적인 개요 정도는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일본이 약조를 어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면서 청국이 조선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갖게 되고, 개혁을 일으켰던 주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을 갔던가. 그 이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따로 찾아본 게 아니라서 인물이 어떤 끝을 맞았는지는 모른다. 학생 신분으로 수업을 들었을 당시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생각했다.

 

삼일만 허락된 천하라니. 작심삼일이라는 사자성어만 봐도 삼일이라는 시간은 짧은 기간을 뜻하는데 겨우 삼일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연민이 들었지만 역사 공부를 하려고 제 짧은 지식을 떠올린 건 아니었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혁명가의 기질을 가졌나?’

 

정훈은 제 앞에 정장을 입고 깔끔한 차림을 한 남자를 바라본다. 눈에서 총명함이 드러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후광이 비치는 사람을 만나고 나니 이해가 간다.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사람의 기백이 다르다. 맑고 곧은 저 인상.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꼿꼿함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이 사업가라면 사람을 믿고 투자를 하면서 동업 관계로서 파트너 삼고 싶을 것만 같았다. 최종 면접까지 붙고서 면접을 진행했던 인사 담당자-자기를 종윤이라고 소개했다-가 자기네 회사를 자랑한다고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수익을 얼마씩 벌어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수치를 언급했지만 스치듯 지나간 이야기에 정훈은 숫자는 기억하지도 못했다- 대한그룹 대기업의 주주, 한국에서 재벌5위 안에 드는 엄청난 거물이 투자를 했다고 했다. 대표가 직접 따냈다고 하는 걸 들어보니 포섭 능력이 그만큼 좋다는 뜻인데 말솜씨가 좋은 것이려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인가?”

한정훈이라고 합니다. 김옥균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려 하는데 손이 앞으로 드리웠다. 정훈은 제게 청하는 악수인 걸 깨닫고 허리를 펴 손을 잡았다. 통성명은 이 정도로 하고 회사를 안내한다거나 사원들을 소개해줄 줄 알았는데 옥균이 말을 건넸다.

 

 

자네. 바둑을 둘 줄 아는가?”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사람을 칭하는 호칭부터 특이하다 싶더니, 뒷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면접 문제보다도 생뚱맞았다. 느닷없는 화제에 정훈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바둑이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정훈이 반문하자 옥균은 웃는 얼굴로 정훈을 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헛것을 듣진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화제람? 최근에 바둑계를 휘어잡을 만한 뉴스가 있던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하루에 10분은 꼭 뉴스 헤드라인을 훑어보고 오는 편이었지만 주로 보는 항목은 정치와 경제, 문화 분야라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최근 이슈들을 떠올려보다 모르겠다는 결론만 나와 빠르게 항복하려다 신입사원으로서의 첫인상을 망칠 것 같아 정훈은 우회했다.

 

 

인터넷 바둑이라면 예전에 뒀었습니다.”

 

 

그러자 잠깐 멍한 표정을 보이더니 옥균은 생각도 못한 것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인터넷 바둑! 정훈. 자네와 내가 세대가 다르다는 걸 이런 데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네!”

 

 

순수한 감탄사였다. 유쾌해보이는 얼굴을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아보여 정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규칙은 안다는 말이군. 회사 소개와 신입 교육 받기 전에 긴장도 풀 겸 나랑 바둑 한 판. 어떤가?”

?”

종윤. 정훈의 선임에게는 미리 말 좀 건네주게. 나랑 바둑 한 판 하고 간다고 말일세. 시간은아직 내가 정훈의 실력을 몰라서 가늠이 안 가는군. 그냥 그렇게만 전해주게.”

저기옥균? 입사 첫 날부터 대표가 이러는 모습이 그, 신입에겐 좋게 보이지 않을 것 같네만

 

 

아까부터 대표의 입을 막고 싶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종윤이 적당히 하라는 눈빛으로 옥균을 봤지만-말을 놓는 걸 보니 회사를 같이 창설했던 멤버인 거 같았다- 옥균은 도리어 맑게 웃었다.

 

 

? 그런가? 정훈.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전개의 화살이 정훈에게 날아왔다. 그걸 왜 신입인 나에게 물어보는지? 정훈은 사교성 없는 제 성미를 최대한 감추려 노력하며 가만히 웃었다.

 

 

아닙니다. 다만 제가 바둑에 조예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 대표님의 상대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유학을 다녀왔다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을 고르게 하는군. 마음에 드네. 대국을 둘 만한 상대가 여기엔 없어서 내 즐거움을 잃어버렸지 뭔가.”

대표님의 실력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저 역시도 다른 분들과 비슷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만.”

하하. 부담 느끼지 말고. 가볍게 머리 비운다고 생각하게.”

 

 

정훈은 이 대화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바둑이 머리를 비우면서 할 수 있는 게임이던가? 그것도 회사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상사와 이제 갓 입사한 신입 둘이서? 회사의 대표인만큼 주도권은 옥균에게 있었고 종윤은 포기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도망가지 말아야 할 텐데' 중얼거리더니 정훈의 선임에게 전달할 겸 자리를 피해줬다. 고작 바둑으로 대국을 펼치다가 정말로 그만 둔 것도 아닐 텐데 어쩐지 흘리고 간 말이 심상치 않았다.

 

대표가 쓰는 사무실이 회사 내에서 따로 방으로 구분되어져 있는 것까지는 이상한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기묘한 느낌을 받았던 건 파티션으로 구분 지은 공간이었다. 한 명만이 사용하는 공간일 텐데 책상은 방 면적의 2/3 지점에 놓여있고, 의자 뒤로 파티션이 세워져 있었다. 책상 뒤로 공간도 넓어 보이는데 이렇게 사용하니 사무실의 공간 구조가 조금은 갑갑하게 느껴져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특이한 배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옥균이 구분되어진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서 정훈을 손짓으로 불렀다. 옥균을 따라가고서정훈은 그제서 방을 왜 이렇게 나눴는지 이해했다.

 

바둑에 진심이구나, 이 사람.’

 

책상 앞에서는 파티션으로 구분된 공간이 전혀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분리된 공간은 사방으로 병풍이 세워져있었다. 바닥은 어림잡아 높이가 10cm는 되어 보이는 큰 매트릭스 위에 대나무장판 돗자리가 깔려있었고 가운데에는 원목으로 된 두꺼운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마주보는 형태로 방석까지 두 자리 깔려있는 것을 보니 누가 올 때마다 꺼내 쓰는 게 아닌 이대로가 기본 세팅이란 뜻이다. 대표는 평소에 바둑을 자주 즐기는 모양이었다. 본격적으로 꾸며진 취미 공간을 보면서 할 말을 잃어버린 정훈과 달리 옥균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옥균은 구두를 벗더니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본인의 지정석인 모양이었다. 그 앞의 자리에 손짓하기에 구두를 벗고 덩달아 건너편에 앉게 된 정훈은 힐끗 앞을 쳐다봤다. 두툼한 바둑판. 원목의 재질이며 값이 꽤 나가보였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거 대국할 때나 쓰는 바둑판 아니야? 요즘엔 휴대용으로 얇은 거 쓰는 거 아니었어?’

 

입사 첫 날부터 신입에게 바둑을 하자고 권유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얼마나 대표가 바둑에 미쳐있는지를. 매니아라도 그렇지, 이거 참정훈은 어색한 손짓으로 검은색 바둑알을 한 알 쥐고 만지작거렸다. 동그란 바둑알은 처음 만져보는데 생각보다 표면이 매끈하고 차가웠다.

 

 

누가 먼저 둘 지부터 정해야겠지?”

 

 

옥균은 흰색 바둑알을 한 움큼 쥐었다. 무엇을 하는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니 바둑판 위에 쥐고 있는 손을 내려놓았다. 손을 둥굴게 아치형으로 모은 형태가 안에 있는 바둑알을 보이지 않게 덮은 모양새였다. 정훈이 의아한 것처럼 옥균을 쳐다보는데 뭘 해야 할 지 모르는 초보의 눈을 하고 있어 옥균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바둑을 할 때 선은 흑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시작하게 된다네. 그래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보통 흰돌을 들고 그보다 실력이 낮은 사람이 첫수를 두지. 자네는 지금 내가 이 판 위에 꺼낸 바둑알이 짝일지 홀일지, 맞춰주면 되네.”

개수가 짝수인지 홀수인지 맞추는 사람이 흑돌을 잡는다는 뜻이군요.”

정확하네. 인터넷에서는 이런 식으로 안 하나?”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는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하기도 했지만 주로 컴퓨터랑 했었으니까요.”

호오. 인터넷 가위바위보는 어떻게 하나? 룰렛처럼 가위, 바위, . 세 개의 그림이 번갈아서 돌아가면 원하는 타이밍에 클릭하면 멈추고. 그렇게 하는 건가?”

제가 뒀던 바둑은 멈춰있는 화면에 가위, 바위, . 세 개의 아이콘이 있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자네의 선택은 그렇게 하는 거고. 컴퓨터가 선택한 가위바위보는 랜덤으로 내보내지고?”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가위바위보 방법이 공정하지는 않은 거 같다만.”

시간 때우기로 가볍게 한 거였으니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확률적으로 사용자들이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많긴 했던 거 같습니다.”

. 컴퓨터 게임이니 그럴 수도 있겠군.”

짝홀은 말로 맞추면 되나요?”

짝수일 거 같으면 흑돌 두 개를, 홀수일 거 같으면 흑돌 한 개를 바둑판 위에 두면 되네.”

 

 

옥균의 사소한 궁금증 해소와 바둑을 시작하기 전 선을 잡는 방식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정훈은 잠시 고민하다 바둑알이 담긴 함에 손을 뻗었다. 세 손가락을 사용해서 어색하게 돌을 쥐고 엉거주춤 옮기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초보처럼 보였다. 실력이 낮다면 당연히 잘하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에게 먼저 하도록 하는 게 맞았다. 처음부터 흑돌을 정훈에게 주는 게 맞았을까. 인터넷으로 바둑을 뒀다는 걸 보니 실물은 처음이라 그러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 옥균이 잠깐의 고민을 했지만 고민이 무색하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초 뒤였다. 흑돌 두 개를 바둑판 위에 가져둔 것을 보면서 옥균은 제가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바둑판의 네모난 모양에 맞춰 줄을 세우듯 펼치자 돌은 여덟 개였다.

 

 

돌은 바꿀 필요가 없겠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정훈이 흑돌을 쥐게 되었다. 제가 선이네요. 바둑돌을 전부 판에서 치우고서 정훈은 아무것도 없는 바둑판 위로 손을 가져갔다.

 

 

 

 

 

한정훈은 김옥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바둑을 둘 줄 알았다. 바둑알을 쥐는 모양새가 불안정해보이기는 했어도 처음보다는 익숙해진 건지 지금은 그래도 봐줄만 했다. 아니, 어설프게 쥐는 자세로 사람을 방심시키려는 전략이 아닌지? 모습은 영락없는 초보였는데 바둑을 놓는 걸 보면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땠는가 하면옥균은 진지했다. 봐주겠단 생각은 진작 철회한 상태였다.

원래가 조용하게 흘러가는 게임이라지만 바둑알이 나무판 위에 닿는 소리만이 난다. 서로 말없이 3분 동안 돌을 놓기만 하다가, 옥균이 흰색 바둑돌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정훈. 여기를 지원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넌지시 떠보는 말이었다. 아까 왜 도망갔다는 표현을 썼나 했더니, 2차 면접이었나. 가볍게 게임은 무슨. 이쯤 되면 바둑은 핑계고 대표가 직접 이 신입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라는 거였다. 물론 이렇게 바둑을 두면서 말을 하는 곳은 없겠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는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진행하는 걸로 아는데. 커피야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이었고 게임이야 어차피 승패를 노리고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정훈은 대표의 취미에 어울려주는 양 옥균이 놓았던 자리 바로 옆에 검은색 바둑돌을 놓았다.

 

 

제가 지원한 부분이 일본어 특화더군요. 일본에서 몇 년 지냈으니 능력을 적재적소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그게 다인가?”

어학 특기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회사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목표가 좋아서요.”

 

 

정훈은 뭉뚱그려 의견을 내더니 집을 만들었다. 안에 갇힌 흰색 돌 한 개가 바둑돌이 적게 들어있던 보관함으로 이동했다. 정훈이 따낸 흰돌이었다. 옥균은 동요 없이 흰색 바둑알을 놓았다.

 

 

정훈. 자네는 영업 부분으로 지원한 건 아닌 것으로 아네만.”

영업직만 적극적이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리고 같은 배를 탄 건데, 회사의 미래를 보고 고를 수도 있지 않나요.”

채용 공고에 다른 나라로 지점을 뻗을 예정이다같은 구문이 써져있었던가? 무엇을 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는지가 궁금하다만.”

공고에는 어학 특기자라고 써져있었습니다. 일본어는 필수였고, 다른 언어도 잘하면 유리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괄호 안에는 영어가 아니어도 좋다고 써져있었고요.”

호오. 원래 뽑을 거면 각각 부분별로 채용하는 게 정상인데. 이거 악덕 기업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군.”

 

 

온갖 부분으로 부려먹을 심보로 보일 수도 있겠는데. 옥균은 중얼거리면서 흰돌의 바둑집을 완성했다. 안에 갇힌 흑돌 개를 빼내는 걸 보면서 정훈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고 좀 특이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하게 정해진 거라면 그렇게 채용을 했겠지만, 뒤집어보면 앞으로 그쪽으로 추진할 계획은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자네는 희한하게도 회사의 시각에서 먼저 보는 거 같군.”

 

 

말을 하면서도 서로 제 차례가 되면 돌을 자리에 배치했다. 나무판을 스치는 탁, , 소리가 이제는 시계의 초침소리처럼 배경음 같았다.

 

 

이 회사는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사를 넓혀 다른 나라로도 뻗을 계획인 거 아닙니까? 지금처럼 일본과 국내만 노려봐도 사업은 안정적일 텐데 다른 나라로도 확장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영어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가. 정훈. 영어는 좀 하는가?”

애석하게도 영어는 평범합니다.”

자네를 뽑은 부분이 영어 부분은 아니니 상관은 없지 않나.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군.”

 

 

바둑판은 아까보다 형세가 진행되어 있었다. 옥균은 흰돌을 놓으면서 자기가 딴 흑돌 한 개를 빼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이력서를 봤네. 프랑스로도 2년 정도 유학을 다녀왔다지?”

.”

거기서 번역을 했다고 적어둔 걸 봤었네.”

저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타지에서 먹고 살기 위한 방안으로서의 선택지가 몇 없었으니까요.”

 

 

면접 때 말을 포장했던 것와 다르게 정훈은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했다. 단순히 바둑에 정신이 팔려서는 아니었다.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대국을 하는 상대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이 한정훈이라는 신입사원이 어떤 사람인지 헤아려보려 하는 것처럼. 상대 또한 이쪽도 눈치를 챘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을 거였다. 사업가로서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는 건 수없이 해봤을 터이니. 옥균은 흐트러짐 없이 돌을 놓으며 물었다.

 

 

유학을 간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나?”

다른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을 때의 충동 같은 거였죠.”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뭘 보았나?”

 

 

옥균은 화제를 전환할 겸 조금은 가벼운 화제를 띄웠다. 이렇게 말하면 프랑스의 문화라던가, 다른 배경을 말할 줄 알았는데 정훈은 의외의 말을 했다.

 

 

조국의 그리움을 알게 되었죠. 타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감각을요.”

 

 

까만 눈은 바둑판이 아닌 먼 시절을 보고 있었다. 스치듯 발견한 눈을 보니 옥균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회했는가. 유학 간 것을 말일세.”

 

 

그러자 잠시 답이 없었다. 정훈은 제 차례가 될 때까지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허공에 떠있던 손으로부터 잡고있던 바둑알이 미끄러진 건지 엉뚱한 곳으로 이탈했다. , 짧은 소리가 났고 흐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에 검은 바둑알이 자리를 잡았다.

 

 

혹시 물리는 것도 되나요?”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난처해하는 얼굴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옥균은 정훈을 향해 웃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네.”

한 번 정도는 봐주셔도 되지 않나요?”

그렇게 안 보였는데 의외로 자네도 승부욕이 있나보군.”

 

 

옥균은 흰색 바둑알을 놓았다. 정말로 물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정훈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바둑판의 형세를 보더니 바둑알을 쥐었다. 아까처럼 바로 놓지 못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을 보니 실수가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한 번 흐름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승부의 행방이 난 건 그로부터 5분 후였다.

 

 

제가 졌습니다.”

 

 

정훈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진심을 다해줘서 고맙네. 다음에 괜찮다면 같이 또 하게나.”

 

 

옥균이 몸을 일으켰다. 정훈은 따라 일어서다 다리에 쥐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본인도 바둑에 집중할 줄 몰랐던 터라 제 몸 상태도 모르고 있었다.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악, 짧은 소리와 함께 몸이 잠깐 휘청거리다 주저앉으려는 것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옥균이 재빠르게 바둑판 위로 다리를 뻗고 건너와 팔을 붙잡았다. 정훈의 허리를 감싸듯 옥균의 다른 팔이 뒤로 받쳐진 건 덤이었다. 덕분에 형편없이 앉게 되는 꼴은 면했지만 그런다고 저린 다리가 풀린 건 아니었다.

 

 

정훈. 자네 괜찮은가?”

, 다리에 쥐가 난 거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정훈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옥균은 제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은 20분정도 흘러 있었고, 이 자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게다가 정훈은 한 자세를 유지했으니 더 그럴 거였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주로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겠군. 바둑도 인터넷 바둑만 뒀다고 했었지. 이거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네.”

 

 

옥균이 바둑판을 뒤로 조금 밀어내고 대나무장판 돗자리에 정훈을 앉혔다. 정훈이 제 오른쪽 종아리를 주무르는데 제 손 아닌 손이 왼쪽 다리를 주물렀다.

 

 

왼쪽은 괜찮은가?”

 

 

둘 다 쥐가 난 건지, 한쪽 다리에만 쥐가 난 건지 알 수 없어 물은 말이었다. 서슴없는 손짓에 정훈이 대답은 피하면서 대표님제가 하겠습니다.” 말을 돌리려 했지만 옥균은 주무르는 손에 힘을 주었다. , 정훈이 짧게 신음하자 옥균은 손에 힘을 풀어 부드럽게 주물렀다. 정훈의 성격은 바둑을 두면서 파악한 덕에 이 신입이 말하는 화법으로부터 말뜻을 읽는 건 쉬웠다.

 

 

내 잘못도 있으니 이럴 때는 얌전히 받게.”

…….”

 

 

다리 마사지는 분명 선의로 이루어지고 있는 행동이었지만 문제는 받는 사람의 마음이 엄청나게 불편하다는 데에 있었다.

 

이 회사의 가장 높은 상사가 이러는 게 불편합니다. 대표님.’

 

물론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입사 첫날부터 이게 무슨 망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를 바꿔서 앉았어야 했는데, 너무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나봐.’

 

허약한 편은 아닌데 살이 붙지 않는 체격 때문에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아 정훈은 고민했다. 이거 잘못 찍힌 거 아니겠지? 정훈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동안 옥균이 생각한 건 전혀 다른 거였다.

 

 

정훈. 한정훈. 제법 재밌는 친구를 뽑았어. 나중에 사업부로 옮겨서 잘 키워보고 싶은데. 사업 쪽으로 뜻이 잘 맞을 거 같다만.’

 

 

옥균은 주무르고 있던 손을 아래로 옮기더니 느닷없이 양말을 신은 발바닥 정중앙을 눌렀다. 다리가 저리면 발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압하는데 정훈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아니, 저희 오늘 처음 봤는데요?!

 

 

이제 다 풀렸어요! 발은, , 발은 제가 할게요!”

 

 

발바닥이 이곳저곳 눌려 다급하게 말하는 정훈은 기겁한 표정이었다. 발이면 더럽다고 느낄 텐데, 그것도 대표가! 신입사원의 발을! 입사 첫 날부터! 보통 다리에 쥐가 나도 친하지도 않은 관계에서는 이 정도로 안 해줍니다! 정훈은 차마 내뱉지 못하는 심정을 끌어안았고 옥균은 그 반응을 보면서 내가 뭘 잘못했나?’ 고개를 갸웃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 친구의 반응이 예민한 건지 아니면 제가 잘못 대처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훈에게 물어보려했지만 당혹스러운 얼굴이 붉게 물들기까지 한 탓에 옥균은 제 궁금증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정훈은 다리가 풀릴 때까지 끙끙거리면서 제 다리와 발을 주물렀고-거짓말인 줄은 알았지만 어떤 점에서 부담을 느낀 건지 옥균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린 다리가 풀렸을 때에는 이제 괜찮아졌다면서 정훈은 조금 머쓱한 얼굴을 하더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예의 하나는 정말 바른 청년이었다.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고 나서 정훈은 다른 사원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대표님의 바둑 상대로 불려가더라도 이 회사를 탈주하지 말아주세요. 다음에 또 불려간다면 처음부터 바로 져주세요. 건성으로 놔요. 오목을 두듯 놔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대표님도 바둑 두기 싫다는 항의를 이해하고 더는 어린애처럼 떼쓰지 않을 거예요.” 하고 조언 아닌 조언을 알려주었다. 정훈은 작게 웃으면서 참고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신입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닌지사회생활은 상대적인 거라 생각했다.

 

첫 날이라 업무를 하기보다는 함께 일을 할 사원들의 이름과 직렬을 외우고, 회사 내 건물 구조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바둑으로 머리를 쓴 것도 한 몫 하려나. 아니면 대표와 대화하면서 알게 모르게 긴장을 했다거나

 

직장 생활 첫 날은 적응을 하려고 몸이 노력하는 단계라 그런지 크게 한 일 없이 고단했다. 정훈은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먹고 정리한 후 바로 씻었다. 머리까지 말리고 나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와 정훈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평소 취침시간보다도 훨씬 이른 저녁 10시였다.

 

 

 

 

 

그 날 밤, 꿈에서 정훈은 배의 끄트머리에 서있는 김옥균을 만났다. 지금의 대표와 같은 얼굴을 한 그 사람은 굳은 각오를 다진 사람의 눈빛을 보이면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그 눈은 마주보고 있는 제 모습이 떠오르는 태양이라 착각이 들만큼 뜨겁고도 형형한 시선이었다.

 

 

정훈. 여기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리고 꿈속의 정훈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선생님.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이 곳에는 푸른 하늘과 넘쳐나는 햇살이 가득하고, 꽃이 핍니다.

성공했구나.

. 성공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도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바라네. 그 때에는 정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네.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

자네가 가르쳐 준 왈츠. 다음에는 음악과 함께 같이 추게나.

. 다시 만나 뵙게 되는 날이 온다면 같은 배를 타고 선생님의 곁에서 뜻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마주하는 얼굴은 둘 다 웃고 있었다. 아니, 한정훈은 울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기쁨에 벅차다 못해 감격이 어린 얼굴이었다. 제 얼굴로 된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의식만 현실 속의 정훈의 것이고 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면은 제가 개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제3자로 관찰자 시점이었다. 저와 분리된 제 모습을 이렇게 보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허나 어째서인지 감정은 공유가 되어 선박 위에 서있던 두 사람이 느끼고 있을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목적지를 쳐다보았다. 그토록 그들이 염원했고 도달하고자 했던 곳이었다. 가슴이 그저 먹먹했다.

 

 

 

 

 

알림 소리에 어김없이 눈을 떴다. 일어나는 순간 정훈은 방금 전까지 꿨던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애틋한 감정은 남아있지만 무슨 꿈이었는지는 떠올려보려고 노력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켜 시간을 보니 AM 6:50 표시가 떠있었다. 아침이었다.

 

 

언제 잠들었지. 침대에 누웠던 것만 기억이 나는데. 어제의 내일이 벌써 찾아왔네.’

 

 

아마 당분간은 몸이 적응하느라 이유 없이 피곤을 느끼고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해 정훈을 잠의 세계로 빠르게 인도할 것이다. 전처럼 시간 활용을 할 수 있는 건 일주일 정도는 지나야 여유가 생긴다. 더 오래 걸리면 한 달 정도

침대의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며 10분 정도 파묻혀 있다가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가기 싫어도 회사에 가야했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습관처럼 몸을 움직인다. 씻으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자주 마주치고 싶진 않은 거 같아.’

 

 

벌써부터 회사 대표가 거북했다. 기백에 압도당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 사실 사원 입장에서 대표가 부담스러운 게 당연하다. 다른 사원들은 바둑을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사항 자체가 불편한 것 같았지만 정훈에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곤란한 건 그 눈이었다. 사람을 꿰뚫어볼 것 같은 그 눈.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도 모르게 제 자신의 조각을 흘리게 되는 게 기분이 묘한 건지, 아니면 너무 서슴없이 다가와서 그러는 건지지금까지 제 주위에 없던 유형이라 그러는 건지. 관심을 덜 써주신다면 좋을 거 같은데. 일은 오늘부터 제대로 전담 받을 거고. 어차피 자기는 영업부서는 아니니까 크게 얽힐 일은 없지 않을까. 대표가 자기를 따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서야…….

정훈은 생각을 지웠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은 출근 준비지, 이렇게 잡다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늘 그렇듯 사람들이 많아 숨을 쉬기가 어렵다. 회사를 다니기 전에는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 절실하게도 입사하고 싶더니 지금은 아직 회사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피곤하다. 그래도 의욕을 내서 일을 해야겠지. 회사는 무릇 이윤창출을 위해 직원을 고용하는 거니까, 그에 맞는 대우를 받으려면 제 노동력을 바치고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둘째 날은 업무를 전담 받고 신입이라고 고려한 건지 일을 무작정 주지 않아 적당히 따라갈 만 했다. 그 외에는 대체로 교육을 듣는 시간이 더 많아 내용을 익히고 익숙해지는 데에 머리를 썼다. 점심시간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과 대화를 해보니 대체로 성격들이 둥글어 무난한 것 같았다. 사람이 힘들면 어려운 법인데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어 보여 이 정도면 순탄한 시작이 아닌가 생각하며 정훈은 탕비실에서 추출한 커피를 마셨다. 캡슐 커피머신은 처음 써봤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아 정훈은 내심 놀랐다.

 

바닐라 맛이 달고 괜찮네. 옅은 베이지색 캡슐.’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고서 자리로 돌아온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은 창문으로부터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졌다.

 

 

 

훗날 김옥균이 한정훈이 올린 보고서로부터 가치를 알아보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제 곁으로 부르게 되는 건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의 일이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현재 시점에서 정훈의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지인분께서 받고서 그려주셨는데 너무 예뻐서 첨부해둡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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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 로코 ㅍㅂ페어 (정훈이는 꾸벅-에그머니나.. 하는 태도로 옥균을 대함) 웃긴 것이 보고싶음..
결과: 잘나가는 회사 대표 바둑매니아 옥균과 인터넷 바둑만 둬봐서 입사 첫날부터 실물 바둑 처음 두는 정훈(?)

 

본진으로 회전 돌았어도 안 써본 장르를... 연성 얻기가 이렇게 힘들다...(자본주의 세상에서 물물교환을 하고있는 현대 이 사회)

제가 ㅜ옥균 고정으로 12번을 봤는데도 이 극은 저에게는 미장센 위주의 극이었지 내용은 저랑 잘 맞는 극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성 자체를 한 적이 없다보니... ㅍㅂ페어는 한 번 봤습니다. 못사는 아니니까 양해 바랍니다^-T 

연교로 끝내주는 연성을 받았는데 많이 늦게 드리게 되었네요. 로코란 무엇인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백업해둡니다. 그리고 역시 리맨물의 장점을 모르겠어요...